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진화론 대 기독교도의 저항
(Hitler's Evolution Versus Christian Resistance)
Paul G. Humber
히틀러가 진화론자임을 가리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한 한 권의 저서가 출판된 지(1) 9개월 후에, 하버드 대학의 Stephen Jay Gould는 이 저서의 이론을 더욱 확고히 지지하는 논문을(2) 발표하였다. 그 논문에서 그는 Benjamin Kidd를 ”학계와 비전문가들 사이에서 크게 존경받고 있는 영국의 해설가”로 소개하면서, 키드의 말을 인용하였다. 키드는 독일이 ”다윈의 이론을 이용하여 전쟁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키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굴드에 의해서 인용되었다.
”다윈의 학설이 독일에서 정치적, 그리고 군사적인 목적으로 쓰이는 교본 속에 공공연히 등장하여, 독전(督戰) 계획은 물론, 힘이 곧 권리라는 이론을 국가정책에 반영하려는 고도의 조직적인 계획을 대대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2)
이와 같은 진화론과 나치즘의 연계를 살펴보고, 우리는 히틀러의 정책들이 기독교와 상충하는가를 알아보려 한다. 그동안에 드러난 증거들만으로도 나치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저항이 실제로 엄청났었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회고 (Einstein's Commentary)
<히틀러 치하의 교회의 고백 (The Church's Confession under Hitler)>에서 저자 Arthur Cochrane은 망명 중에 있던 위대한 물리학자 Albert Einstein의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성명서 내용을 자기의 저서 526쪽에 Wilhelm Niemoller의 'Struggle and Testimony of the Confessing Church' 란 제목으로 된 증언을 통하여 세상에 알려주고 있다.
”나치 혁명이 일어났을 때, 자유에의 헌신을 항시 자랑하던 대학들과 가까웠던 나로서는 자유를 사랑하고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대학들은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지 기대에 찬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대학들은 혁명이 나자마자 굴복하고 입을 봉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난날 열정적으로 자유를 사랑한다는 논설을 써왔던 위대한 신문들의 논설에 기대를 걸어봤다. 그러나 그들도 나치 혁명후 단 몇 주만에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고 말았다 ...”
이런 와중에서도 오직 교회만이 진리를 억압하려는 히틀러의 계획을 당당히 가로막고 나섰다. 그 이전엔 나는 교회에 대해 어떤 형태로도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직 교회만이 외롭게 지성과 도덕의 자유를 위하여 분연히 일어나 나치와 맞서 끈기있는 용기를 보여주었던 것을 알고 있기에, 지금 나는 교회에 대해 엄청난 애정과 감탄을 느끼고 있다. 한 때 내가 무시하였던 교회에 대해 지금 나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고 서슴없이 간증한다.' (3)
Roland H. Bainton은 이 부분에 대해 회고하면서 아인슈타인의 말의 진실성을 이렇게 간증했다:
”Karl Barth와 Hans Asmussen의 주도하에 약 4,000 명에 달하는 신교 목회자들은 참회하는 교회(Confessing Church)를 조직하였다. 이 모임은 1934년 바멘(Barmen)에서 '그 어떤 총통도 인간인 이상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설 수 없다' 고 선언하였다. 이로 인해서 이 참회하는 교회 모임은 자산을 몰수당하고, 신학교는 핍박을 받았으며 출판물은 금지되었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하자, 대부분의 목사들은 형무소로 끌려가고, 병역 연령에 해당하던 목사들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한 전선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연로한 목사들은 강제수용소로 이송되기도 했다. 그들 가운데 Martin Niemoller가 끼어있었는데, 이 사람은 루터교파의 목사로서 근 반 년 넘게 수감 생활을 끝내고 히틀러의 법에 의해 '국가와 나치당에 반역적인 공격' 이라는 죄명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나치주의 정책에 굴복하기를 거부하며 끈질기게 저항하였던 그는 마침내 나치가 몰락할 때까지 나치에 저항하는 신교의 상징적인 인물로 남아 있게 되었다.” (4)
코크레인(Cochrane)은 이런 사실들을 다음과 같이 확인하면서 그 의의를 크게 부각시켰다.
