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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계로 침투한 유신진화론 2 : 가톨릭과 개신교의 유신진화론화

미디어위원회
2006-04-19

기독교계로 침투한 유신진화론 2 

: 가톨릭과 개신교의 유신진화론화

임번삼 


(1) 가톨릭의 유신진화론화

유신론적 기독교 지도자들은 역사적으로 진화론에 대해 관용하거나 과학에 대해 무관심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진화론은 기독교계내로 급속히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이다. 가톨릭교계에는 스팔란쨔니, 레디, 파스퇴르, 멘델과 같은 성실한 창조과학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뷰퐁, 니이덤, 뉴먼, 샤르뎅과 같이 노골적인 진화론자들도 있었다.

가톨릭의 유신진화의 뿌리는 일부 교부들의 6기간설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신론적 자연관을 창세기와 조화시킨 스콜라철학(Thomism)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스콜라철학을 집대성한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창조주를 만물의 제일생성원인(Prima causa)이라고 하였다(사진 8). 그리고, 창조주가 만드신 자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을 반영하여 신비화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속에 내재하는 원리를 신격화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그러한 존재를 ‘아리스토텔레스적 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인본주의도 가미하였다. 이러한 스콜라사상은 트렌트공의회(Council of Trent 1545)에서 최종적으로 공인되었으며, 아퀴나스 이후의 가톨릭은 신비주의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Taylor; ibid, pp18-19]


근세로 접어 들면서 뷰퐁(1707-88)은 지구의 냉각속도로부터 지구의 역사가 74,832년이며, 이러한 이론에 맞추기 위해 창세기 1장의 하루는 태양일의 하루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생명은 저절로 발생한다는 자연발생설을 주장하였다. 뷰퐁의 영향을 받은 그의 친구 니이덤은 창세기에 생명의 창조가 두 단계로 일어났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물이 생물을 내라”(창1;20-21)는 기록과 ”흙으로 모든 생명체들을 만드셨다”(창2;19)는 기록이 그것이다. 따라서, 그는 물과 흙으로부터 생명체가 영속적으로 출현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발생설에 대하여 레디스팔란짜니생명의 발생은 단회적이었다고 반박하여 생명의 기원논쟁에 불을 붙였다.

여기에, 18세기말부터 국부홍수론, 동일과정설, 진화론 등이 교회내로 침투하면서 가톨릭은 혼란의 와중으로 빠져 들기 시작하였다. 19세기에 다윈이 항해를 시작할 무렵 옥스퍼드대학에서는 금식, 독신, 회개운동을 강조하는 옥스퍼드운동(Oxford Movement)이 한창이었다. 이 운동은 가톨릭계로 확대되었는 데 그 지도자가 뉴먼( John Henry Newman 1801-1890)이었다. 그는 영국성공회의 교리가 로마가톨릭 교리의 입장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성공회를 사직하고(1843) 가톨릭으로 돌아갔다(1845). 그 후, 그는 20여년간 유신진화론을 펼쳐 나갔다(Lash 1975). 그의 <기원론>(Origin)이 14년간 가톨릭내에서 배포되면서 진화사상의 확산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는 가톨릭교회 추기경으로 임명되면서(1877) 그 때까지 가톨릭교계에서 금지되어 왔던 진화서적의 발간을 허용토록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 후, 교황청(Pope Pius Ⅸ)은 <과정주의, 자유주의, 현대문명주의를 저주하는 문서>(Syllabus of Errors)를 발행하였는 데, 이 문서는 사실상 다윈의 진화론을 수용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서 와이즈맨(Nicholas Wiseman 1802-65) 추기경은 1836년에 라이엘의 동일과정설을 옹호하면서 같은 교회의 복음주의적인 매닝(Henry Manning 1808-92) 추기경과 격렬히 논쟁하였다.

샤르뎅(Teilhard de Chardin 1881-1955)은 벨그송의 <진화적 창조>(L'Evolution Creatrice 1907)에 영향을 받은 예수회신부로 가톨릭을 유신진화론으로 전환시키는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사진 11). 그는 진화론에 동방의 신비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을 접목시켰다. 그는 태초에 원물질이 있었고 이것이 진화하여 단세포, 식물, 동물, 인간으로 진화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후 전세계가 하나가 되는 오메가포인트에 도달하게 되는 데, 그것이 곧 예수라고 주장하였다. [손봉호; ibid, pp 158-159].

