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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14

교황은 지적설계를 지지하였다.

(Pope Affirms Intelligent Design)


      진화론 찬성자들이 진화론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을 반대하는 한 주교(bishop)를 이용하고 있었을 때 (일부 역사적 배경과 함께 쓰여진 영국 Times Online의 글을 보라), 교황(Pope)은 신자들이 지적설계(intelligent design)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을 기대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하였다. Discovery Institute는 교황 베네딕트 16세(Pope Benedict  XVI)가 무신론(atheism)과 방향성 없는 진화론(directionless evolution)을 공격함에 있어서 '지적 프로젝트(intelligent project)” 라는 단어를 사용했음을 기뻐하였다. Evolution News는 교황의 발언이 최초에 보고 되었던 것보다 강경해졌다는 이야기를 곧 바로 보도하였다. 그 단어는 '지적 계획(intelligent plan)”으로 번역되었어야만 했다. 그리고 무신론과 방향성 없는 물질주의(materialism)에 반대하고 있는 직접적인 발언도 포함하고 있었다.



물론 교황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주문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의 발언은 아직도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을 허락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은 일반적으로 진화론에 대해 부드러운 종교적 반대를 희망했던 진화론자들에게는 하나의 타격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교황이 수억 명의 가톨릭 신자들의 충성(allegiance)을 명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진화론은 "하나의 가설 이상(more than a hypothesis)” 이라는 애매한 발언을 왜곡하여 왔었다. 교황 베네딕트 16세의 더욱 분명한 발언은 무신론과 위장된 진화론에 대한 반대와 더 많은 논쟁을 일으킬 것이 확실하다. 진화론에 대한 진화론자들의 해석에 있어서 키(key)는 진화론은 원인이 없고(uncaused), 지시됨이 없으며(unguided), 방향성이 없다는(directionless) 것이다. 교황은 이러한 믿음을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지적설계와 유사한 '지적 계획” 이라는 단어를 실제 사용하였다. 라즈카노(Sr. Lazcano)는 이것에 대해 무엇이라 할까? (11/04/2005의 이야기를 보라)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creationsafaris.com/crev200511.htm 

출처 - CEH, 2005.11. 10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969

참고 :

유종호
2005-10-31

현대 진화론의 역사 - 4 

: 여러 모양의 진화론자들


7. 잘못을 시인한 진화론자들

비록 다윈과 그의 동료인 월리스가 진화를 마음에 품고 진취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을지라도, 그들은 생명의 기원을 설명할 수 없었고, 그 문제는 그들에게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었다. 다윈은 태초의 어디에선가 창조주가 계셨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말했다.

"창조주께서 여러 가지의 힘을 가지고 첫 형상에게 최초로 숨을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한 방식에는 웅장함이 있다.”

만약 생명이 창조되어야만 했었다면, 왜 그 밖의 다른 것들은 창조될 수 없었겠는가? 다윈은 여기서 우연히 자신의 전 진화론이 잘못된 것임을 시인했던 것이다.

알프레드 월리스는 생명이 식물의 세계에서 동물의 세계로 진화한다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물질과 그것의 법칙과 힘에 의한 설명의 가능성을 완전히 초월하고 있다.”

다시 한번 원조 진화론자가 자신의 이론이 근거가 없으며 빗나간 것임을 시인했다.

다윈의 사상을 확산하려 애를 썼던 ‘다윈의 불독” 토머스 헉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반적 단어의 의미에서 창조는 있을 법한 일이다. 나는 이러한 우주가 이전의 어떤 기간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존재 이전의 어떤 분의 의지에 상응하게 6일 간에 걸쳐 출현하게 되었다라고 쉽게 생각하게 되었다.” (레오나드 헉스리 저, 토마스 헉스리의 생애와 편지들 p429).

물고기 연구에 최우선적이었던 에롤 화이트는 말했다.

"나는 법정에서 유기적 진화를 입증할 방법이 없다고 자주 생각했다.” 


8. 토론하기를 거부하는 진화론자들

미국과 전 세계에 걸쳐 수많은 대학에서 1972년 10월부터 16년 동안 창조과학회의 헨리 모리스와 듀안 기쉬 등 창조론자들과 여러 제목들로 기원과 관련된 교수 및 박사 등 진화론자들 사이에 토론이 진행되어왔다. 헨리 모리스 박사는 『현대 창조론의 역사』p.263-265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러나 최초의 공식적인 조직을 갖춘 창조과학회(ICR)에 관하여 캔자스 주 미주리 대학의 교수인 로봇 갠틸과 내가 1972년 10월에 토론했다. 나는 다른 모임 때문에 캔자스에 가 있었고, 어쨌든 그 지역에 머무르게 되었음으로 크리스천 모임에 소속된 어떤 학생이 나에게 대학 캠퍼스에서 토론할 용의가 있는지를 물어왔다. 나는 다른 대중연설 혹은 토론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동의했다. 나는 진화론의 전문가가 토론에서 무슨 새로운 증거와 논쟁을 전개할는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나의 두려움은 괜한 걱정이었다. 갠틸 박사의 경우도 그 문제에 취약했고 거의 관련이 없는 상태였다. 그는 단지 나의 논지에 답하는 정도로 미약했다. 나는 그가 더 잘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지만, 그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준비가 거의 되어있지 않았다. 여하튼 학생신문에 따르면 창조론의 확실한 승리였고, 그 말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곧 기쉬 박사와 나는 다른 대학 캠퍼스에서 비슷한 토론에 참가해 달라는 또 다른 초대장들을 받고 있었다..... 대학신문과 사회단체신문에서조차도 창조론자들의 승리에 동의하는 것 같았다. 최초의 4사람의 토론은 오클라호마 대학에서 1973년 1월에 있었다. 진화론자 2명은 지질학자인 데이비드 키츠와 생물학자인 허버트 프링스였다. 2명 모두 훌륭한 과학자였으며, 그 분야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다시 청중과 신문들은 토론에서 창조론의 승리가 확실했다고 보도하였다..... 나는 신속하게 이 상황에서 두려울 것이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러한 토론의 재미를 알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그러한 토론을 피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36번 정도의 토론에 참가했다.”