”용감한 베를린 교구의 마르틴 니몰러 목사가 조직한 '위기에 처한 목사들의 연맹' (Pfarrenernotbund ; Pastors' Emergency league)의 회원의 수가 1934년 1월 15일에 확인된 바로는 7,036 명에 이르고 있었다.”
코크레인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부언하였다.
”수많은 회원목사들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1937년 7월 1일에 연맹의 창시자가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맹은 결코 해체도 폐쇄도 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1944년 크리스마스 예배를 볼 때까지 존속했었다.” (3)
히틀러에게 전달된 한 통의 공식 메시지
1936년 6월 4일, 독일 복음교회는 한 통의 메시지를 히틀러 앞으로 보내어, 총통이 '독일 국민을 비기독교도로 전향시키려 하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하였던 적이 있었다.(3) (히틀러는 한 사람의 유태인을 숭배하는 종교를 믿을 마음이 조금도 없다고 했다.) 그 메시지에서 보다 더 뜻있는 대목은 이러했다 :
”국가 사회주의 인생관의 한계 안에 살고 있지만, 기독교도는 유태인에 대한 증오를 강요받았을 때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기독교 교리가 엄연히 살아있는 한, 그런 강요를 거부한다.” (3)
나치 점령 하에서의 유럽 기독교도의 저항
그들의 저항은 확고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실천행위였다는 전제를 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그들의 저항을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핍박의 강도는 매우 심했다. 작업장에서 지나치는 말로 히틀러를 '불한당'이라 내뱉기만 하여도 그 결과는, 예를 들어, 거세라는 형별이 내려질 것이었다.(5) 그러나 기독교도는 기독교도로서의 태도를 명시적으로 간증하고 행동하여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웃을 걱정하고 돌보던 기독교도 집단에 대한 새로운 증거들이 주기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뉴욕 타임스지는 1981년에 Victor Kugler의 사망을 보도하면서 그를 화란에서 '안네 프랑크(Anne Frank)를 숨겨주었던' 사람이라고 확인하였다.(6) 그 보도 기사는 그를 '기독교도'라고 기술하고, Charles Wittenberg의 말을 인용하여, Kugler가 "전 세계 사람들이 문을 꼭꼭 잠그던 시기에 나치 지옥을 도망쳐 나오던 희생자들을 숨겨주기 위해 문을 열어주었던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그런 크리스천이 Victor Kugler 혼자만이 아니었다. 유태인 대학살(Holocaust)이 자행되고 있던 시기에, '전 세계' 가 유태인들한테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코리에 텐 부움(Corrie ten Boom), 그녀의 누이동생, 남동생 그리고 아버지 이 모두가 화란 인들이었는데, 이들은 나치의 핍박으로부터 유태인들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라벤스부루크(Ravensbruck)에 수감되었다. (그들 중 몇 사람은 감옥에서 죽기도 했다).(7)
폴란드에서도 유태인들한테 동정을 보냈던 기독교도들이 있었다. 폴란드에서 기독교도들의 도움을 3년 동안 받았던 Nechama Tec는 지금은 코네티컷 대학의 사회과학 교수로 있으면서 <빛이 어둠을 뚫고 들어올 때(When Light Pierced the Darkness)>8 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고, 그 책의 주제로 기독교도들의 종교적 신앙심을 다루고 있다. 그녀는 기독교도들의 신앙심이 유태인들을 동정하게 한 주요 동기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Jacques Ellul은 한 사람의 기독교도로서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을 세차게 밀어주었다. "유태인 지역사회에 도움을 준 적이 있었는가?" 라는 질문을 받고 그는 대답하기를:
”그게 어떻게 시작됐었나 하면, 나는 사람들을, 특히 독일 사람들의 추적을 받고 있는 유태인들을 도와주려고 하였던 게 발단이 되었습니다. 나는 유태인들을 위해서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주었고, 우리 고장의 외곽지역에 있던 마끼 (maquis: 2차 세계대전중 항독 프랑스 애국군) 병사들과 연락망을 구축하기 위하여 지방 레지스탕스를 조직하였던 적도 있었습니다.” (9)
"바다에는 잡히지 않은 물고기가 수없이 많죠. 유태인들을 도와주었던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지나쳐버리기 쉬운 일입니다." 유태인들은 하롤드 슐바이스(Harold Schulweis) 랍비의 주도로 '의로운 기독교도들(Righteous Christians)' 을 위한 재단을 설립하였다. 이스라엘은 31명의 대상자를 선발하여 국립보험재단(National Insurance Foundation)으로부터 연금을 받게 하였다. 이스라엘은 또한 로즈 바르마(Rose Warmer)로 하여금 전국 규모로 학교에 신약성경을 배포토록 허락하였다. 그것은 그녀가 '2차 대전 와중에 지긋지긋한 아우슈비츠(Auschwitz)의 죽음의 수용소를 자진하여 찾아갔었기' 때문이었다.(10)
Joseph Bayly에 의하면, 플리머스 형제회(Plymouth Brethren)의 회원으로서 창조과학자이며 부다페스트 의과 대학의 교수로 있던 Ference Kiss 박사는 자기 목숨을 걸고 나치들로부터 유태인들의 생명과 자유를 보호하였다.(11)
미국에서는 어떠했을까?
