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의 멘토 : 뜻하지 않게 진화론의 수립을 도운 성직자들

미디어위원회
2023-03-08

다윈의 멘토 : 뜻하지 않게 진화론의 수립을 도운 성직자들 

(Darwin’s mentors : How clergymen unwittingly helped pave the way for evolution)

Russell Grigg 


     찰스 다윈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두 사람은 목사면서 과학자였다. 한 사람은 캠브리지 대학의 식물학 교수였던 존 헨슬로(John Henslow) 목사이며, 다른 한 사람은 캠브리지 대학의 지질학 교수였던 아담 세지윅(Adam Sedgwick) 목사였다. 둘 다 진화론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평생의 친구였다. 


존 스티븐스 헨슬로 (John Stevens Henslow, 1796~1861)

헨슬로는 많은 분야에 흥미를 가진 학구적인 사람이었다. 1818년 졸업 후 아담 세지윅과 함께 와이트(Wight) 섬과 만(Man) 섬의 탐사에 참여한다. 1822년 캠브리지에서 광물학 교수로 임명을 받는다. 1825년에는 같은 대학에서 식물학 교수로 자리를 옮긴다. 그러던 중 1824년에는 성공회 목사(Anglican clergyman)가 된다.

.존 스티븐스 헨슬로 (1796~1861)

캠브리지 대학 식물원(Cambridge University Botanic Garden)의 창립자인 헨슬로는 1821년부터 영국 전역의 식물 표본을 채집하기 시작한다.[1] 그의 목적은 창조된 종(created species) 내의 변화의 한계를 분석하는 것이었다.[2] 그는 수집분석(collation)이라는 조사를 통해, 종(species)을 규정하기 위해서 변화(variation)의 한계를 사용했다. 여기서 그는 종(species)은 진화하지 않고, 한계 내에서 변화(variation) 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관점을 확립했다.

찰스 다윈은 그의 자서전에서 헨슬로와의 친분은 그의 생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적었다.[3] 이것은 1828년 다윈이 학부생으로 헨슬로의 리셉션에 참석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후 그는 헨슬로의 5주짜리 식물학 강의 코스를 1829년, 1830년, 1831년에 3번이나 듣는다.

헨슬로는 캠브리지를 거닐며 이 강의를 위한 준비를 하곤 했다. 다윈은 이 수업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다른 강사들은 다윈을 ‘헨슬로의 그림자’라고 불렀다.

다윈은 그의 자서전에서, 헨슬로를 이르기를 ”그는 아주 종교적이고, 정통적 교리를 믿고 있다. 어느 날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만약 영국 성공회 39개 신조(Thirty-nine Articles) 중 한 글자라도 바뀐다면, 아주 슬플거라고 얘기했다.” [5, 6]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슬로는 복잡하고 오랜 지질학적 역사에 대해서 수용하고 있었다. 비유적으로나 대략적으로 보지 않는다면, 장구한 연대와 창세기를 적합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헨슬로는 노아 홍수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로 혜성에 의한 재앙적 충돌의 결과라는 가설을 제안했었다.[7]

1831년 헨슬로는 비글호(HMS Beagle)의 박물학자로 찰스 다윈을 추천한다. 비글호는 영국 군함으로 로버트 피츠로이(Robert FitzRoy) 함장의 지휘 하에 남미로 탐사를 떠나는 배였다. 이보다 앞서 헨슬로는 다윈에게 지질학에 대한 현장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아담 세지윅 교수와 함께 북 웨일즈 지방의 지질학 탐사를 동행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8]

 

아담 세지윅 (Adam Sedgwick, 1785~1873)


.아담 세지윅 (1785~1873)

세지윅 역시 성공회 목사이자(1818)  교수로서, 캠브리지 대학의 지질학 학장이었다. 지금의 기준으로, 그는 복음주의적이지 않았으며, 젊은 지구 창조론자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진화론자도 아니었다. ”그는 지질학적으로 격변론자였고[9], 장구한 역사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신성한 창조 행위가 이어져왔다고 믿었다.”[10] 오늘날로 보자면 점진적 창조론자(progressive creationist)라고 분류할 수 있겠다. 그는 인류의 역사는 짧고, 지질학적 역사는 길다는 믿음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현현하심은 수천 년의 짧은 인간 역사에 제한받지 않으신다. 지질학자들은... 연속적인 지층들에 장구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썼다.[11] 

