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 창조론, 유신진화론 2

진화론, 창조론, 유신진화론 2


<진화론의 역사>

 진화론의 역사는 그리스의 물질사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밀레투스의 삼인과 아낙시만드로스(BC 611-546 고대 그리스 밀레토스 학파의 철학자.) 및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는 생명이 무기물로부터 발생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중세기에 헬몬트(Jan Baptista van Helmont 벨기에의 의학자, 화학자 1579- 1644), 뷔퐁(Georges Louis Leclerc de Buffon 프랑스의 철학자, 박물학자 1707-1788), 니이덤, 풋세 등에 의해 꽃을 피웠다. 그들은 여러 그림과 책자를 만들어 시궁창에서 쥐가, 풀잎 이슬에서 반딧불이(우리가 흔히 반딧불로 알고 있는 곤충의 정식 이름)가, 갯벌에서 문어와 뱀장어가 저절로 생긴다고 하였다. 이러한 학술적 환경 속에서 라마르크(Lamarck 1744-1829 프랑스의 박물학자, 진화론자)의 용불용설과 후천획득형질의 유전설이 탄생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다윈(Charles Darwin)은 여기에 라이엘(1797-1875 영국의 지질학자)의 동일과정설, 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 1766-1834 영국 고전학파 경제학자)의 <인구론>, 페일리의 자연신학, 비들(George Wells Beadle 미국의 유전학자)의 유니테리언(1773), 및 계몽사상가인 몽테스키외(Montesquieu 1689-1755 프랑스의 사상가)의 인본주의 사상을 혼합하여 생물의 진화이론을 체계화한 <종의 기원>(1859)을 발표하였다. 

 그가 내세운 진화론의 요지는 이러하다. 생물은 필요 이상의 자손을 낳으며 (overproduction), 그들간에 자연환경에 적응하려고 개체변이(individual variation)가 생기고, 그 개체들간에는 생존을 위한 경쟁이 일어나며(competition), 그 결과 환경에 가장 적응한 개체만이 생존하게 된다는 것이다(The survival of the fittest). 이러한 방식으로 자연은 우량형질을 선택한다고 주장한다(natural selection).

이러한 주장은 후일 약육강식에 의한 힘의 논리를 독재권력에게 정당화시켜 주는 근거로 악용되었다. 다윈의 학설은 초창기에는 많은 반대에 부딪혔으나, 영국에서는 ‘다윈의 불독’이라는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영국의 동물학자 1825-1895)와 독일에서는 ‘진화론의 예언자’라는 헤켈(Ernst Haeckel 독일의 생물학자, 철학자 1834-1919)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윈주의의 모순이 속속 밝혀지면서 이를 수정하려는 많은 이론들이 등장하였다. 드브리스(Hugo de Vries 네덜란드의 식물학자, 유전학자 1848-1935)와 바이스만(August Weismann 독일의 발생학자, 유전학자 1834-1914)은 획득형질의 유전설을 부인하고 돌연변이가 진화의 요인이라는 신다윈주의(Neo-Darwinism)를 표방하였다(1902). 그러나 스펜서(Herbert Spencer 영국의 철학자. 1820-1903)와 헤켈 등은 자연도태설을 반박하고 획득형질의 유전을 주장하는 신라마르크주의(Neo-Lamarkism)를 내세워 이들과 격돌하였다. 한편 네겔리(Karl Wilhelm von Negeli 스위스의 식물학자. 1817-1891)와 에이머(Teodor Eimer) 등은 말발굽의 진화과정을 예시하며 자연계의 ‘고차원의 섭리’에 의해 정해진 방향으로 진화가 일어난다는 정향진화설(Orthogenesis)을 주장하였으나, 다른 진화론자인 심프슨(George Gaylord Simpson 미국의 고생물학자 1902-1984)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한편 소련에서는 오파린(Aleksandr Ivanovich Oparin 러시아의 생화학자. 1894-1980)이 생명이 저절로 발생했다는 화학진화설(chemical evolutionism 1936)을 다시 주장하였다. 아울러 루이셍코가 부활시킨 라마르크주의가 스탈린의 비호 하에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1953)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는 공산주의의 뿌리인 무신적 유물론을 수호하기 위해 학문이 이데올로기에 이용당한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진화 이론들이 1950년을 전후하여 바그너(Moritz Friedrich Wagner 독일의 생물학자. 1813-1887)와 로마네스(1848-94) 등에 의해 집단유전학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1960년대에 심프손, 피셔, 홀데인(John Burdon Sanderson Haldane 영국의 생리학자, 유전학자 1892-1964)  및 키무라 등에 의한 분자진화설과 1970년대의 굴드(Stephen Jay Gould)  와 엘드리지(Niles Eldredge) 등에 의한 단속평형설(punctuated equilibria theory 1973) 및 이영록 등에 의한 형질발현단계설(stepwise control theory 1989)로 이어졌다.

