무덤에서도 악영향을 주는 자들(5) - 듀우이
이재만
1900년대 초에 진화론은 그 실체를 망각할 정도로 서양 전체를 덮고 있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연에게 선택되어 자신들이 현 위치에 왔다고 하는 '자연선택'의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한편 사회진화론은 진화라고 하는 낙관적인 사고를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풀지 못할 어떤 문제도 없으며, 시간만 주어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교만한 생각도 주었다.
진화론의 확산은 또한 진리의 책인 성경을 희미하게 만들어 버렸는데, 이것은 바로 기독교적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눈도 가려버렸다. 20세기 들어서 미국을 포함한 서구사회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경제, 정치, 국가,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이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대답하실까?" 하는 질문이 빠진 것이다. 바로 인본주의적 사고인 것이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진화론적 인본주의 사고가 어떻게 이토록 빨리 확산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바로 새로운 교육시스템의 변화와 이를 주도한 존 듀우이(John Dewey, 1859-1952, 미국)가 있었다. 그는 존스 홉킨스(Johns Hopkins) 대학에서 칸트의 심리학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894년 시카고 대학에서 철학, 심리학, 교육학 학과장이 되었고, 1904년에 컬럼비아대학의 교육학과장을 지냈다.
자서전은 그를 미국의 가장 뛰어난 철학가며 교육가며 미국의 교육시스템을 재 개편한 자로 평가했다. 그는 교과서에 진리의 본질부터 교사의 책임감과 인간의 특징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부분에 새로운 정의를 부여했다. 대학시절 듀우이는 헤겔 철학에 심취했으며, 실제로 헤겔이 말하는 어떤 본질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 동의한다고 스스로 말했다. 그의 영향으로 인간을 변하고 있는 생각, 논쟁, 관심, 문제 등이 뒤엉켜있는 일련의 집합체로 보았다. 이는 역사에 관하여도 진화론적 유토피아로 바라보게 하였다. 그의 생각은 미국 전역에 빠르게 확산되었으며, 대부분의 다른 국가들의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일반적으로 듀우이를 도구주의자(instrumentalist)라고 부르는데, "인간의 지성을 그 목적이나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도구"라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교육활동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교육에 진리가 얼마만큼 들어있느냐 보다는 학생들의 경험을 강조했다. 그는 "엄청난 질문을 받을지라도, 나에게는 그것들에 대한 대답을 할 욕심이 없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 막연한 마음을 가진 채로 그는 지도자의 위치에서 끊임없이 연설하며 많은 글을 썼다. 그러나 어떤 것도 일관성이 있거나 궁극적인 답을 주는 것이 없었으며, 오히려 모든 것이 정황에 따라 변하고 재해석되기 쉬운 것들을 그때마다 메워나가는 식이었다. 철학대백과(1967)에서도 듀우이에 대하여 "그의 글은 자주 과장되고, 불분명하고, 문장력이 부족했다"라고 평할 정도였다.
그의 교육학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궁극적 진리는 허상이다. 2)진리가 아니라 의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3)진리는 경험에서 얻어진다. 4)가르침은 근본적으로 실험에 의존한다(그러나 그의 실험주의의 가장 위험한 요소는 인간을 실험한다는데 있다). 5)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다.
아울러 그는 "하나님이란 생각은 자연의 힘과 연결된다. 나는 생각과 실재 사이를 움직이는 관계를 하나님이라 부르고 싶다"라는 식의 뉴에이지적 언급을 서슴지 않았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쉽게 뉴에이지 운동에 동화되고 있는 것은 듀우이 식 교육의 영향임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이 미국교육의 문제인가? 교수방법, 자금, 건물, 도시화 등 많은 이유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뒤에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가치상실이 있다. 진화론, 마르크스 이론, 자유주의 신학,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 듀우이를 통해 우리 교실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이들이 기본 전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직도 오늘날의 세상과 그 혼란한 생각은 그의 스승 듀우이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과연 어떻게 이 현실을 극복해야 할까?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열방이 그리하리로다" (시9:17)
하나님을 다시 찾아야 할 때다.