비록 세지윅은 오랜 지구 연대론을 믿는 지질학자였지만, 생물 진화론을 철저하게 부정했다. 1884년에 로버트 체임버스(Robert Chambers)가 익명으로 진화 또는 돌연변이에 관한 책인 ‘창조 자연사의 흔적들(Vestiges of the Natural History of Creation)’을 출간한다.[12] 그러자 새지윅은 찰스 라이엘에게 쓴 편지에서 그것을 맹렬히 비난했다. ”만약 그 책이 사실이라면, 진지한 사고는 헛된 것이고, 종교는 거짓이며, 법은 불필요한 것이며, 도덕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위해 했던 일들은 미친 짓이며, 인간은 그저 벌레보다 조금 나은 존재일 뿐이다.”[14]

 


다윈의 종의 기원에 대한 세지윅의 견해

새드윅은 1859년 출간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 대해서도 역시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다윈에게 쓴 편지에서 말했다 :

”자네의 글을 읽으면서 즐겁기보다는 괴로웠네. 일부는 높이 평가하는 부분도 있고, 배꼽이 빠질 만큼 웃은 부분도 있었네. 나머지 부분에서는 크게 슬픈 마음으로 읽었네. 왜냐하면 그것은 완전히 거짓이고, 완전한 험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네. 자네는 이탈했어....진실된 추론 방식을... 물질계처럼 자연에도 도덕적이나 철학적인 면이 있지. 이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깊은 어리석음의 늪에 빠지게 된다네.”[15]

그리고 그의 논평은 1860년 3월 24일 ‘스펙테이터(The Spectator)’ 지에 실렸다. 새지윅은 이렇게 썼다 :

”나는 이 이론에 혐오감을 표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이론의 확고한 유물론적인 측면 때문이다. 그것은 물리적 진실을 추구하는 유일한 방법인 귀납적 추론도 배제시켜버렸다. 최종 원인을 완전히 배제함으로써, 불충분한 이해를 그 옹호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나는 다윈이 무신론자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유물론은 무신론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오히려 명백한 자연의 질서에 반하는 것이며, 진실을 찾는 방법에서도 그렇다. 그리고 매우 해로운 것으로 보인다.”

”각각의 사실들은 연속적인 가정들과, 반복되는 하나의 잘못된 원리를 통해서 묶여있다. 공기 방울에서 실을 뽑아낼 수는 없는 일이다.”[16]

 


다윈을 빗나가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나?

이렇게 다윈의 학문적 경력에서 중요한 두 멘토를 살펴보았다. 헨슬로와 세지윅은 평범한 기독교인이 아닌, 열정적일뿐 아니라, 모든 생물학적 진화론에 반대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렇다면 찰스 다윈은 왜 그러한 롤 모델들의 가르침을 배반하고, 자신만의 반-기독교적인 진화론 철학을 발전시켰을까?

.찰스 다윈

답은 간단하다. 헨슬로와 세지윅의 기독교적 증거들과 다윈이 그들과 나눈 기독교, 성경, 특별한 창조, 종의 불변성 등에 대한 대화들에도 불구하고, 다윈이 확실히 받아들인 한 가지는 (특별히 세지윅에게서 받은 영향인) 장구한 지질학적 연대(오랜 지구의 나이)에 관한 믿음이었다. 그렇게 해서 의도하지 않게 창세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의 증거를 무너뜨리는, 진화가 ‘작동될 수 있는’ 시간 틀을 다윈에게 제공했던 것이다. 다른 것들은 중요치 않았다.


비글호에 탔던 다윈에게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의 책 ‘지질학의 원리(Principles of Geology, 1830)’를 추천한 사람도 헨슬로였다. 그 관점을 모두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경고했지만, 그 책은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ism, 균일설)을 주장하고 있었다. 즉, 지구는 동일한 과정에 의해 아주 장구한 시간을 거쳐 서서히 점진적으로 변화되었다고 보았다. (오늘날과 같은 느린 퇴적률과 느린 침식률이 과거에도 언제나 항상 동일했다고 가정한다). 그 책에 대해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헨슬로가 그 책을 다윈에게 권한 이유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것은 그 자신도 오래된 연대에 대한 관점을 무의식중에라도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찰스 라이엘은 생물학적 진화론을 완전히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는 ”가족 중에 누가 침팬지라는 생각과, 침팬지가 사람의 인격과 태도를 가지게 되어 인간이 되었다고 발상 자체부터 치가 떨린다”고 말했다.[18] 지질학의 원리 2권(1832)은 라마르크의 진화론에 관한 반박을 담은 책이다. 생물들은 진화했고 진화계통수로 나타낼 수 있다는 생각에 반대하는 현명한 논쟁을 담고 있다.[18, 19]