  

<진화론이 끼친 해악>

 이러한 진화론은 역사적으로 엄청난 재앙을 우리에게 끼쳤지만 아무도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아니, 골치가 아프기 때문에 피하려 하는 듯하다. 다윈의 사촌인 갤튼(1822-1911)은 우생학을 만들어 백인 위주의 인종차별을 주도하였다.

일부 구미의 백인국가에서는 백인종과 유색인종간의 혼혈을 막으려고 유색인종에 대한 이민제한법을 제정하거나 인종개량을 목적으로 단종법을 만들었다. 신체부자유자들과 유전질환자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금혼 조치를 취하기도 했으며, 이 법에 준거하여 나치정권에서는 200만 명 이상을 처형하기도 하였다.


최근(1999-2001)에는 인간게놈(human genome)의 구조가 밝혀지면서 우량인간을 복제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한데, 이는 새로운 우생학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인간 배아의 복제 역시 21세기의 바벨탑을 쌓으려는 위험한 시도로 간주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바이오해저드(biohazard 생물학적 위험. 사람과 그 환경에 대하여 위험시되는 생물학적 물질, 상황)를 사전에 막기 위한 생명윤리법(bioethic law)의 제정에 창조과학회를 비롯한 기독교계가 앞장서야 할 것이다.

약육강식에 의한 자연선택의 원리를 내세운 진화론은 당연히 군국주의자들에게는 약소국가를 침공할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해 주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독일, 일본, 이태리에서 태동한 군국주의였다. 독일의 진화론자인 헤켈은 나치당의 전신인 툴레당(Thule Geselschaft)의 비밀요원이 되었으며(1918), 이 선서식에 참석했던 히틀러는 1933년에 정권을 잡으면서 나치강령에 진화론을 삽입하였다.

그리고 헤켈이 <생명의 신비>(1904)에서 주장한 방식대로 데게쉬사(Degesch Chemie)가 개발한 독가스(Ziklon B)가 팔벤사(Farben Gmbh)의 레버쿠젠 공장에서 만들어졌다. 2억 2천만 명을 살상할 수 있는 양이 만들어지고 32회나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 중 최악의 사례가 유태인 600만 명을 죽인 아우슈비츠의 집단학살 사건이었다.

 

일본에서는 명치(明治) 후기에 미국의 요구로 기독교를 허용하면서(1837) 이에 대항하기 위한 방안으로 미국의 골수 진화론자인 모스(Edward Morse) 교수를 동경대학에 초빙하여(1877) 대학생들을 진화교육으로 세뇌시켰다. 그리고 창조론을 진화론과 병행하여 교육시키려고 하였던 모리(森) 문부상이 암살을 당하는 비운을 맞기도 하였다.

그 후 일본은 진화론적 약육강식의 논리에 입각하여 국력이 약했던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청나라와 러시아를 차례로 침략하는 제국주의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들의 침략은 곧 피침략국가의 고통으로 직결된 것이었다. 이처럼 진화론은 사랑과 공생의 원리가 아닌 힘의 논리에 의한 강자의 지배원리를 확산시켰던 것이다.