그는 젊었을 때부터 과격한 주장으로 교황청과 프랑스정부로 부터 두 차례(북경, 뉴욕) 추방을 당하기도 하였다(Speaight 1967). 인간은 원숭이에서 진화했다고 믿고 필트다운인의 사기극에도 깊이 관여했으며, 북경원인의 발굴에도 참여하였다. 북경에서는 바이덴라이히(Weidenreich)와 더불어 당시에 부르일(Bruil)이 북경원인과 같은 지층에서 발굴한 현대인의 유골을 윗 동굴(upper cave)에서 발견한 것인 양 왜곡하고 그것을 숨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이미 북경원인에 대한 설명에서 소개한 바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의 사상은 <인간의 현상>(Phenomenon of Man 1955)과 <기독교와 진화론>(Christianity and Evolution 1969)에 잘 정리되어 있다. 그의 사상(Teilhardian Evolutionism)은 후계자들의 활동에 힘입어 가톨릭내로 깊숙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Thomas F. Glick; Teihard de Chardin, Pierre, In Dictionary of scientific biography, Ed by Charles Gillispie, 3:274, New York, Charles Scibner's Sons, 1976] 오늘날, 공산국가에서 샤르뎅의 이론을 집중적으로 교육하고 있다는 사실은 깊이 음미할만한 일이다(Martin 1978). 1957년에 가톨릭성청(Holy Office)에서는 샤르뎅의 저서들에 대해 퇴출 및 불매령을 내렸으나 이러한 조처는 모니텀(Monitum 1962. 6)에 의해 금서목록(Catholic Index of Forbbiden Books)에서 해제되었다(Masala 1962).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예수회(Jesuit)에서는 샤르뎅의 작품을 변호하였다(Kopp 1964). 그 영향으로 진화론은 가톨릭내로 깊숙히 침투하게 되었다. [Tailtor; ibid, p 375]

가톨릭계 유신진화론자인 슛크립(1953)은 이렇게 진화론적 교육의 필요성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만일, 사람이 낮은 형태에서 진화했다는 이론이 확립된다면 창세기에 대한 교육도 그렇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E.F. Sutcliffe; Genesis in A Catholic Commentary on Holy Scripture, Thomas Nelson and Sons, p 185, New York, 1953].

로마교황 비오 12세는 <인간의 탄생>(Humani Generi 1950)이라는 교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격렬히 진화론을 비판하였다. ”몰염치하고 분별력없이, 자연과학계에서도 증명이 되지 않은...무엄하게도 세상이 진화과정중에 있다고 주장하는, 일원론적이며 범신론적 사상인 진화론은...공산주의자들이 즐겁게 이를 수용함으로써 인간신(人間神) 사상으로 사람의 영혼을 빼앗고...” 그러나, 그는 진화론의 개방요구를 거부하다가 마침내, 진화론과 인간이 유인원에서 진화했는지 여부를 신중히 조사하도록 명령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교황의 신중론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학자들은 결국 사람이 동물에서 진화했다는 자세를 명백히 수용하고 말았다. [Claudia Carlen; The Papal Encyclicals, 99, 1939-58, McGrath Publishing Co, Raleigh, 1981] [Whitcomb; ibid., p 122].

이렇게 사태가 진전되자 신학자인 에윙(Ewing)은 가톨릭기관지를 통하여 ”가톨릭의 공식교리와 인간의 육체에 관한 진화론 사이엔 아무런 갈등도 없다”고 선언하였다. [F. Ewing; Anthropological Quartery, p 123, 29(Oct), 1959]

최근, 요한바오로 2세는 80명으로 구성된 <교황청 과학아카데미에 보낸 서신>(1996.10.23)에서 ”새로운 지식으로 이제 인간이 생명의 초기형태에서 서서히 발전한 산물이라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가설이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고 진화론을 수용하는 공식입장을 발표했다[동아, 1996.11.10]. 그리고, 로마교황청은 1999년에 진화론을 교리적으로 수용하는 교서를 발표하여 기독교계에 큰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교황은 말하기를 ”인간의 육체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는 데 하나님이 거기에 영혼을 불어 넣어 창조하였다”고 했으며, ”종교교육과 진화론 사이에는 아무런 대립도 없고 진화론은 가설 이상의 중요한 학설”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갈릴레오의 지동설이 사실로 인정되었듯이 진화론도 그와 같이 인정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교황의 선언에 대해 가톨릭계의 한 일간지는 ”교황이 우리를 원숭이의 후손으로 만들었다”고 하였고, 시카고 트리뷴지는 ”기본적으로 인공 산아제한이나 여성사제의 안수, 신부의 결혼문제에는 보수적인 교황이 진화론에 대해서는 급진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대서특필하였다.