"기쉬 박사는 토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는 엄청난 지식의 소유자이며 기억력이 대단하다. 그는 열정적인 토론자이다. 그는 지금까지 100번 이상의 토론에 참가했다. 우리는 항상 진화가 과거에 발생한 적이 없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화석을 이용하는 등의 과학적 논리에 집착하는 편이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그러한 과학적 논리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경을 공격하고, 창조론자들이 종교적 동기를 가지고 있으며, 사람들은 종교적일 수 있고, 아직도 진화를 믿고 있다고 주장하며, 창조론은 과학적이지도 않고, 우리의 인격 또는 자격을 공격한다.”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없었던 한 가지는 진화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대진화의 진짜 과학적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론자들이 토론에서 항상 승리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토론을 잘하기 때문이 아니라, 창조가 진리이고, 진화가 거짓이며, 진정한 과학이 이 점을 뒷받침해 주기 때문이다.”

‘Macro’는 거대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대진화(macroevolution)'는 한 동식물 종이 또 다른 종으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물고기가 지상의 동물로 변하는 것이나, 고양이가 개로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화라는 고통의 바다』p.121 에서 헨리 모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본인과 창조론의 많은 동료들은 대학 캠퍼스에서 저명한 진화론자들과 많은 공식적인 토론에 참가했었다. 진화론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엔트로피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다룰 수 없었다. 그들의 상대방이 토론에서 그것을 주요 문제로 다룰 때조차도 그들 대부분 그것을 무시한다.”

이 책에서 내가 쓴 열역학 제2법칙 부분을 참고하라.

듀안 기쉬 박사는 1975년 2월에 예정된 토론자로의 참가를 취소하고, 학생들이 토론하도록 후원하는 방식으로 뉴올리언스 대학에서 스케줄을 잡았다. 학생들은 뉴올리언스의 여러 대학에서 진화와 생물학이라는 주제의 공식적인 강의에서조차도 진화론을 옹호할 수 있는 생물학자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기쉬 박사는 1974년 10월과 11월에 캐나다의 서해안에서 동해안에 걸쳐 있는 13개의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온타리오, 킹스턴에 위치한 퀸 대학에서 어떤 교수에게 기쉬와의 토론이 권장되었으나, 그는 기쉬의 저작물들이 부정직하고 심지어 극악무도한 기반 위에 서있다는 이유를 들어 토론을 거절했다. 그러나 기쉬는 거기서 강의를 했고 지속적인 찬사를 받았다. 토론하기를 거절했던 교수도 그 자리에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질문을 하는 데도 기쉬에게 도전하지 않았고,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1985년과 1986년에는 토론을 거절하는 일이 규칙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조지아 대학에서 1986년 2월 6일에 학생들은 진화론 교수들에게 기쉬와 토론하도록 청했다. 부탁받은 교수들이 모두 거절했다. 결국 고생물학의 박사학위를 취득한 콜럼버스 대학의 조교수인 슈위머 박사는 처음에 우주의 기원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겠다고 말했으나 토론하기로 동의했다. 그는 화석이 진화의 직접적인 증거라고 피력했다. 그러나 기쉬는 화석에 있어서 연결고리의 결여를 지적했다. 진화론의 전도사와 옹호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에 대한 과학적 기반의 결여를 드러냈다. 1987년 11월 9일에 헨리 모리스와 휴스턴 대학의 교수 사이의 토론이 과학적 창조론을 원치 않았던 학교직원으로 인해 취소되었다. 일상적으로 진화론자들은 자신의 이론을 발표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모리스 박사는 자신의 책 『창조와 현대 크리스천』p.102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화론자들은 진화와 창조에 관한 과학적 토론에 참석하기를 두려워한다. N.A.S(Nation Academy of Sciences)의 모임에서 한 사람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창조론자들과의 토론을 피해야한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이것은 모리스 박사가 1981년 11월 6일자 『과학』에서 인용한 것이다. 『사기재판, 1982』 p.17-18에서 닐 엘드리지는 이 모든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창조론자들은 미국 전역의 대학 캠퍼스를 방문하고 생물학자들, 지질학자들, 그리고 인류학자들과 토론을 하면서 돌아다녔다. 창조론자들이 항상 승리한다. 청중들은 개종한 사람들과 신앙이 깊은 사람들로 채워졌다. 최근까지 과학자들은 전혀 준비 없이 토론에 임해왔다. 그들은 폭 넓은 과학적 주제에 대한 직접적인 맹공에 의해 곧 패배한다. 어떠한 과학자도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질학, 인류학의 상관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오늘날 창조론자들은 지적이고 교양이 높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뛰어난 토론자들로서 자신의 임무를 완수해왔다. 그들은 항상 상대방들보다는 학식 있어 보였다. 그러나 창조론자들의 입장을 면밀히 조사해 보면 분명한 것처럼 그들의 주장은 실제 지적인 내용이 결여되어 있다. 창조론자들은 투명한 논리나 증명이 아닌 이상한 무대 출현 때문에 승리한다. 이러한 토론은 진화에 대한 진지한 사색이기 보다도 쇼에 불과하다.”

이러한 마지막 진술은 과학적 증거도 없이 창조론자들을 무작정 공격하는 진화론자들에 의한 것이다. 진화론에 입각한 모든 토론자들이 다른 과학에 해박한 것만이 아닌 이러한 주장은 매우 약점이 있다. 토론에 있어서 특정한 분야에 학식이 있는 다른 진화론자들은 진화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제공해 줄 수 없다.