수많은 기독교도를 포함하여, 모든 미국 사람들이 유태인 수난에 대해 그토록 무신경하고 복지부동하였다는 건 정말 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지금 낙태되고 있는 아이들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에 버금간다고나 할까). 미국 사람들은 위대한 미국의 정치가이며 기독교도의 대변인이었던 William Jennings Bryan이 '전 독일을 굴복시킨 나치 이론의 바탕에 다윈 이론이 깔려있다는 사실' (2) 을 미국 국민한테 알려주었지만 그들은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계간지 <헤브루 크리스천 협력(Hebrew Christian Alliance)>의 편집인만은 최소한 한 번은 목소리를 높였던 같다. 1943년, 그는 이 계간지의 사설에서:
”폭로된 독일 사람들이 저지른 잔학행위 내용을 보고, 또 듣고 당신들은 무엇을 느낍니까? 마음이 아픈가요? 당연히 그래야 하겠죠. 크리스천들은 너무도 오랫동안 침묵했어요. 이런 잔학행위가 벌어지기 훨씬 오래 전에 벌써 저들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들렸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형제들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야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들의 안위를 위해 기도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들을 먹여주고 옷을 입혀줄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엔 그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지워져 있습니다. 우리는 복수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히틀러와 그의 철학의 패배를 주창합니다.”(12)
결론
오늘날 세계인의 대부분은 히틀러를, 그리고 스탈린까지도 경멸합니다. 그들 두 사람은 한결같이 성경에서 일러주고 있는 이웃 사랑의 윤리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수백만의 인명을 살해하였습니다. 스탈린은 의식 속에서 다윈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13) 히틀러는 세계인의 목구멍 속으로 적자생존의 이론을 억지로 주입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1) Gould에 의하면, 곤충학자 Vernon L. Kellogg는 선점한 권리를 요약하여, ”가장 선진된 진화의 단계를 선점한 인간 집단은 … 생존경쟁에서 승리하여야 한다. …”라고 주장하였다는 것입니다.(2)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 사람의 유태인이었던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위하여 마음이 상하고 살이 찢겨 나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숭배하는 기독교도들이 그를 창조주로 믿고 있다는 것이, 그리고 사람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고 있다는 것이, 그러면서 히틀러의 철학이 전적으로 모순투성이라고 보는 것이 무슨 놀라운 일이 됩니까? 또한 예수님을 따르며, 고통 받는 유태인을 구제하기 위해 동정하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젖히는 것이 그 무슨 놀라운 일인가요?
*참조 : Darwin and Hitler: A Trumped-Up Connection? (CEH, 2008. 4. 16)
https://crev.info/2008/04/darwin_and_hitler_a_trumpedup_connection/
Nazi-Era Scientists Were Willing Colluders (CEH, 2008. 2. 17)
https://crev.info/2008/02/naziera_scientists_were_willing_colluders/
Hitler’s ‘master race’ children haunted by their past
http://creation.com/hitlers-master-race-children-haunted-by-their-past
The trial and death of Adolf Eichmann
http://creation.com/the-trial-and-death-of-adolf-eichmann
REFERENCE
1. Paul G. Humber, 'The Ascent of Racism,' Impact (Institute fro Creation Research, February 1987).
2. Stephen Jay Gould, 'William Jennings Bryan's last Campaign,' Natural History, November 1987, pp. 22-24
3. Arthur C. Cochrane, The Church's Confession under Hitler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2), pp.40, 108, 268-279, 278 respectively.