(2) 개신교의 유신진화론화

종교개혁후에 나타난 개신교는 루터교, 장로교 및 영국성공회로 대표된다. 개신교의 유신진화론은 가톨릭과 같이 일부 교부들의 6일상징설과 유니테리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어거스틴, 오리겐, 이레니우스와 같은 일부 교부들이 창세기의 6일을 24시간이 아닌 일정한 기간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 놓았으나, 당시에는 별다른 관심을 끌지 않던 문제였다. 그러나, 전술한 바 있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삼위일체론과 성경의 기적들을 부인하면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후일 유니테리언의 모습으로 재등장하면서 유신진화론은 활기를 띄게 되었다.


성공회를 발판으로 본격화되었다. 모두 영국에서 출발했지만, 유니테리언은 미국중심으로 영향력을 확대하여 나간 반면에, 영국성공회는 내부 인사들에 의해 진화론화 되면서 가톨릭교회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 척추동물의 고생물학의 창시자이며 화석학의 문을 연 큐비에(1768-1832)는 창세기의 6일은 비유라고 하였다. 그는 지구의 연대를 짧게 보긴 하였으나, 노아홍수사건만으로는 여러 지층에 대해 설명하기가 어려우므로 국부적인 홍수가 여러 번 일어났으며, 그 때마다 지층과 화석이 형성되었다는 다중격변설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최후의 전지구적인 홍수가 노아의 홍수였다고 하였다.

큐비에의 영향을 받은 에딘버러대학의 교수이면서 스코틀랜드교회의 목사인 챨머스(1780-1847)는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다는 간격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6일간의 창조는 문자 그대로 24시간의 하루라고 하였다. 펨버(Pember)는 6기간설을 더욱 보강하였으며, 그의 이론을 스코필드가 주석성경에 소개함으로써, 격변설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챨머스의 영향을 받은 옥스퍼드대학의 교수이며 웨스트민스터의 박식한 수석목사인 버클랜드(William Buckland 1780-1847)는 간격설을 수용하면서도 6일창조설을 부인하고 6일을 6기간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가톨릭 신부인 맥케너리(J. Mckenery 1829)가 영국의 남해안동굴에서 발굴한 석기들이 고대 부리튼인들의 것이라고 하여 유인원일 가능성을 일축하기도 하였다. 버클랜드의 6기간설은 스미스(John Pye Smith 1774-1851)와 쿠르츠(J.H. Kurtz 1809-1890)에 의해 보강된 후 앰헐스트대학(amherst Colledge)의 히치칵(Edward Hitchcock 1793-1864)에 의해 미국으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자유교회목사인 플레밍(John Fleming 1785-1857)은 버클랜드의 이론을 비판하고 장기간에 걸친 퇴적을 주장하였다.

버클랜드의 제자인 라이엘(1797-1875)은 지형이 장기간에 서서히 형성된다는 <지질학원리>에서 동일과정설(1833)을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지층을 해석하는 방법은 자연의 힘이 언제나 일정한 방식으로 작용해왔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장기간에 서서히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동일과정설은 다윈의 생물진화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미국의 교육 및 신학계로 급속히 파급되었다.

예일대학의 실리만(Benjamin Silliman 1779-1864)과 다나(James D. Dana 1813-95), 프린스톤의 구이욧(Arnold Guyot 1807-84), 맥길대학의 도손(J.W. Dawson 1820-99) 및 밀러(Hugh Miller 1802-56)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밀러는 <암석의 증언>(The Testmony of Rocks 1857)에서 재창조설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창세기의 표현은 관찰자에게 보인 모습으로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날-연대설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불행스럽게도 자살로 일생을 마감하였다.


