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허튼의 전기 : 현대지질학의 주류인 동일과정설의 창시자

미디어위원회
2005-07-18

제임스 허튼의 전기 

: 현대지질학의 주류인 동일과정설의 창시자 

(Biography of James Hutton)


제임스 허튼 (James Hutton, 1726-1797).

스코틀랜드의 지질학자였던 제임스 허튼은 1726년 6월 3일 에든버러(Edinburgh)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 도시인 에든버러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면서, 그는 과학적 질문들에 대해 열정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었던 학생이었다. 그는 법률가(lawyer)로 도제(apprentice, 견습생)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고용주는 그에게 취미가 맞는 직업을 선택할 것을 충고하였다. 젊은 도제는 그가 좋아했던 화학 과목과 가장 가까운 의학(medicine)을 선택했다. 그는 에든버러에서 3년 동안 공부를 하고, 파리에서 의학 교육을 마쳤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1749년(23세)에 레이덴(Leiden)에서 의사(doctor of medicine) 자격을 취득했다. 그러나 그의 앞에 진로가 잘 보이지 않자, 그는 의사로서의 직업을 포기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베르윅셔(Berwickshire)에 있는 약간의 유산을 물려받았고, 농업(agriculture)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농사에 필요한 경작 방법을 배우기 위해 노폭(Norfolk)에 갔고, 계속하여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북부를 여행했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지구 표면에 관한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고, 훗날 그의 정렬을 바쳤던 문제들에 대해서 점차적으로 그의 생각 깊은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1754년(28세) 여름, 그는 베르윅셔에 자신의 농장을 세우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14 년 동안을 살았고, 농업의 가장 개선된 형태들을 소개했다. 농장이 체계적으로 잘 돌아가게 되면서, 농장의 관리는 더 쉬워졌고, 흥미를 점점 잃어갔으며, 농장은 스스로 돌아가도록 하게 하였다. 그는 에든버러에 돌아와 삶의 휴식을 취하게 된다. 이것은 1768년(42세) 쯤에 일어난 일이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고, 이 기간부터 그가 죽은 1797년(71세)까지 그의 세 여동생들과 살았다. 그는 취향이 같은 문학적 과학적 친구들과 어울렸고, 연구를 가까이 하게 된다.


그 당시에 지질학(geology)이라는 적절한 의미를 갖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광물학(mineralogy)은 상당한 진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허튼은 그 당시의 광물학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보다 더 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여러 가지 광물과 암석들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지구의 역사를 어느 정도 명백히 이해해 보고 싶어 했다. 수 년동안 그는 그 주제를 연구하기를 계속했다. 마침내 1785년(59세) 봄에, 그의 견해를 당시 설립되지 얼마 안 된 에든버러 왕립협회에 ”지구의 이론, 또는 지구 육지의 구성, 소멸, 회복에 있어서 관측되는 법칙들에 대한 조사 (Theory of the Earth, or an Investigation of the Laws Observable in the Composition, Dissolution and Restoration of Land upon the Globe.)” 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주목할 만한 논문에서, 지질학은 우주창조설(cosmogony)이 아니라, 지구 물질들에 대한 연구에 한정되어야만 하다고 상술되었다. 지구 도처에 다음과 같은 증거들이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지구 표면의 현재 암석들은 더 오래된 암석의 부스러기들로부터 많은 부분들이 형성되었다. 바다 아래에 쌓여져 내려오던 이들 물질들은 엄청난 압력 하에서 단단해지고, 연속적으로 파열되고, 지하 열(subterranean heat)의 팽창적인 힘에 의해서 융기되었다. 이 격동 동안에 광맥들과 용융된 암석 덩어리들은 지층 단층면의 갈라진 틈으로 관입되었다. 융기된 땅들의 모든 부분들은 대기에 노출되자마자 분해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분해는 육지 전체가 닳아 없어져 해양저에 퇴적될 때까지 계속 진행되었으며, 미래의 또 다른 융기가 단단해진 퇴적물들을 새로운 땅으로 다시 또 들어 올릴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허튼의 이러한 광대하고 대담한 개념의 일부는 이탈리아 지질학자들에 의해서 제시되었던 것이었지만, 허튼은 최초로 그들의 상호 관계를 신뢰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그들을 관측에 기초한 반짝이는 조리있는 이론으로 연합해 내었다.