1987년 3월 판『행위와 진실』이라는 팜플릿을 보면 미국의 집요한 3명의 진화론자들이 토론을 거부했다. 그들은 코넬 대학의 칼 세이건, 미국의 인문학회장인 아이삭 애쉬모프, 그리고 하버드 대학의 스티븐 굴드였다.

3월 23일 밤에 국회의사당이 예약되었고 기쉬 박사는 즉시 참석하기로 동의했다. 그 후에 진화론을 대표할 세이건 박사를 나오게 하려는 라헤이(LaHaye) 박사와 다른 사람들의 노력이 시작되었다. 진화론에 대한 그의 헌신과 창조론을 비과학적으로 비난하기 때문에, 이것은 진화론의 과학적인 타당성을 증명할 수 있는 이상적인 포럼이 될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그렇지 않았다. 그의 진화론적 세계관을 옹호하려던 수 주일의 시간이 흐른 후에 칼 세이건은 "아니, 참석하지 않겠다.” 라고 통보하였다. 다음으로 유명한 진화론적 과학자는 아이삭 애쉬모프이다.... 그는 세이건보다 더욱 신랄한 반창조론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기쉬 박사와 토론하도록 초대되었으나 세이건의 경우와 마찬가지 이유로 참석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스티븐 굴드 박사 역시 미래의 토론에 초대를 받았으나, 그 역시 거절할 의사를 표시했다.

<결국은 어린 세상> p.12에서 폴 액커만은 이러한 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과학적인 창조론자들이 열정적으로 활동한 지난 10년의 세월을 보내며 대부분의 진화론 교수들은 창조론 교수들과 토론하기를 꺼린다. 대부분의 진화론자들은 그런 토론에서 자신의 부족한 학식과 이론의 취약성으로 인해 공식적으로 수치심을 느끼게 되었다.”


9. 조급한 진화론자들

그러나 앞 장에서 언급된 점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자들은 매우 조급하여, 창조론자들을 무식하고 비과학적이라고 조롱하려고 한다. 진화론자들은 창조론자들을 비판할 때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우스꽝스러운 말을 한다. 사기재판에서 닐 엘드리지는 창조론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의 글들은 과학적인 세련된 용어를 사용하기 보다는 미경험자들을 납득시키기 위하여 아주 단순한 용어로 쓰인다. 더욱이 창조론자들은 나약하고 감상적이다. 그들은 과학자들을 인용할 때 단순한 철자 상의 에러를 범한다.”

고대의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파생어를 포함한 단어들을 쓴다고 해서 글이 과학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영어의 보편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어떨까? 식물(plants)과 동물(animals) 대신에 flora와 fauna와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논문이 세련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창조론자들과 토론을 할 때 그들은 이론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왜 탐구하지 않는가? 그러나 p.130에서 엘드리지는 쓸데없는 말만 한다.

"창조론자들은 형편없는 학자들이다 라고 이전에 나는 말했다.”

로봇 솔로몬이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쓴 기사가 「LA 타임스」(1984년 1월호)에 실렸다.

"태초에..... 진화-지성과 맞서 싸우는 무지의 전쟁”

진화 이야기는 명백히 과학적 지성에 근거하지 않는다.

알프레드 레윈켈은 『창조의 경이, 1974』p.31에서 이러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잘 요약했다. 

"한편 그들의 입증된바 없는 이론(진화론)은 절대적 진리로서 지식인과 문맹자들 모두에게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고, 중세 암흑시대의 편협한 신앙과 버금가는 광적인 옹졸함으로 방어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진화를 절대적인 도그마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꿈꾸는 바보로 여겨지거나 단지 계몽반대주의자로서 무시당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이러한 이론과 반대되는 시각을 표현하는 원고에 후원자를 찾지 못할 것이다. 만약 발행된다 해도 그 책은 고등학교 혹은 대학의 교재로 추천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대학의 과학부서에 자리를 확보하는 일 역시 어려울 것이다. 현대적 우상숭배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이단자이고 그런 취급을 받을 것이다.”

진화론자들은 창조론적인 시각에 매우 인색한 반응을 보인다. 헨리 모리스는 <진화라는 문제의 바다> p.81 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진화의 타당성에 관하여 과학적 질문이 제기될 때마다 진화론자들이 신랄하게 분노의 반응을 보이는 것은 왜일까? 진화에 대한 ‘종교적인’ 열정이 있는 것인가?”

1981년 초 새크라멘토 진화론 재판에서 창조과학회의 터너 변호사는 진화론자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들은 오만하고 거만한 사람들이다.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의 헌법을 수정해야할 정도로 위험한 사람들이다.”

워포드 대학의 화학 교수인 스콧 모로우는 로버트 겐트리가 쓴 『창조의 신비』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창조라는 주제에 관하여 기독교인이 쓴 책을 받았을 때, 불가지론자들인 진화론자들이 세운 지침을 이해한 사람은 빨리 대충 읽어보고, 그 책을 가까운 쓰레기통에 말없이 던져버릴 것이다. 결국 돌이 아닌 두뇌를 소유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 1)과학과 종교는 혼합될 수 없다. 2)진정한 과학자는 창조론자일 수 없다. 3)창조론자들은 과학자가 될 수 없고 과학적일 수도 없다. 4)더구나 근본주의적 창조론자들은 더욱 그러하다.... 앞의 계명들은.....애쉬모브(Asimov)와 세이건(Sagan)을 뜻하는 ‘A&S 독트린’으로 간주될 수 있다.”

로버트 겐트리는 그 책 p95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우리가 취해야 할 두 번째 입장은 예절과 겸손이다. 나는 가장 비과학적이고 잔인한 방식으로 종교적 생각을 경멸하고 공격하는 과학과 인문 수업이 끝난 후에 교실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근본주의적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 학생들이 불쾌한 고양이처럼 취급당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러한 종류의 취급이 과거에 갈릴레오를 다루었던 고위 성직자들의 태도보다 나을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당신의 자녀가 근본주의적 기독교인들을 조롱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조직된 공립학교에 다니도록 강요된다면, 비인격적인 사회문제에 대해 외치는 대신에 이곳을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진보냐? 퇴보냐? 어느 편인가?』에서 힐버트 시글러는 그의 책 마지막 두 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진화론에 대해 말했다.