영국성공회의 신부인 킹즐리(Charles Kingsley 1819-1875 사진 12)는 다윈으로부터 <종의 기원>이 출판되기도 전에 기증을 받아 읽은 후 진화론자로 변신하면서 그에게 감사의 편지(1859. 11. 18)를 썼다(F. Darwin, 2:287, 1887). 다윈은 기독교계의 한 목회자로부터 지지를 받은 데 힘을 얻고 <종의 기원> 제2판(1860)에서 그의 글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한 성직자가 내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은 스스로 다른 필요한 형태로 분화할 수 있는 약간의 원형만을 창조하신 것으로 믿는다고 하였다...그의 법칙(자연법칙)에 따라서”. 그는 또한 어린이용으로 만든 교재인 <물의 아이들>(The Water Babies 1863)에서 자연의 설계자인 <하나님 아버지>를 <어머니 자연>으로 바꾸어 표현하였다. [Francis Kingsley Ed; Charles Kinsley: His letters and memorries of his life, 2nd ed, Macmillan, London, 1904] 그리고, ”옛 것으로부터 새로운 짐승들이 태어나는” 내용을 담고 있다(C. Kinsley 1979). 그의 뒤를 이어 보이스카웃을 창설한 포웰(Boden Powell 1857)과 나탈주교(Bishop of Natal)로서 모세오경과 여호수아서를 믿지 않았던 클렌소(John Colenso 1814-1883) 역시 성공회에 진화론을 도입한 장본인들이었다.


그러다가 성공회에 획기적으로 진화사상을 도입한 사람이 템플 부자였다. 후레드릭 템플(Frederick Temple 1821-1902, 사진 13)은 다윈을 기독교의 상징인 웨스트민스터 교회에 매장하도록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캔터베리 주교로 선출된 후(1896) 적극적으로 진화론을 성공회내로 유입하였다. 그의 아들로서 역시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1942)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 1881-1944) 역시 좌익사상과 진화론을 동시에 성공회내로 유포시켰다.

복음주의적 신학자로 알려진 쉐이퍼(Francis A. Schaffer)를 비록하여 (Edward Young 1907-68), 바빙크(Herman Bavink 1854-1921), 그리고 복음주의적 과학자들이 만든 미국과학자협회(American Scientific Affiliation 1941)등은 6일을 기간의 의미로 해석하였다.

한편, 눌찌(A. Noedtzij)와 리더보스(Nicholas Ridderbos)등은 골격가설을 주창하였다. 성경의 골격은 창조, 타락, 구속, 회복이므로 창세기의 창조에 대한 기록도 문자적인 해석을 하지 말고 구원을 이루기 위한 비유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밖에, 최근에는 생물의 진화가 자연계에서 일체 일어나지 않는 현상을 합리화하기 위한 새로운 학설이 제기되었다. 진행적 창조론이 그것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하나님이 자연법칙에 의해 진화를 계속 하시다가 중단시키기도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창조사역에 직접 개입하시기도 하신다는 것이다.

개신교의 신학자들 중에는 1950년대 이후에도 더욱 대담하게 진화론을 옹호하는 발언이 이어지고 있다. 허언(Walter Hearn & Richard Hendry 1961)이라는 신학자는 아담의 창조에 대해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 저자들은 성경이 생명에 대한 다양한 기작이 있을 가능성에 대해 거의 제약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Russell L. Mixter ed.; Evolution and Christian Thought Today, Grand Rapids: Eerdmans, p 69, 1959]. 그는 휫튼대학에서 열린 <오늘의 기원문제와 기독교적 사고>(Origins and Christian Thought Today, Fab. 17, 1961)라는 주제의 심포지움에서 ”확실히 어떤 (진화)과정을 통하여 우리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왜 아담이 어떤 과정을 통하여 창조되었다는 말에 무서워 떠는가? 어떤 (진화)과정을 통한 것인지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는 주장은 인정하지만, 하나님이 그러한 (진화론적) 방법을 택하시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고 반문하였다. [Journal of the American Scientific Affiliation, 14(2), June, p 42, 1961]  시포드(Henry Seaford 1958)는 ”자연계에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한 진화적 사고는 육체와 영혼에 대한 무신론적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 이제, 나는 자녀들에게 윤리를 가르칠 때 인간의 육체는 고등영장류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Henry W. Seaford; Near-Man of South Africa, Gordon Review, 4(4), Winter, pp 187-189, 1958].