허튼이 직접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단지 땅(earth)만이 아니었다. 그는 대기의 변화에 대해서 오랜 기간 연구를 하였다. 그의 책 ‘지구의 이론 (Theory of the Earth)’에 나타났던 같은 부피의 량이 또한 ‘비의 이론 (Theory of Rain)’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것은 1784년 에든버러에 있는 왕립협회에서 읽혀졌다. 그는 공기가 용액으로 보유할 수 있는 습기의 양은 온도가 증가함으로서 증가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다른 온도를 가진 두 덩어리의 공기가 혼합되었을 때 습기를 가진 부분은 응축되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지구의 다른 지역에서의 강우(rainfall)와 기후(climate)에 관련된 이용할 수 있는 자료들을 조사했다. 그리고 강우는 모든 곳에서 한편으로는 습도에 의해서 조절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높은 대기 중에서 다른 공기 흐름들의 혼합을 증진시키는 원인이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열정은 그가 30년 동안 에든버러에 거주하면서 발표한 다양한 연구들로부터 알 수 있다. 1792 년에, 그는 ‘자연 철학에 있어서 다른 주제들에 대한 논문(Dissertations on different Subjects in Natural Philosophy)’ 이라는 제목의 4절판으로 된 책을 출판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물질, 유동성(fluidity), 응집(cohesion), 빛, 열, 전기 등의 본질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이 주제들의 일부는 에든버러 왕립협회에서 읽혀진 논문들에서 그에 의해서 더 자세히 설명되었다. 그는 물리학(physics)의 영역 내에서만 자신을 제한하지 않았고, ‘지식의 원리 및 이성의 과정들에 대한 조사 - 감각으로부터 과학과 철학까지 (An Investigation of the Principles of Knowledge, and of the Progress of Reason - from Sense to Science and Philosophy)’ 라는 제목의 세 권의 4절판 책을 출판하면서 대담하게 형이상학(metaphysics)의 영역까지 나아갔다.


그 책에서, 그는 우리에 의해서 인지되고 있는 외부 세계는, 외부로부터 자극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우리 자신의 마음의 창조물이라는 개념을 전개하였다. 즉, 바깥 세계에 대한 우리의 그림과 실제성(reality) 사이에는 유사점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성과 일관성을 가지는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인상(impressions)들은  마치 그들이 정확히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물체들처럼 우리들에게 많은 실제성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도덕적 행위는 마치 우리의 생각이 완벽하게 그것들을 만드는 원인들과 부합되는 것처럼 똑같이 남아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의 말년은 그의 ‘지구의 이론’의 확장과 재출판에 힘을 쏟으며 보냈다. 그것에 대한 2 권의 책이 1795년(69세)에 출판되었다.


그 작업을 완료하는 데에 필요했던 세 번째 책은 그의 손으로 쓴 필사본으로 남겨졌고, 그의 전기 작가인 플레이페어(John Playfair)에게 넘겨졌다. 이 책의 한 부분은 레오나드 호너(Leonard Horner)에 의해서 런던 지질학회(Geological Society of London)로 보내졌고, 1899년에 게이키 경(Sir A. Geikie)의 편집 하에 학회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필사본의 나머지 원고들은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튼은 경작(husbandry)에 관한 그가 기록했던 많은 글들을 수집하는 분류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는 이것을 ‘농업의 요소들(Elements of Agriculture)’ 이라는 제목 하에 출판하려고 하였다. 그가 거의 이 작업을 마무리할 무렵인 1797년 3월 26일, 치유할 수 없는 질병으로 그의 활동적인 경력은 끝을 맺게 되었다.


그의 책 ‘지구의 이론(Theory of the Earth)’에 의해서, 허튼은 지질학이 발전을 지속하는 한 숭배를 받으며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무겁고 애매한 허튼의 글 형태 때문에, 그의 책들은 그의 생애 동안에는 그가 노력을 기울인 만큼 관심을 끌지 못했다. 허튼에게 다행스러운 것은 그의 과학 친구들 가운데 존 플레이페어(John Playfair)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에든버러 대학의 수학(mathematics) 교수였으며, 허튼의 교리를 전파하고자 하는 열정이 넘쳤던 사람으로 허튼의 주장들이 빛을 발하게 하였다. 허튼이 죽은 후 5년 후에, 그는 ‘허튼의 지구의 이론에 대한 해설(Illustrations of the Huttonian Theory of the Earth)’ 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플레이페어는 허튼의 이론을 훌륭하게 요약하였고, 많은 부가적인 해설과 논의들을 첨부하였다. 이 작업은 지질학 저술들에서 공헌도가 높은 고전 중에 하나로서 간주된다. 그 책은 영국 지질학의 발달에 있어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1805년에, 플레이페어에 의해서 쓰여진 허튼의 전기는 ‘에든버러 왕립협회 보고서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 of Edinburgh)’ (A. Ge.) 제 5권에 실리게 되었다.     

 

*참조 : The man who made the wedge: James Hutton and the overthrow of biblical authority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8_2/j18_2_55-57.pdf

St Hutton’s Hagiography
http://creation.com/st-huttons-hagiography

Darwin, Lyell and Origin of Species
http://creation.com/darwin-and-lyell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gennet.org/facts/hutton.html 

출처 - GenNe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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