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에서도 악영향을 주는 자들(6) - 키에르케고르

미디어위원회
2004-10-05

무덤에서도 악영향을 주는 자들(6) - 키에르케고르

이재만 


      1800년대 말 종교계는 뵐하우젠이 성경의 영감설을 부인하는 자유주의 신학이 등장하여 성경은 점차 인간의 책으로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선생을 너머 결국에는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부담만 주는 존재로 떨어졌다. 1920-30년대 통해 자유주의 교회들은 진화론적 사고를 지적하기 보다는 오히려 진화론적 낙관주의와 발맞추어 앞으로 곧 원대한 천 년을 맞이할 것이라고 설교했다. 실제로 그때까지 세상은 점점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히틀러에 의한 나치즘, 러시아의 공산주의 혁명, 이태리에서 파시즘이 일어났다. 세계대전의 히로시마 원폭이 있었으며, 전쟁 중에 사천만 명이 이상이 죽었다. 결국 세상은 낙천주의 사고로부터 흔들렸으며, 오히려 비관적 사고가 지배적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 두려움 가운데서도 교회는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유신학으로는 교회가 세상을 지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조차도 비관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자유주의 교회들은 세상이 점점 좋아질 것이라고 설교했다. 자유주의 신학으로는 하나님 없는 미래가 어떻다는 것을 제대로 지적할 수가 없었다. 이는 많은 자유주의 신학이 신뢰를 잃게 되는 계기로 이어지도록 했다. 그 이유는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과도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실제와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때 고전적 자유주의 신학은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러면 이제 다시 교회는 성경적으로 돌아갔어야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기보다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신학 바로 자유주의를 대치할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세속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진화론적 낙관주의로 창창한 앞날만을 기대했던 세계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 공백을 메울 것을 찾기 시작했다.

이때 이 공백을 메운 것이 있었는데, 바로 우울한 덴마크사람으로 불리는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 1813-55, 덴마크) 였다. 그가 죽은 지 백여 년이 지난 뒤에 부활한 것이다. 실제로 그의 글이 영어로 번역되기 전까지만 해도 영어권 국가에서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가, 사망한지 한 세기가 지난 다음에야 세상에 영향력을 끼친 것이다. 그는 짧은 인생이었지만 다양한 주제로 많은 글들을 썼으며, 세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글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그럼에도 그의 글들은 믿음에서 이성까지의 범위를 다시 정의 내리는 길을 열어주었다. 바로 실존주의(existentialism)라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는 덴마크에서 부자상인이었으며, 아들에게 평생 일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부를 유산으로 남겼다. 사실 그는 결코 돈 벌기 위해 일을 한 적이 없다. 스물한 살 때부터 그는 집요하게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당시 자신의 심리적 상태가 흥분과 우울증이 동시에 반복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글은 한편으로는 환희가 있었고 한편으로는 혼돈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글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아주 어려웠다. 이는 그의 글의 번역가가 "Either/Or가 출판되어 고향에서는 떠들썩하였지만, 어떤 사람도 글의 목적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으며, 어떤 서평도 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는 표현을 쓸 정도였다.

키에르케고르의 가장 큰 영향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산만(diffusion)'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개인은 전적으로 믿었으나 그룹에 대하여는 개념조차 싫어했다. 그는 "군중은 비 진리이다"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그는 많은 것에 대하여 동의와 부정을 동시에 했다. 그러므로 그의 사고에 영향을 받으면 어떤 대상에 대하여 전체 의견보다는 개인의 판단을 의지하게 되며, 결국에는 그 자체가 진리냐 아니냐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

20세기 중엽부터 최종적인 진리는 사라지고 산만함만이 무성해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이다. 실존주의에 대하여 글을 쓴 커프만은 "실존주의는 철학이 아니라 기존 철학에 대한 광범위하고 다양한 반란이다. 이들은 실체에 대하여 다양하게 부정만 할 뿐이다"라고 표현했다. 실존주의는 기존의 통념을 부인만 한다. 단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입으라고 말한다. 당신이 옳다고 하는 것을 행하라. 거기에는 규칙도 원리도 없다.