암스텔담 자유대학의 레버(Jean Lever 1958)도 비슷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홍적세의 영장류와 거기에서 파생한 인간의 출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제쳐 놓는다면 우리는 최소한 인간의 동물기원에 관한 상식이나 유골과 관련한 인류의 탄생에 대한 가능성을 반대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우리는 사람과 동물사이의 유전적 관련성을 미리 반대하지 않는다.” [Jean Lever; Creation and Evolution, Grand Rapids International Publications, pp 197, 221, 1958] 미국의 훌러신학교 학장이었던 카넬((1959)은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지질학적으로 <문자적 하루설>이 부정되었으므로 고생물학적으로 볼 때 <순간창조설>은 확실히 몰수되어야 한다. 두 이론이 현재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만일, 하나님이 그의 형상을 먼지에서 나온 피조물에게 불어 넣기를 기뻐하셨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Edward John Carnell; The Case for Orthodox Theology, p 95, Philadelphia International Publications, Grand Rapids, 1959] 이러한 표현들은 인간이 유인원에서 기원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윈첼(Winchell)은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실 때 다른 사람들도 같이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그 근거로 그는 가인이 말했던 ‘사람들’(창4;14, 17)이나, 노아홍수 당시의 ‘사람의 딸들’(창6;-2)이 유인원인 사람짐승들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플레그(J.V. Ploeg 1965)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제안한다. ”우리가 유신진화론을 받아 들인다면 우리 사고도 혁신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차라리 사소한 것이다. 예컨데, 인간이 영장류에서 정말로 진화한 것이라면, 모든 악과 불완전성을 인간이 타락한 탓으로만 돌려야 할 것인지, (진화과정을) 너무 단순화시킨 것은 아닌지 책들을 다시 기술해야 할 것이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그렇게 하지 못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John Vander Ploeg; Revealation and Evolution, from a Netherlands Publication, The Banner, October 8, 1965]

유신진화론자들에 의한 자연계시론(natural revealation)은 성경이 말하는 특별계시론(special revealation)을 압도하고 있다. 유신론자들은 동물에서 진화한 아담의 신체에 아무런 기적도 지속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비록 하나님의 형상이 유인원에게 불어 넣어졌지만 그들은 다른 유인원처럼 병들어 죽게 되었으리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로마서(롬 5;12)에서 말하는 한 사람의 죄로 세상에 죽음이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Whitcomb; ibid., p 119]

이처럼, 과학주의와 유물사상에 물든 많은 학자들이 진화론과 기독교의 타협을 시도하고 있으며, 유럽과 미국의 전통적인 신학교들이 지금은 거의 이러한 신신학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에 구미제국에서 신학교육을 받고 돌아오는 신학자나 목회자 대부분이 진화론에 관용적인 것은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한국기독교의 심각성이 있다. 유신진화론자들은 관용하고 정통교회에서는 이러한 흐름에 무관심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한국 기독교계의 미래는 어디로 갈 것인지 명약관화하다.

필자가 다녔던 교회의 목사님 한 분(신학대학교 원장)은 인간이 쟈바인으로부터 3백만년 전에 진화했다고 기록한 그의 저서로 신학생들을 십수년째 가르치고 있다. 어느 목회자는 자신이 다녔던 모 장로교단의 교수중 70% 이상이 유신진화론자일 것으로 확신하였다. 복음주의적인 신학대학이 이 정도라면 자유주의 성향의 다른 신학교의 경우는 가히 짐작할만 할 것이다.

 

*참조 : <신간> 예수와 다윈의 동행 - 신재식(호남신학대 신학과 교수) (2013. 7. 31. 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13/07/31/0903000000AKR20130731125700005.HTML

진화론을 믿는 크리스천 과학자가 있다고? (2009. 6. 19. 오마이뉴스)
[서평] 우종학 박사의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59342

'창조의 방법으로 진화를 사용하셨다” (2015. 2. 10. 기독신문)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90276

Theistic evolution—a greater fairytale for mankind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2/j21_2_24-27.pd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Fall, the Curse, and the Gospel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1_1/j11_1_11-17.pdf

10 dangers of theistic evolutio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749/

Biblical problems for theistic evolution and progressive creatio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497/

'A child may see the folly of it'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427/

Is it possible to be a Christian and an evolutionist?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304/

Theistic evolution: what difference does it make?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795/

Did the Creator use evolutio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306/

What does the New Testament say about Creatio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806/


출처 - ‘잃어버린 생명나무를 찾아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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