 

청교도 국가였던 미국에서는 진화론자들이 교육기관에서 종교의 자유를 내세워 창조론 교육을 축출하고 진화론 교육으로 대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운동에 앞장 선 진화론 교육자인 존 듀이(John Dewey  미국의 철학자, 교육학자. 1859-1952)는 인본주의 선언(Humanist Manifesto 1933)을 초안하여 인간을 신으로부터 해방시키자”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종교 대신 진화론적 과학주의를 제창하였다. 바야흐로 과학주의(scientism)가 21세기의 새로운 종교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듀이는 후일 모스크바재판(1936-1937)에서 트로츠키를 도와 준 공로로 소련정부로부터 사회주의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1963년에는 케네디 대통령이 ‘종교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하여 미국의 모든 국공립기관에서 기도와 성경을 축출함으로써 결정적으로 청교도적 창조신앙을 미국의 모든 공공기관으로부터 추방하는 폭거를 감행하였다. 이에 따라 모든 공교육기관에서는 창조론적 기독교교육이 사라지고 진화론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 후 케네디 가문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비운의 풍랑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처럼 세속인본주의(secular humanism 1979)는 진화론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국의 인본주의협회는 말하기를 ”인본주의란 인간이 자기 운명을 만들어 가는 존재라는 신념이다. 그것은 유신론적 종교가 아니라 삶의 한 방식인 건설적인 철학이다”고 하였다. 이 협회의 창시자 중 하나이며 진화론자인 헉슬리(Julian Sorell Huxley 영국의 생물학자. 1887-1975)는 같은 책자에서 ”인본주의라는 단어는 인간이 다른 동물처럼 자연의 산물이며, 인간의 영혼과 육체는 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힘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일컬을 때 사용하는 말”이라고 하였다. 영국인본주의협회는 인본주의의 신조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신에 대해 어린이에게 가르치는 것은 비교육적이다. 종교교육은 없애야 한다...종교는 단지 역사적 관심거리로 교육되어야 한다...종교는 인본주의, 마르크스주의, 모택동사상, 공산주의를 포함한다...나는 비종교적인 도덕성을 신봉한다...나는 용서받아야 할 죄가 없으며, 무덤 너머로는 생명이 없고 영원한 죽음만이 있을 뿐이라고 믿는다”

 

토마스 헉슬리의 손자인 줄리안 헉슬리는 유네스코헌장(1949)을 진화론에 입각하여 작성하였다. 그는 인류가 당면한 문제(핵무기, 식량부족, 에너지고갈, 전쟁, 공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소수 엘리트집단이 지배하는 세계정부의 구성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세계정부를 이끌 세계총통의 출현을 갈망하였다.

진화론은 이처럼 유엔을 통해 전세계의 교육계로 침투할 수 있는 교두보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제 인본주의자들에게 남아 있는 최종 목표는 소수 엘리트 집단에 의한 사회주의의 건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반신적(反神的)인 세속인본주의는 동양의 신비주의(요가, 명상, 선)와 접목되면서 뉴에이지운동(New Age Movement)과 연계되어 오늘에 이른다.


무신론적 유물론인  진화론은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러시아의 민중봉기이론을 수립한 허잔(1812-70), 볼셰비키 혁명(1817)을 주도한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 피의 숙청을 단행한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1879-1953), 그리고 중국공산당을 창건한 모택동(毛澤東 1893-1976) 등은 진화론에 입각하여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레닌과 스탈린은 다윈을 지식의 영웅으로 추앙하여 모스크바에 다윈박물관을 세웠으며 모택동은 다윈과 헤켈 및 히틀러에게 심취하여 공산당원들에게 약육강식 사상을 집중적으로 교육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도 일부 공산국가에서는 샤르뎅의 유신진화론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은 음미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

진화론이 끼친 또 하나의 해악은 인간존엄성의 거부와 전통윤리관의 붕괴이다. 그들은 인간이 유인원으로부터 진화한 것이라 믿기 때문에 인간존엄에 근거한 기존의 윤리관은 당연히 바뀌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진리나 가치관을 모두 상대화시켰고, 상황윤리(situation ethics)와 다원주의(pluralism)를 확산시켰다.