무덤에서도 악영향을 주는 자들(5) - 듀우이
이재만
1900년대 초에 진화론은 그 실체를 망각할 정도로 서양 전체를 덮고 있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연에게 선택되어 자신들이 현 위치에 왔다고 하는 '자연선택'의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한편 사회진화론은 진화라고 하는 낙관적인 사고를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풀지 못할 어떤 문제도 없으며, 시간만 주어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교만한 생각도 주었다.
진화론의 확산은 또한 진리의 책인 성경을 희미하게 만들어 버렸는데, 이것은 바로 기독교적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눈도 가려버렸다. 20세기 들어서 미국을 포함한 서구사회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경제, 정치, 국가,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이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대답하실까?" 하는 질문이 빠진 것이다. 바로 인본주의적 사고인 것이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진화론적 인본주의 사고가 어떻게 이토록 빨리 확산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바로 새로운 교육시스템의 변화와 이를 주도한 존 듀우이(John Dewey, 1859-1952, 미국)가 있었다. 그는 존스 홉킨스(Johns Hopkins) 대학에서 칸트의 심리학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894년 시카고 대학에서 철학, 심리학, 교육학 학과장이 되었고, 1904년에 컬럼비아대학의 교육학과장을 지냈다.
자서전은 그를 미국의 가장 뛰어난 철학가며 교육가며 미국의 교육시스템을 재 개편한 자로 평가했다. 그는 교과서에 진리의 본질부터 교사의 책임감과 인간의 특징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부분에 새로운 정의를 부여했다. 대학시절 듀우이는 헤겔 철학에 심취했으며, 실제로 헤겔이 말하는 어떤 본질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 동의한다고 스스로 말했다. 그의 영향으로 인간을 변하고 있는 생각, 논쟁, 관심, 문제 등이 뒤엉켜있는 일련의 집합체로 보았다. 이는 역사에 관하여도 진화론적 유토피아로 바라보게 하였다. 그의 생각은 미국 전역에 빠르게 확산되었으며, 대부분의 다른 국가들의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일반적으로 듀우이를 도구주의자(instrumentalist)라고 부르는데, "인간의 지성을 그 목적이나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도구"라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교육활동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교육에 진리가 얼마만큼 들어있느냐 보다는 학생들의 경험을 강조했다. 그는 "엄청난 질문을 받을지라도, 나에게는 그것들에 대한 대답을 할 욕심이 없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 막연한 마음을 가진 채로 그는 지도자의 위치에서 끊임없이 연설하며 많은 글을 썼다. 그러나 어떤 것도 일관성이 있거나 궁극적인 답을 주는 것이 없었으며, 오히려 모든 것이 정황에 따라 변하고 재해석되기 쉬운 것들을 그때마다 메워나가는 식이었다. 철학대백과(1967)에서도 듀우이에 대하여 "그의 글은 자주 과장되고, 불분명하고, 문장력이 부족했다"라고 평할 정도였다.
그의 교육학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궁극적 진리는 허상이다. 2)진리가 아니라 의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3)진리는 경험에서 얻어진다. 4)가르침은 근본적으로 실험에 의존한다(그러나 그의 실험주의의 가장 위험한 요소는 인간을 실험한다는데 있다). 5)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다.
아울러 그는 "하나님이란 생각은 자연의 힘과 연결된다. 나는 생각과 실재 사이를 움직이는 관계를 하나님이라 부르고 싶다"라는 식의 뉴에이지적 언급을 서슴지 않았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쉽게 뉴에이지 운동에 동화되고 있는 것은 듀우이 식 교육의 영향임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이 미국교육의 문제인가? 교수방법, 자금, 건물, 도시화 등 많은 이유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뒤에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가치상실이 있다. 진화론, 마르크스 이론, 자유주의 신학,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 듀우이를 통해 우리 교실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이들이 기본 전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직도 오늘날의 세상과 그 혼란한 생각은 그의 스승 듀우이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과연 어떻게 이 현실을 극복해야 할까?
하나님을 다시 찾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