"진화론은 다른 환경 아래서 많은 진화론적 과학 교수들을 배출했다. 그들의 학생들은 모든 주제에 의문을 제기하는 마음으로 접근하고 있고, 많은 과학자들은 상식을 벗어난 이러한 이론에 의문을 품고 있는 학생들을 귀찮게 여기고 있다. 우리의 희망은 의문을 품고 질문하는 지적인 정직함을 소유한 오늘과 내일의 젊은이들에게 있다.”



출처 - 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943

참고 : 6553|6486|6550|6149|6132|5081|5130|4639|5740|5683|5420|5994|6449|4821|6263|6018|6468|6148|6474|5510|5947|5954|5591|6211|5589|5602|5966|4837|6090|485|3890|390|2349|3782|6438|4510|5474|6495|5458|6243|5863|2698|6399|5460|6489|5135|5000|4828|6118|6394|6168|6138|5996|774|5497|5827|5158|5962|6358|6258|6119|4066|5544|5443|6556|6501|6096|5459|5274|5450|5909|6461|6436|5586|4542|5041|3391|6393|6476|6292|5796|5768|6271|5462|6146|6439|3591|6125|3426|6285|6152|6153|6022


유종호
2005-10-29

현대 진화론의 역사 - 3 

: 진화론을 반대한 훌륭한 과학자들


6. 진화론을 반대한 훌륭한 과학자들

다윈의 시대 이전까지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창조와 대홍수에 관한 성경의 설명을 믿었다. 케플러, 뉴턴, 패러데이, 갈릴레오, 브루스터, 린네, 파스퇴르, 캘빈 등의 진정한 과학의 아버지들은 창조론을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 창조와 창조주를 믿는 과학자들은 진화론자들에 의해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여기서 진화를 반대했던 훌륭한 과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자.

루돌프 버초(Rudolph Virchow: 1821-1902) 교수는 프러시아의 유명한 해부학자이며, 인류학자였고, 인체 병리학의 아버지이다. 그는 생리학의 권위자였으며, 훌륭한 화학자로 간주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화론, Wm Dallmann, 1975, p73). 

”그것은 전적으로 넌센스다. 인간이 원숭이 혹은 다른 동물의 후손이라는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이러한 이론이 발표된 이후로 모든 진정한 과학적 지식은 반대 방향으로 초점이 맞추어졌다. [비엔나에서 있었던 인류학자들의 모임에서 그는 말했다] 동물에서 인간으로의 변화를 찾으려는 시도는 완전히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중간 고리가 발견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루이스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는 화학, 의학, 세균학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과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자연발생적인 진화 사상을 공공연히 반박했다. 그는 창조론에 대하여 열정적이고 공개적으로 옹호했다.

자신의 동식물의 분류 체계가 오늘날에도 사용되어지는 스웨덴의 분류학자인 카를로스 린네(1707-1778)는 진화론을 강력히 반대한 인물이었다. 배런 큐비에(1729-1832)는 비교 해부학과 고생물학의 창시자였다. 그는 사적인 논쟁이나 공적인 논쟁에서 진화론자들을 이겼고, 창조론에 대한 강력한 옹호자였다.

지사학에 몰두했던 루이스 아가시스는 말하기를

”진화론을 받아들인 자는 누구나 과학자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케임브리지 대학 생물학 교수인 윌리엄 베트슨 박사는 1921년 12월 과학의 진보에 대한 연설을 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윈이 멘델의 법칙에 관하여 지금 입증된 사실을 알았다면, 다윈은 자신의 책을 출판하지 않았을 것이다.”

식물학자인 윌리엄 카루더스 박사는 말하기를 (Dallmann, p56),

”모든 증거가 진화론과 반대되는 마당에 진화론을 찬성할 자는 없다.”

하버드의 찰스 엘리엇 학장은 말하기를 (Dallmann, p23),

”진화란 가설일 뿐 과학이 아니다”

대영 박물관의 에드리쥐 박사는 (Dallmann, p24)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이토록 거대한 박물관에도 종의 돌연변이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진화론자들의 말의 90%가 관찰과 사실에 근거하지 아니한 터무니없는 엉터리다. 사람들은 어떤 이론을 채택하고 그것을 지지하기 위하여 사실에 집착한다.”

에르랑겐 대학의 동물학자인 플라이쉬만 교수는 처음에 다윈론을 믿었으나,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Dallmann, p26).

”다윈론에는 자연의 영역에서 납득할만한 단 한 가지 사실도 담겨있지 않다. 그것은 과학적 연구의 결과가 아니라 상상의 산물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열역학 제2법칙의 발견자인 동시에 유명한 물리학자인 로드 켈빈과 같은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여야한다. 그는 1903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Dallmann, p42).

”우리는 과학으로 인해서 물리력, 동력, 혹은 전기력 보다는 다른 영향력, 즉 직접적인 힘을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신뢰하지 않을 수 없다.”

빅토리아 연구소의 월간지 123호 p.267에서 그는 무신론적인 사상이란 너무도 터무니없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하버드 대학의 로웰 학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Dallmann, p46).

”성운설은 근본적인 실수에 기반을 두고 있다.'

클러크 맥스웰 교수는 (1879년에 사망) 다음과 같이 말했다 (Dallmann, p48).