다원주의는 일면 합리적인 듯 보이지만 이러한 사상에서 만민구원설을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가 출현하여 전통복음에 심대한 위협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누구를 믿든 구원을 받게 되어 있다면 굳이 예수를 믿어야 할 당위성이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전통복음에 대한 이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밖에도 진화론은 학문을 반신적인 물질중심으로 재편케 하였다. 이러한 유물론적 풍조는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독일의 철학자 1770-1831)의 진화론적인 변증사관과 결합되면서 더욱 확산되었다. 헤겔의 제자인 포이에르바하(Ludwig Andreas Feuerbach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1804-1872)는 ”신이란 인간의 투영”이라 했으며, 영국의 인기작가인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는 ”신이란 인간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존재”라고 하였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독일의 시인, 철학자. 1844-1900)는 마침내 ”신은 죽었다”고 선언(1882)하였다. 이 해는 다윈이 서거한 날로 <종의 기원>을 발표한지 23년이 되는 해였다. 그 후, 니체는 정신질환으로 고통을 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신학계에서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일부 랍비들이 편집한 것이라는 문서가설(Documentary Hypothesis)이 등장하여 헤겔주의와 진화론의 영향으로 더욱 확산되었다. 고등비평론(Higher Criticism)을 주장한 독일의 자유주의신학자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 독일의 신학자, 역사학자, 셈어(語)학자.  1844-1918)은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고 공공연히 주장하였다. 브리태니커의 편집인으로 부임한 윌리엄 스미스는 재위 14년간 19판을 인쇄하면서 이러한 문서가설의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유신진화론은 날개를 단 듯 세계 각지로 확산되어 나갔다. 

 

<왜곡으로 점철된 진화론>

많은 진화이론은 조립, 조작, 사기극으로 점철된 것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인류의 조상이라는 호미노이드(라마피테쿠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등)의 유골들은 조립된 것이 많다.

라마피테쿠스는 오랑우탄의 뼈로 , 네브라스카인의 어금니는 맷돼지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호모 하빌리스는 원숭이의 유골이었다. 호모에렉투스에 속하는 자바인과 북경인의 경우도 유사하였다. 자바인은 발견자인 듀보아(E. Dubois)가 고백했듯이(1937) 긴팔원숭이였다. 북경인도 원숭이의 뼈들을 조립한 것이었으며 대개의 유골들은 여러 번에 걸쳐 진화론자들에 의해 어디론가 증발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어금니 두 개 뿐이다.

더 나아가 필트다운인의 것은 오랑우탄과 사람의 유골을 조립한 후 오래 된 것처럼 보이려고 치아를 줄톱으로 갈고 뼈들은 중크롬산카리액으로 염색한 사실도 드러났다(1953). 이러한 사기극을 주도한 사람의 명단에는 발견자인 우드워드(A. S Woodward)와 도오손(C. Dawson) 외에도 '1차 진상조사위원”이었던 아서 케이스(1866-1955)를 비롯하여 예수회 신부인 샤르뎅(당시 30세), 그리고 진화론에 심취하여 소위 ‘잃어버린 세계’(유인원의 세계)를 찾아 나섰던 인기 작가 코난 도일도 들어 있다.