4. Roland H. Bainton (Marshall B. Davidson, Editor) The Horizon History of Christianity (New York: American Heritage Publishing Co., Inc., 1964), p.390
5. Helmut Ziefle, 'A Christian Family Resists Hitler,' Christianity Today, December 15, 1978, pp. 23-24
6. The New York Times, December 17, 1981, p. D23
7. Corrie ten Boom, The Hiding Place (Old Tappan, NJ: Fleming H. Revell, 1971).
8. Nechama Tec, When Light Pierced into Darkness: Christian Rescue of the Jews in Occupied Poland Oxford University Press, 1986)
9. David W. Gill, 'Ain Interview with Jacques Ellul,' Christianity Today, April 20, 1984. p.18.
10. The Church around the World, a news-sheet published by Tyndale House Publishers, Inc., Wheaton, 12/86 and 10/84 respectively.
11. Joseph Bayly, 'Salt, and Old Wounds,' Eternity, May 1986, p.64
12. Robert W. Ross, So It Was True: The American Protestant Press and the Nazi Persecution (University of Minn. Press, 1980)-discussed by Vernon C. Grounds in 'Have We Learned Our Lesson?,' Christianity Today, Sept. 6, 1985. p.42
13. Paul G. Humber, 'Stalin's Brutal Faith, ' Impact No. 172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October 1987)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pubs/imp/imp-181.htm
출처 - ICR, Impact No. 181, 1988.
히틀러의 진화론 대 기독교도의 저항
(Hitler's Evolution Versus Christian Resistance)
Paul G. Humber
히틀러가 진화론자임을 가리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한 한 권의 저서가 출판된 지(1) 9개월 후에, 하버드 대학의 Stephen Jay Gould는 이 저서의 이론을 더욱 확고히 지지하는 논문을(2) 발표하였다. 그 논문에서 그는 Benjamin Kidd를 ”학계와 비전문가들 사이에서 크게 존경받고 있는 영국의 해설가”로 소개하면서, 키드의 말을 인용하였다. 키드는 독일이 ”다윈의 이론을 이용하여 전쟁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키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굴드에 의해서 인용되었다.
이와 같은 진화론과 나치즘의 연계를 살펴보고, 우리는 히틀러의 정책들이 기독교와 상충하는가를 알아보려 한다. 그동안에 드러난 증거들만으로도 나치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저항이 실제로 엄청났었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회고 (Einstein's Commentary)
<히틀러 치하의 교회의 고백 (The Church's Confession under Hitler)>에서 저자 Arthur Cochrane은 망명 중에 있던 위대한 물리학자 Albert Einstein의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성명서 내용을 자기의 저서 526쪽에 Wilhelm Niemoller의 'Struggle and Testimony of the Confessing Church' 란 제목으로 된 증언을 통하여 세상에 알려주고 있다.
이런 와중에서도 오직 교회만이 진리를 억압하려는 히틀러의 계획을 당당히 가로막고 나섰다. 그 이전엔 나는 교회에 대해 어떤 형태로도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직 교회만이 외롭게 지성과 도덕의 자유를 위하여 분연히 일어나 나치와 맞서 끈기있는 용기를 보여주었던 것을 알고 있기에, 지금 나는 교회에 대해 엄청난 애정과 감탄을 느끼고 있다. 한 때 내가 무시하였던 교회에 대해 지금 나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고 서슴없이 간증한다.' (3)
Roland H. Bainton은 이 부분에 대해 회고하면서 아인슈타인의 말의 진실성을 이렇게 간증했다:
코크레인(Cochrane)은 이런 사실들을 다음과 같이 확인하면서 그 의의를 크게 부각시켰다.
코크레인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부언하였다.