다윈은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에서 아직 비글호에 승선하고 있을 때, 이 두 번째 책을 받았다. 그러나 다윈이 다시 한번 받아들인 것은 생물들의 진화를 위한 장구한 시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결론

오늘날 많은 교회들과 신학대학들에서 수십억 년의 오래된 연대가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대략 1만 년 이내의 창조 연대를 배척하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비기독교인들을 전도하는데 이 편이 더 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다윈의 예에서 보듯, 현재도 마찬가지로 성경에 반하는 가르침은 결코 믿음으로 이끌지 못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불신을 야기시키고, 무신론적인 진화론을 더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Related Articles : Darwin’s slippery slide into unbelief

https://creation.com/charles-darwins-slippery-slide-into-unbelief


References and notes 

1. This was sufficiently detailed for Henslow to publish A Catalogue of British Plants in 1829.
2. Kohn, D. et al., What Henslow taught Darwin, Nature 436(7051):643–45, 2005.
3. The Autobiography of Charles Darwin, with original omissions restored. Edited with Appendix and Notes by his grand-daughter Nora Barlow, Collins, London, p. 64, 1958.
4. The historic statements of doctrine and summary of belief of the Anglican Church.
5. Ref. 3, pp. 64–65.
6. All ordinands for Anglican priesthood had to swear allegiance to the Thirty-nine Articles.
7. Walters, S. and Stow, E., Darwin’s Mentor: John Stevens Henslow, 1796–1861, Cambridge University Press, p. 162, 2001.
8. Henslow was also the chairman of the historic debate involving Bishop Samuel Wilberforce and Thomas Huxley, held at Oxford on 30 June 1860.
See Grigg, R., Did Wilberforce say it? Creation 13(1):33, 1990; creation.com/Wilberforce_say.
See also Sarfati, J., Post-script: Wilberforce Jr. v Huxley debate, creation.com/wilberforce#huxley, 20 February 2007.
9. That is, that the earth’s history was marked by repeated catastrophes, such as floods, with Noah’s Flood being the last one.
10. Adam Sedgwick, Wikipedia, www.en.wikipedia.org/wiki/Adam_Sedgwickaccessed 3 May 2008.
11. Sedgwick, A., Discourse on the Studies of the University, Leicester University Press, p. 22, 1969 reprint from 1833 original.
12. The work suggested that everything in existence had developed from earlier forms: solar system, Earth, rocks, plants and corals, fish, land plants, reptiles and birds, mammals, and ultimately, man.
13. Induction is a form of reasoning that draws general conclusions from individual instances or evidence.
14. A. Sedgwick to C. Lyell, 9 April 1845 in Clark, J.W. and Hughes, T.M., The Life and Letters of the Reverend Adam Sedgwick, Cambridge University Press, Vol. 2, pp. 83–84, 1890.
15. A. Sedgwick to C. Darwin, 24 December 1859 in Darwin. F., The Life and Letters of Charles Darwin, D. Appleton & Co., New York, Vol. 2, pp. 43–44, 1911.
16. Quoted by Darwin in a letter to Charles Lyell, ref. 15, pp. 91–92.
17. Desmond, A. and Moore, J., Darwin, Penguin Books, London, p. 108, 1991. Return to text.
18. Ref. 17, p. 131.
19. After Lyell had read Darwin’s Origin, he wrote to Darwin on 3 October 1859 : '… when, as I fully expect, a new edition is soon called for, you may here and there insert an actual case to relieve the vast number of abstract propositions” (ref. 15, p. 2). Lyell finally 'published an infuriatingly tepid endorsement of evolution in his Antiquity of Man” (in 1863).

Source: Milner, R., Putting Darwin in his place, Scientific American 287(4):79–80, 2002. 


*참조 : 자료실/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수십억 년의 연대 수용 문제 

https://creation.kr/Topic502/?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6825488&t=board


번역 - 박창민

주소 - https://creation.com/clergy-mentor-darwin

출처 - Creation 32(1):50–52, January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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