”나는 한계 내에 있는 모든 이론을 조사했고 모든 사람은 그것을 역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시카고의 물리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로버트 밀리칸 박사는 말하기를 (Dallmann, p50),

”안타까운 일은 우리가 진화를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과학자들과 함께 한다는 점이다. 어느 과학자도 진화론을 증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험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는 허구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지질학자인 R. I. 머치슨 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Dallmann, p52),

”나는 살아있는 사람에게서처럼 지질상의 연령에도 많은 특성이 있음을 안다. 나는 우리의 지질상의 기록에는 다윈론을 지지해 줄 만한 하나의 증거도 없음을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다.”

독일 킬 대학의 식물학자인 J. 라인케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Dallmann, p60).

”확고한 존엄성을 가지고 과학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은 인간의 기원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존 러스킨은 진화를 경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Dallmann, p63).

”나는 진화에 동조할 논리적 주장을 아직 들어본 적이 없으며, 그동안 경멸 이하의 많은 내용을 들었고 읽어왔다.”

오버린 대학의 탁월한 지질학자인 조지 라이트는

”진화란 10분의 1은 형편없는 과학이고, 10의 9는 빗나간 철학이다.”

이제 우리는 죽기 직전까지 무신론자였다가 임종 직전에 마침내 하나님을 확실히 믿었던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멘카토 프리 프레스, MN 11-26-86에서 인용).

”나는 우주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공식적인 수학법칙과 제 원리들에 의해 결합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오로지 어떤 지혜자만이 우주를 결합시킬 수 있다. 인격 이외의 어느 곳에 그 지혜자가 계신단 말인가?”

1968년 1월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109 페이지에 어떤 필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아인슈타인이 언젠가 나에게 말하기를 '아이디어는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들은 아인슈타인이 존경의 마음으로 대문자 'G'로 시작된 단어(God)를 발음한 것을 들을 수 있다.”

소련의 독재자인 스탈린의 딸 스베트라나 알리루예바는 1967년 미국에 왔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이는 존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나는 어느 누구의 도움이나 설교도 듣지 않고 스스로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1982년에 사망한 소련의 권력 서열 제2인자인 알렉산더 코시긴은 종교에 몰입하였는데, 심장마비를 겪은 후에 하나님과 종교의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이전의 수상이던 흐루시쵸프가 사망한 후에 비슷한 이야기가 돌았다. 흐루시쵸프는 자신이 전적으로 무신론자가 아닌 듯이 정치생활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여러 차례의 언급을 했다. 이러한 모든 사람들이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지에 대한 것은 확실하지는 않다.

오늘날 과학적 연구와 발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수천 명의 과학자들은 진화론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창조를 믿고 있다. 수천의 대학생들도 교수의 진화론 강의를 거부하고 지적 설계자와 창조론의 견해를 고수하고 있다. 또한 많은 과학자들도 기원에 대한 연구와 논란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원의 문제는 실험에 의해 과학적으로 시험되고 입증될 수 없고 진화의 문제점을 무시해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헨리 모리스와 듀안 기쉬 등 두 사람은 한 때는 진화론자였던 현대 과학자들이다. 헨리 모리스는 『놀라운 행성 지구의 탄생』p.iv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때는 진화론자였으나 최근에 창조를 신뢰하게 된 수백 아마도 수천의 과학자들이 있다. 나도 과거에 대학에서 진화론을 수용했었기에 그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때부터 진화-창조에 관한 과학도서들과 성경을 읽어 본 결과, 문자 그대로의 기록인 성경의 내용에 모든 기원에 대한 과학적이고 만족스러운 설명이 들어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많은 다른 과학자들도 나와 비슷한 간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과학회의 모리스 박사와 그의 동역자인 듀안 기쉬는 미국의 유명한 대학에서 진화론을 강의하는 교수와 맞서서 논쟁을 벌였다. 여러 차례의 논쟁에서 진화론의 입장을 취한 어떤 사람도 그들을 논박할 수 없었다. 오늘날 이러한 현상과 관련된 많은 일들이 더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진화론을 거부하는 일련의 과학자들도 있다. 예를 들어서 영국의 천문학자인 프레드 호일과 그의 동료인 챈드라 위크래머싱은 무신론적 진화론을 포기하고, 이제 우주와 생명의 기원이 초월적인 설계자와 창조주의 결과물이라고 믿게 되었다. 비록 그들이 기독교인이 되지도 않았고 성경의 창조의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할지라도, 그들의 시각은 철저히 과학적 증거와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 프레드 호일은 우주의 기원론에 대한 창시자이며 오랜 세월 동안 솔직한 무신론자였다. 오늘날 그들은 진화론에 매달린 과거의 동료들로부터 따돌림과 조소를 감내하고 있다.

그 다음에 『진화: 위기의 이론』의 저자인 마이클 댄턴 박사가 있다. 그는 창조론자라고 주장하지는 않으나 "진화론자들은 환상의 날개에 매달리는 반면에 창조론자들은 실제 과학적 증거에 접근해있다.”라고 말한다.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 없는 기원의 문제에 연루되기를 원치 않는 많은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고등학교 교사들도 진화라는 주제를 무시한다. 변호사인 노만 맥베스는 다윈론을 철저히 연구했다. 그의 결론은 그것이 입증된 바 없으며 과학적 사실에 정반대된다는 것이다. 변호사의 날카로운 논리를 사용해서 그는 다윈론에 제시된 모든 증거가 무가치한 것임을 연구하고 입증했다. 이러한 진화에 대한 그의 논지 이외에도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재 시도된 다윈』p.146에 나온 다음과 같은 말이다. 즉,

”진화론자들이 고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연설을 할 때, 그들은 교사들이 전혀 질문이 없고 대답도 원치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심슨은 말하기를 '나의 진화라는 주제에 관하여 핵심적인 몇몇 교사들은 진화라는 말을 믿지 않고 그러한 주제가 언급되면 자동적으로 그들의 마음을 닫는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는 잘 속아 넘어가는 어린이와 청소년 앞에서 근거 없는 이론을 펼치고 싶어 하는 교사와 교수들이 항상 있게 마련이다. 꽤 학식 있어 보이려고 노력하면서 그들은 진화론을 마음에 품을 때 성급하고 이론적이 된다. 나는 내 손자의 경험을 포함해서 이러 경우를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많은 아이들이 진화론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공립학교에서 사용되는 많은 교과서에서 교묘히 끼워진 진화론 내용이 아이들에게 전해진다. 시민의 세금으로 지탱하는 학교에서 진화론을 배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하나님과 구세주에게서 멀어지는가?