히틀러에게 전달된 한 통의 공식 메시지
1936년 6월 4일, 독일 복음교회는 한 통의 메시지를 히틀러 앞으로 보내어, 총통이 '독일 국민을 비기독교도로 전향시키려 하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하였던 적이 있었다.(3) (히틀러는 한 사람의 유태인을 숭배하는 종교를 믿을 마음이 조금도 없다고 했다.) 그 메시지에서 보다 더 뜻있는 대목은 이러했다 :
나치 점령 하에서의 유럽 기독교도의 저항
그들의 저항은 확고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실천행위였다는 전제를 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그들의 저항을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핍박의 강도는 매우 심했다. 작업장에서 지나치는 말로 히틀러를 '불한당'이라 내뱉기만 하여도 그 결과는, 예를 들어, 거세라는 형별이 내려질 것이었다.(5) 그러나 기독교도는 기독교도로서의 태도를 명시적으로 간증하고 행동하여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웃을 걱정하고 돌보던 기독교도 집단에 대한 새로운 증거들이 주기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뉴욕 타임스지는 1981년에 Victor Kugler의 사망을 보도하면서 그를 화란에서 '안네 프랑크(Anne Frank)를 숨겨주었던' 사람이라고 확인하였다.(6) 그 보도 기사는 그를 '기독교도'라고 기술하고, Charles Wittenberg의 말을 인용하여, Kugler가 "전 세계 사람들이 문을 꼭꼭 잠그던 시기에 나치 지옥을 도망쳐 나오던 희생자들을 숨겨주기 위해 문을 열어주었던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그런 크리스천이 Victor Kugler 혼자만이 아니었다. 유태인 대학살(Holocaust)이 자행되고 있던 시기에, '전 세계' 가 유태인들한테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코리에 텐 부움(Corrie ten Boom), 그녀의 누이동생, 남동생 그리고 아버지 이 모두가 화란 인들이었는데, 이들은 나치의 핍박으로부터 유태인들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라벤스부루크(Ravensbruck)에 수감되었다. (그들 중 몇 사람은 감옥에서 죽기도 했다).(7)
폴란드에서도 유태인들한테 동정을 보냈던 기독교도들이 있었다. 폴란드에서 기독교도들의 도움을 3년 동안 받았던 Nechama Tec는 지금은 코네티컷 대학의 사회과학 교수로 있으면서 <빛이 어둠을 뚫고 들어올 때(When Light Pierced the Darkness)>8 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고, 그 책의 주제로 기독교도들의 종교적 신앙심을 다루고 있다. 그녀는 기독교도들의 신앙심이 유태인들을 동정하게 한 주요 동기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Jacques Ellul은 한 사람의 기독교도로서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을 세차게 밀어주었다. "유태인 지역사회에 도움을 준 적이 있었는가?" 라는 질문을 받고 그는 대답하기를:
"바다에는 잡히지 않은 물고기가 수없이 많죠. 유태인들을 도와주었던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지나쳐버리기 쉬운 일입니다." 유태인들은 하롤드 슐바이스(Harold Schulweis) 랍비의 주도로 '의로운 기독교도들(Righteous Christians)' 을 위한 재단을 설립하였다. 이스라엘은 31명의 대상자를 선발하여 국립보험재단(National Insurance Foundation)으로부터 연금을 받게 하였다. 이스라엘은 또한 로즈 바르마(Rose Warmer)로 하여금 전국 규모로 학교에 신약성경을 배포토록 허락하였다. 그것은 그녀가 '2차 대전 와중에 지긋지긋한 아우슈비츠(Auschwitz)의 죽음의 수용소를 자진하여 찾아갔었기' 때문이었다.(10)
Joseph Bayly에 의하면, 플리머스 형제회(Plymouth Brethren)의 회원으로서 창조과학자이며 부다페스트 의과 대학의 교수로 있던 Ference Kiss 박사는 자기 목숨을 걸고 나치들로부터 유태인들의 생명과 자유를 보호하였다.(11)
미국에서는 어떠했을까?