샤르뎅은 이 밖에도 북경인의 유골조작과 로데지아인의 두개골에 있는 총탄구멍(?)을 메운 그림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바이덴라이히와 더불어 석회채굴업자들이 남긴 잿더미(7m)를 흡사 북경원인이 처음으로 불을 사용한 흔적인 것처럼 오도하는 일에도 앞장을 섰다. 그들의 주도로 한 진화론자 화가가 그린 불을 사용하는 북경인의 걸개그림이 대영박물관 입구에 내어 걸리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진화론자들이 제시한 유인원의 두개골 용적은 실측한 것이 아니라 진화이론에 부합하도록 임의로 책정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행위는 진화론자들의 과학을 빙자한 비과학적 행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다윈을 도와 진화론의 확산에 기여했던 헤켈(1834-1919)은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했다는 근거로 저 유명한 ‘배발생도’를 제시하여(1866) 지금도 세계의 많은 교과서들이 이를 싣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헤켈이 섬세하게 조작한 것임이 드러났다. 이러한 사실은 그 자신이 신문기자들에게 ”6-7%를 조작했을 뿐”이라고 한 고백에서도 입증되었다. 계속된 연구결과들은 헤켈이 6-7%가 아니라 엄청나게 조작했음을 밝혀 내었다. 뿐만 아니라 이 그림은 최근(1970)에 다른 진화론자인 리키가 최신 화보집을 발간하면서 재조작하였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처럼, 진리 아닌 것이 진리를 위장하고 정의 아닌 것이 정의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만큼,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가 크다는 의미일 것이다.

  

<유신진화론의 역사>

유신진화론의 정의와 범위는 아직 애매한 점이 많다. 이 단어가 내포하듯이 ”유신진화론은 하나님이 자연법칙에 따라 진화론적으로 우주만물을 만드셨다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창조주를 믿으면서 진화론도 수용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창세기와 진화론을 연계시키려는 목적에서 시도된 것이다. 유신진화론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콘셉은 진화론의 그것과 맥을 같이 한다. 예컨 데, 우주만물의 진화, 진화에 필요한 긴 지질연대, 각 지질연대에 부응하는 지층과 생물화석의 형성, 유인원으로부터의 인간진화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유신진화론의 범주에 진화 자체를 주장하진 않았다 하더라도 긴 지질연대를 상정하는 간격설과 날-연대설은 물론, 생물의 진화를 주장하는 진행적 창조론, 및 창세기의 내용을 비유나 신화로 폄하하고 있는 비복음주의적인 골격가설을 포함시켜 기술하고자 한다. 이러한 견해는 미국 창조연구소(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의 설립자이면서 창조과학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헨리 모리스의 <과학적 창조론>에 근거한 것이다.(Scientific Creationism, 16th ed. pp 215-255, 1991)

유신진화론의 기점을 잡는 일 또한 애매한 점이 많다. 그러나, 유신진화론의 큰 사상적 뿌리는 어거스틴을 비롯한 일부 교부들의 6일에 대한 기간적 해석과 삼위일체설을 부인한 아리우스주의(Arianism)에서 찾아야 하리라 생각한다. 여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에 영향을 받은 스콜라철학(Thomism), 근세의 자연주의(naturalism), 큐비에의 다중격변설(multiple catastrophism), 그리고 비들의 유니테리언(uniterianism), 벨그송의 생의 철학 등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요인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초대의 일부 교부들이 유신진화론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6일에 대한 기간적 해석은 후일 동일과정설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루터는 일부 교부들의 그러한 해석태도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였다.

한편,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삼위일체설을 부인하여 니케아종교회의(327)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게 되자 동유럽(폴란드, 헝가리)등지로 잠복하였다. 이들은 종교개혁시 루터교로 잠시 침투했으나 다시 영국과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그들의 영향을 받은 비들(1615-1662)은 영국에서 유니테리언 교회(Uniterian Church 17C)를 설립하였다.

이들은 삼위일체를 부인하고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자연현상이란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들을 부인하였다. 또한 설립 초기에는 유니테리언의 기치 아래 개별행동주의를 표방하였다. 이들의 세력은 소수였으나 매우 영향력 있는 지도급 인사들이 많았다.