그렇다. 얼마나 많은 신학자들이 진화론을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로 착각하여 그들의 본분을 이탈했는가? 그들은 창조와 진화의 설명을 조화시키려고 애를 썼고, 그것을 유신론적 진화론이라고 부르면서 사자를 양으로 왜곡하려했다. 그래서 진화가 하나님이 창조한 방식이라고 설명하는 신학자의 이야기를 진화론자들이 들을 때, 진화론자는 초자연적이고 신비한 성경을 포기한 신학자를 보고 비웃을 것이다. 그는 그런 식으로 성경의 하나님을 포기했다. 기독교적인 진화라는 말은 모순이다. 기독교와 진화론 사이에는 완전한 적대관계 외는 아무 것도 없고 있을 수도 없다. 그것은 우리를 다시금 창세기 6:1절에 있는 대로 하나님의 자손과 인간의 자손으로 되돌려 놓고 있다.



출처 - 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941

참고 : 6553|6486|6550|6149|6132|5081|5130|4639|5740|5683|5420|5994|6449|4821|6263|6018|6468|6148|6474|5510|5947|5954|5591|6211|5589|5602|5966|4837|6090|485|3890|390|2349|3782|6438|4510|5474|6495|5458|6243|5863|2698|6399|5460|6489|5135|5000|4828|6118|6394|6168|6138|5996|774|5497|5827|5158|5962|6358|6258|6119|4066|5544|5443|6556|6501|6096|5459|5274|5450|5909|6461|6436|5586|4542|5041|3391|6393|6476|6292|5796|5768|6271|5462|6146|6439|3591|6125|3426|6285|6152|6153

유종호
2005-10-28

현대 진화론의 역사 - 2 

: 20세기의 진화론자들


5. 20세기의 진화론자들

20세기에 접어들어 가장 주목할 만한 진화론자들은 리키 집안사람들이다. 부모인 루이스 리키와 메리 리키, 그리고 아들인 리처드 리키가 그들이다. 루이스는 1926년에 화석 탐사와 연구를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 경에 루이스와 메리는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인간의 화석, 즉 그들이 호미니드(hominid)라 부르는 화석을 발견했다. 과학적 증거는 없었지만, 그러한 화석의 연령이 2백만 년 정도라고 루이스는 믿었다. 그는 영국 여행을 끝낸 직후에 사망했다.

메리와 리처드 리키가 쓴 진화의 이야기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리더스 다이제스트』, 『패밀리 위클리』, 신문과 텔레비전 그리고 라디오에서 지금도 다뤄지고 있다. 그들은 아프리카, 케냐의 투르카나 호수 근처에 있는 퇴적암을 지금도 뒤지고 있다. 화산에서 터져 나온 잔해들과 노아 시대에 홍수로 인한 퇴적물에서 많은 화석들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리더스 다이제스트(1978년 2월호)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사로 그 곳에서 발견된 화석에 관한 진화론 편을 발행했다. 

”제목 : 인류의 뿌리 찾기. 거의 4백만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단서들이 인간의 가계도(家系圖)가 될 만한 놀라운 증거를 드러내고 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p.71을 보면 다음과 같다. 즉,

”2백만 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는 부서진 두개골 조각들이 케냐의 투르카나 호수의 퇴적층에서 발굴되었다. 그것은 케냐의 국립박물관에서 분류된 후에 ‘1470’의 번호 꼬리표를 달았다. 두개골 1470이 정리되었을 때 놀라울 정도의 현대적 머리모양이 나타났다.”

사실 그 두개골의 모양은 오늘날의 지성인의 두개골과 흡사하다. 그러나 두개골에 대한 예술가의 해설에 따르면 최초의 인간은 절반 정도 원숭이를 닮았다는 것이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p.72를 보면

”1975년에 메리 리키는 탄자니아의 레톨릴에서 375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인간의 턱뼈와 이빨 화석들을 발굴했다.”

여기서 수백만 년의 세월이 얼마나 가볍게 다루어졌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미니애폴리스 트리뷴』(1976년 3월 9일)에서 행해진 다음과 같은 설명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인류학자인 도날드 요한슨과 리처드 리키는 인간의 선조라 할 수 있는 새로 발굴된 두개골에 관하여 월요일 워싱턴에서 회의를 했다. 이러한 일련의 발굴로 인해서 진화론자들은 375만 년 전의 인간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해부학적으로 현대인과 더 흡사했다고 믿게 되었다.”

그들의 주장에 반대되는 3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수백만 년의 세월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 없는 추정에 근거한 연대측정방식에서 나온 계산이다. 왜냐하면 창조되었을 때 성숙한 채였다는 이유와 표면적인 연령만을 보고 추정하기 때문이다. 둘째, 만약 인간이 구조적으로나 해부학적으로 375만 년 전에 존재하였다면, 왜 인간은 1만년 전에 와서야 농업을 이용하고 집과 도시를 건설하는가? 낙뢰 등으로 수천 번의 자연적 화재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불의 사용을 배우기까지 수백만 년의 세월이 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셋째, 그들은 퇴적암을 잘못 분석했다. 퇴적암은 매우 진한 흙탕물이 급격히 가라앉아 된 것이다. 