실존주의는 오늘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철학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비철학이다. 이는 다른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를 부정한다. 이는 1960년도부터 젊은이들로부터 여자 같은 남자, 남자 같은 여자를 추구하도록 만들었다. 자유사랑, 자유섹스, 술 파티, 자살 등이 급증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모욕했다. 진화론과 공산주의같이 실존주의는 인류를 더 저급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논리를 이야기하지만 결국에는 규칙이 없다. 실존주의는 다른 철학과 다른 점이 있다. 거기에는 진리의 추구가 없다. 거기에는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는 순간만이 존재한다.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의 또 다른 형태가 태어났다. 다름아닌 신정통주의 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기독교적 실존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사고는 20세기 중엽부터 신학교와 교회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Barth, Bultman, Tillich, Macquarrie 등이 이를 받아들여 발전시킨 신학자들이다. 이들의 영향은 성경해석학과 설교학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하나님을 "만물"이 아닌 "우리의 존재 영역"으로 해석했다. 당장에 하나님의 존재와 인식에 영향을 주었다. 신정통주의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다룰 수는 없으나, 분명한 것은 키에르케고르의 글이 그렇듯이 이들의 신학도 아주 어렵다는 것이다. 어떤 것은 자신도 무엇을 이야기 하는지 모르는 듯한 내용도 많이 있다. 단순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진리말씀이 개인의 그릇되고 한정된 생각으로 설명하려다 보니 복잡해진 것이다.

신정통주의가 출현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한계를 느껴왔던 자유주의 신학은 마치 정통주의로 들어가는 것인 냥 변화를 추구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성경으로 돌아가려는 의지가 빠져있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것이다"라고 다시 가르치기 시작한 것 같았으나, 그 '영감' 이라는 의미를 퇴색시켰다. 영감이라는 의미가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주셨는가 보다, 그 말이 사람들에게 어떤 효과를 주었는지가 중요했다.

구원에 관하여도 '구원'은 그리스도 피로 인한 죄의 사함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었지만, 예수와의 심리적인 개인적 경험을 강조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죽음에서 부활이 아니라, 하나의 변화된 관계로 퇴색됐다. 구원이 전적인 것이 아닌 추상적인 영적 의미로 변했다. 그러므로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과의 화해가 아니라, 삶 가운데 깨달음과 평안이 되었다. 갈보리, 보혈, 용서, 원죄 등의 기독교의 중요한 주제들이 적당히 무시되었다. 구원은 경험 위주로, 신학은 문맥연구로, 진리는 모순덩어리로 변했다.

신정통주의는 많은 지식층 신학자들에게 받아들여졌으며 지금까지 아주 번영을 누리고 있다. 그리고 교회에 깊숙히 영향을 주어왔다. 왜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나? 우리가 구원 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세상에서 교회의 목적인 무엇인가? 천국은 어떠한 곳인가? 이들에 대한 대답인 근본적인 신조가 사라졌다. 실존주의의 산만이 곧 혼돈으로 이어진 것이다.

위의 모든 것들이 키에르케고르가 이룬 것들은 아니나, 그는 아직도 실존주의의 아버지로 남아있으며, 여전히 그 영향을 기독교와 세상에 끼치고 있다. 우리는 다아윈의 진화론을 통해 성경에서 멀어진 생각들이 실존주의 신학인 신정통주의까지 변화하는 그 맥락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저희 팔을 연습시켜 강건케 하였으나 저희는 내게 대하여 악을 꾀하는 도다.  저희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속이는 활과 같으며 그 방백들은 그 혀의 거친 말로 인하여 칼에 엎드러지리니 이것이 애굽 땅에서 조롱거리가 되리라" (호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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