 

경험주의 철학자인 로크를 비롯하여 고전물리학을 완성한 뉴튼, 산소의 발견자 프리스틀리, 인기작가인 밀턴과 에머슨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런던에 첫 교회(Uniterian Universal Church, 1773)을 세웠다. 그 후 보스톤에 세워진 킹스채플(King's Chapel, 1793)은 미국 유니테리언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다윈은 어린 시절부터 프리스틀리가 다녔던 유니테리언교회의 교인이었고, 그의 외가 겸 처가인 웨지우드 가문(Wedgewood family)도 골수 유니테리언이었다. 다윈의 가문은 대를 이어 명문인 웨지우드 가문과 사돈 관계를 맺었다. 이는 우량 가문간의 결합으로 좋은 자손들을 얻으려는 진화론적 발상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찰스 다윈의 10명의 자녀들은 막내(Leonard Darwin)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불구자이거나 어려서 죽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는 진화론적 우생학의 허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다윈 자신도 진화론을 구상한 시기(1838년경)부터 정신적 질환에 시달렸으며, 말년에는 얼굴에 번진 습진때문에 그 유명한 수염을 기르게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유니테리언 사상은 문서가설과 진화론의 탄생에 크게 기여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윈의 진화론이 발표된 이후, 진화론과 문서가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빠른 속도로 구미제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사상들은 먼저 영국성공회 내로 침투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자이면서 진화론자인 스미스(W.R. Smith)는 브리태니카의 주필이 되어(1881) 14년간 19판을 발행하면서 문서가설을 적극적으로 홍보, 확산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 결과, 성공회를 비롯한 기독교계가 유신진화론으로 급속히 물들어 갔다. 1890년경에는 구미 신학교의 요직이 문서가설을 신봉하는 유신진화론자들에 의해 독점되었고, 복음주의자들이 한직으로 밀려 나면서 창조론적 복음주의는 급속히 약화되었다.

미국에서는 다윈의 친구이면서, 유니테리언 신자인 부인의 영향을 받은 아사 그레이(1810-88)가 창조론적 고생물학자인 아가씨즈(1807-75)와 논쟁하였다. 불행스럽게도, 아가씨즈가 먼저 서거하는 바람에 하버드대학은 미국에서 가장 먼저 유신진화론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뒤이어, 그레이의 영향을 받은 스미스소니언의 초대관장을 지낸 제임스 다나(1813-95)가 퓨리탄 신앙의 본거지인 예일대학을 유신진화론으로 물들게 하였다. 그는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하였다고 선언하였다. 이어서, 프린스톤대학이 구이욧(1807-84) 등에 의해, 맥길대학이 도손(1820-99) 등에 의해 날-연대설을 수용하면서 유신진화론으로 옷을 갈아 입었다. 대부분의 신학교들도 유신진화사상으로 바뀌어 갔다. 미국의 교계 역시 인기있는 대중 설교가인헨리 비쳐와 포스딕(1878-1969) 등의 영향으로 진화사상으로 급속히 물들어 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신진화론의 성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챨머스(1780-1847)가 간격설(1814)을 제기하면서 부터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론을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킨 펨버의 이론이 스코필드주석성경에 소개됨으로써(1917) 간격설은 마침내 일반 대중속으로 널리, 그리고 깊속히 침투하게 되었다.

 유신진화론의 위험성은 이들이 교회와 신학교에  진화사상을 퍼뜨림으로써 범신론적 자연주의와 물질주의를 확산시킨다는 데 있을 것이다. 유신진화론은 간격설로부터 날-연대설, 골격가설, 진행적 창조설 등으로 다양하게 발전되어 오늘에 이른다.

 

 

*참조 : Creation Compromises : Framework Hypothesis, Gap Theory, Progressive Creation, Theistic Evolutio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3055

<신간예수와 다윈의 동행 신재식(호남신학대 신학과 교수) (2013. 7. 31. 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13/07/31/0903000000AKR20130731125700005.HTML

진화론을 믿는 크리스천 과학자가 있다고? (2009. 6. 19. 오마이뉴스)

[서평우종학 박사의 <무신론 기자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59342

'창조의 방법으로 진화를 사용하셨다” (2015. 2. 10. 기독신문)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90276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evolution/e3/e31/2002_130_3.htm 

출처 - 창조지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779

참고 : 5462|5461|5413|5272|5211|5210|5112|4766|4765|4636|4635|4542|4140|4039|3077|3426|3812|3244|3241|3041|3039|3037|3024|2864|2579|2359|2307|2114|2039|2016|1174|6107|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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