리더스 다이제스트(1978년 2월)의 p.73을 보면 1800년에서 1829 년까지 라마르크의 옛 이론(기린의 목이 긴 이유는 높은 데에 있는 나뭇잎을 먹으려고 자꾸 목을 위로 뻗쳐 올렸기 때문이라는 옛 우화)을 다시 고쳐 말하고 있다. 즉,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원숭이 같은 인류의 허구적인 선조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라마피데쿠스의 후손들은 숲을 떠나 평야와 개간지를 찾아갔다. 그들은 평지에서도 멀리 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네 다리 보다는 두 다리로 서게 되었고, 그에 따라 그들은 양손을 다른 용도로 쓸 수 있었다.”

1978 년에도 진화론자들은 의심을 받았던 150년 전의 옛 이론에 매달리고 있었다. 진화론 우화를 만들기 위한 짓이 그럴 듯하다.

맨카토 자유언론(1984. 10. 19)에서는 리처드 리키가 제공한 케냐 나이로비의 이야기를 다시 실었다. 즉,

”과학자들은 160만 년 전에 죽은, 덩치 큰 12살 소년으로 보이는 화석을 보고 초기의 인간은 과학자들의 생각보다 훨씬 몸집이 크다고 말한다.... 그 소년은 아마도 180cm 이상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라고 리키는 말했다. 과학자들은 초기의 인간은 오늘날 우리보다 작다고 생각했다. 이 소년의 화석은 직립 원인이 현대인만큼 키가 크다는 이전의 추측을 확인해 준다.... 리키는 그 소년의 죽음에 대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늪 근처에 있었다. 그의 몸이 빨리 묻혀져서 상대적으로 본래의 몸을 그대로 보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틀림없이 그는 노아 시대에 홍수로 인해 진흙더미에 신속히 매장되었을 것이다. 또한 키 큰 소년은 대홍수 이전에 커다란 인간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메리 리키는 진화론의 시각에서 360만 년 전에 생존했던 현대인과 같은 인간의 발자국의 이야기를 실었다. 패밀리 위클리(1981. 9. 13)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즉,

”발자국의 흔적이 탄자니아의 올두바이 협곡으로부터 25마일 남부에 있는 화산근처 숲이 우거진 라에톨리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화산재가 비와 섞이고 태양에 의해 건조해졌을 때 발자국을 시멘트처럼 굳게 하는 화학성분이 생겼다. 비 온 후에 여러 동물들이 화산재에 발자국을 남기었다. 수많은 발자국들이 오늘날에도 뚜렷이 나타난다. 그러한 발자국들 중에는 세 원시인의 발자국이 있었다.... 그들은 오늘날의 우리들처럼 직립보행을 했다.”

미니애폴리스 트리뷴(1979년 3월 22)에 따르면

”발자국 전문가인 북 루이지애나 대학의 인류학자 루이스 로빈스 박사는 발자국의 의미에 대한 브리핑에서 모양과 기능적인 측면에서 현대인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했다.” 

왜 그들이 대홍수 이전에 생존했던 사람들이 아니어야 했는가? 메리 리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그들의 발자국은 현대인처럼 세련된 걸음을 걸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아마도 과학자들은 직립보행의 시초를 알기 위해서는 그 시대보다 수백만 년을 더 소급하여 살펴보아야 한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다.”

진화론자들이 자신들의 우화를 만들기 위해 수백만 년의 세월을 얼마나 쉽게 설정했는지를 보라! 나는 그들이 자기들의 가정과 가설을 세우기 위해 스스로 과학자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들은 어떠한 과학적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오늘날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것을 수백만 년의 세월이 걸려야 하는 지 알 수 없다.

1978년 3월 22일자 LA 타임스에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즉,

”그것은 마치 그녀가 왼쪽에서 무엇인가를 보고 들은 것 같았다. 아마도 위협이었던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몸을 돌렸을 것이고 그리고 계속 움직였던 것 같다고 메리 리키는 말했다.”

비록 우화의 드라마가 설정되었다 할지라도 실제 사실은 더 감상적이고 공포스러웠을 것이다. 대홍수 때에 발생했던 화산 폭발과 홍수가 그녀를 압도했기 때문에 그는 공포에 사로잡혀서 몸을 돌렸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진화론자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인류를 고도로 발달됐던 이집트인과 바빌론인과 그들의 선조들 그리고 리키와 그 일당들이 발굴하고 있는 홍수 때 익사해서 퇴적암으로 덮여있는 더 문명된 사람들에게로 추적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원숭이에게로 추적해 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찾는 원숭이들(Australopithecus)은 다른 동물들과 함께 홍수로 죽은 원숭이들이고, 그들이 찾는 인간들은 대홍수에 익사하여 묻힌 인간들이다.

진화론자들이 진화의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그렇게 악하고 광범위하게 설명하는지를 보려면 1978년 2월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끝부분에

'인류의 뿌리를 찾아서”에 나와 있는 진화론자들의 전형적인 실수들이 다음과 같이 밝혀지게 되었다.

1. 150만년 전에서 20만년 전 사이에 인간 혹은 호모 에렉투스는 ”불의 사용을 배웠다.”  - 인간은 확실히 번개로 인한 화재에서 즉시로 무언가를 배웠을 것이다.