수많은 기독교도를 포함하여, 모든 미국 사람들이 유태인 수난에 대해 그토록 무신경하고 복지부동하였다는 건 정말 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지금 낙태되고 있는 아이들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에 버금간다고나 할까). 미국 사람들은 위대한 미국의 정치가이며 기독교도의 대변인이었던 William Jennings Bryan이 '전 독일을 굴복시킨 나치 이론의 바탕에 다윈 이론이 깔려있다는 사실' (2) 을 미국 국민한테 알려주었지만 그들은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계간지 <헤브루 크리스천 협력(Hebrew Christian Alliance)>의 편집인만은 최소한 한 번은 목소리를 높였던 같다. 1943년, 그는 이 계간지의 사설에서:
결론
오늘날 세계인의 대부분은 히틀러를, 그리고 스탈린까지도 경멸합니다. 그들 두 사람은 한결같이 성경에서 일러주고 있는 이웃 사랑의 윤리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수백만의 인명을 살해하였습니다. 스탈린은 의식 속에서 다윈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13) 히틀러는 세계인의 목구멍 속으로 적자생존의 이론을 억지로 주입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1) Gould에 의하면, 곤충학자 Vernon L. Kellogg는 선점한 권리를 요약하여, ”가장 선진된 진화의 단계를 선점한 인간 집단은 … 생존경쟁에서 승리하여야 한다. …”라고 주장하였다는 것입니다.(2)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 사람의 유태인이었던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위하여 마음이 상하고 살이 찢겨 나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숭배하는 기독교도들이 그를 창조주로 믿고 있다는 것이, 그리고 사람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고 있다는 것이, 그러면서 히틀러의 철학이 전적으로 모순투성이라고 보는 것이 무슨 놀라운 일이 됩니까? 또한 예수님을 따르며, 고통 받는 유태인을 구제하기 위해 동정하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젖히는 것이 그 무슨 놀라운 일인가요?
*참조 : Darwin and Hitler: A Trumped-Up Connection? (CEH, 2008. 4. 16)
https://crev.info/2008/04/darwin_and_hitler_a_trumpedup_connection/
Nazi-Era Scientists Were Willing Colluders (CEH, 2008. 2. 17)
https://crev.info/2008/02/naziera_scientists_were_willing_colluders/
Hitler’s ‘master race’ children haunted by their past
http://creation.com/hitlers-master-race-children-haunted-by-their-past
The trial and death of Adolf Eichmann
http://creation.com/the-trial-and-death-of-adolf-eichmann
REFERENCE
1. Paul G. Humber, 'The Ascent of Racism,' Impact (Institute fro Creation Research, February 1987).
2. Stephen Jay Gould, 'William Jennings Bryan's last Campaign,' Natural History, November 1987, pp. 22-24
3. Arthur C. Cochrane, The Church's Confession under Hitler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2), pp.40, 108, 268-279, 278 respectively.
4. Roland H. Bainton (Marshall B. Davidson, Editor) The Horizon History of Christianity (New York: American Heritage Publishing Co., Inc., 1964), p.390
5. Helmut Ziefle, 'A Christian Family Resists Hitler,' Christianity Today, December 15, 1978, pp. 23-24
6. The New York Times, December 17, 1981, p. D23
7. Corrie ten Boom, The Hiding Place (Old Tappan, NJ: Fleming H. Revell, 1971).
8. Nechama Tec, When Light Pierced into Darkness: Christian Rescue of the Jews in Occupied Poland Oxford University Press, 1986)
9. David W. Gill, 'Ain Interview with Jacques Ellul,' Christianity Today, April 20, 1984. p.18.
10. The Church around the World, a news-sheet published by Tyndale House Publishers, Inc., Wheaton, 12/86 and 10/84 respectively.
11. Joseph Bayly, 'Salt, and Old Wounds,' Eternity, May 1986, p.64
12. Robert W. Ross, So It Was True: The American Protestant Press and the Nazi Persecution (University of Minn. Press, 1980)-discussed by Vernon C. Grounds in 'Have We Learned Our Lesson?,' Christianity Today, Sept. 6, 1985. p.42
13. Paul G. Humber, 'Stalin's Brutal Faith, ' Impact No. 172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October 1987)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pubs/imp/imp-181.htm
출처 - ICR, Impact No. 181,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