2. '25만 년 전에서 10만 년 전 사이에 네안데르탈인들이 무리들로부터 진화했다. 그들의 두뇌는 우리의 두뇌만큼 충분히 컸다. 어떤 경우에는 더 크기까지 했다.”  - 소위 이 네안데르탈인들은 창6:4에 나오는 거인일 수 있다.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3. ”진화론적인 드라마에서 마지막 주인공은 우리 자신의 종, 즉 기원전 4만 년 전에 어디에선가 출현했던 호모 사피엔스였다.” - 여기서 다시 진화론자들은 이집트인들, 바빌로니아인들, 그리고 어디에선가 갑자기 튀어나온 다른 인종들과 리키의 집안사람들이 지금도 세계 전역에서 발굴하고 있는 진흙 속에 익사하여 매장된 사람들이 고도로 발달된 선조들임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4. ”다른 전문가들은....을 믿는다.” - 나는 사람들이 마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하여 모든 해답을 알고 있는 전문가처럼 언급되어질 때 몸서리가 처진다. 인간의 많은 분야에서 소위 전문가의 조언에 의해 오도된 수십억의 사람들이 있다. 주식의 조언자들, 그 밖의 많은 금융전문가들의 조언을 듣고 월 스트리트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십, 수백만 달러를 손해 보았던가? 시118:81)에 얼마나 진실하게 적혀있는가? ”인간 자신을 믿지 말고 주님을 믿는 것이 더 났다”고. 전문가의 충고에 귀를 기울일 때는 걸러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진화론 전문가들의 충고를 들을 때는 걸러내야 할 채가 필요할 정도이다. 의학 논문과 다른 과학 분야의 논문 사이에는 엄격한 차이의 세계가 있다. 그리고 경제 전문가와 진화론 전문가 사이에도 엄격한 차이가 있다. 소위 경제 전문가의 조언에 따른 손실은 금전만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소위 진화론 전문가의 조언에 따른 손실은 창조주와 구원자에게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영원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 전역에 걸쳐, 특히 대학들을 보면 1967년에 콜롬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하버드 대학의 스티븐 굴드와 같은 많은 현대 진화론자들이 있다. 칼 세이건과 아이삭 아시모프는 진화론으로 많은 소란을 일으켰다. 만약 현대의 다른 진화론자들을 언급하려면 이 책의 지면이 훨씬 많이 요구될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출처 - 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939

참고 :

유종호
2005-10-27

현대 진화론의 역사 - 1 

: 초기의 진화론과 찰스 다윈


1. 초기의 진화론

진화론 사상은 다음의 성경 말씀에서 보는바와 같이 사람의 아들들이 창조주를 거부하고 반역한 이래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6:1-5)

그 후 수세기에 걸쳐서 인간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진화론을 발전시킨 여러 가지 경우가 있어왔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아낙시만더(Anaximanders)는 BC 600 년경에 인간은 원래 물고기와 유사했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BC 400 년경 중국의 츄안체(Chuantze)는 생물 종들은 변이의 과정을 통해서 발전되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AD 1589년경에 프랑스인인 버나드 팔어시(Bernard Palissy)는 이교도들 사이에서 진화론 사상을 펼치다가 바스티유 감옥에서 죽었다.

비록 스웨덴의 카를로스 린네(Carolus Linnaeus: 1707-1778)는 진화론자가 아니고 진화론을 반대했지만, 그는 생물학자들이 종에 따라 동·식물을 분류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여 진화론자들에게 이론적 바탕을 제공해 주었다. 그는 동식물을 분류하여 라틴 명칭을 부여하는 시스템을 발전시켰다. 그러한 명칭은 종, 속,  과, 목, 강, 문 계 등으로 부여되었다.

대략 1750년 이후에 진화론을 끌어낸 근대의 인물은 프랑스 자연주의학자인 콩트 부퐁(1707-1788)과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이고 영국의 의사인 에라스무스 다윈이다. 그들은 1700년 후반부에 글을 써서 짐을 실을 때 무릎을 꿇음으로써 후천적으로 무릎이 두꺼워진 낙타의 경우처럼 후천적 특성을 다루었다. 부퐁은 그 당시에 계속해서 진화론을 연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두 사람을 추종한 인물은 프랑스의 생물학자인 동시에 식물학자인 장 라마르크(Jean Lamarck: 1744-1788)이다. 그는 동식물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양을 변형시키고 이것이 후대에도 이어진다고 추론했다. 그는 빗나간 진화론을 마음에 품었다. 예를 들어 기린의 목은 나무의 잎사귀를 먹으려고 위쪽으로 목을 늘리다가 길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기린의 목이 될 때까지 후천적으로 점점 길어졌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그 당시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과학자들도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독일의 생물학자인 아우구스트 바이스만(1834-1914)은 꼬리 없는 쥐를 만들기 위하여 수십 세대에 걸쳐 쥐의 꼬리를 자르고 교배를 시켜 봤다. 그는 라마르크의 이론에 근거가 없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찰스 다윈을 라마르크의 사상에 관하여 ”내가 내린 결론은 그의 결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던 것이다.

라마르크 직후, 영국의 지질학자인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 1797-1875)은 현대지질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3권으로 된 『지질학의 원리』라는 책을 썼다. 그 책에서 그는 기존의 지질학에 관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는 오늘날 여전히 발생하고 있는 지질작용들에 의해서 시대에 따라 천천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지구가 변해가고 있음을 나타내려고 노력했다. (천천히 그리고 점진적이라는 말은 진화론자들의 핵심 단어다). 이런 일로 라이엘은 찰스 다윈과 진화론에 또 하나의 빗나간 기반을 제공했다. 찰스 다윈은 ”나의 사상과 저술의 절반정도는 라이엘 경의 두뇌에서 비롯되었다”라고 고백하였다. 라이엘의 작업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서 진화가 가능함을 드러내기 위해 필요로 했던 엄청난 시간을 제공해 주었다. 그때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구상에서 발생해온 지질학에서의 변화란 갑작스럽고 전 지구적인 격변과 융기작용에 기인한다고 믿고 있었다.

알프레드 월리스(Alfred Wallace, 1823-1913)는 찰스 다윈보다 14살 정도 젊었지만, 월리스는 다윈이 진화론을 설명함에 있어 취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발전시켰다.


2. 찰스 다윈

어떤 사람보다도 진화론을 신봉했던 영국의 자연주의 학자인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은 우리가 주목해 볼 만한 인물이다. 진화론이 다윈의 시대에 그토록 쉽게 파고든 이유는 당시의 영국에서 과학이 유행했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산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진정한 과학으로부터의 도움을 점점 더 많이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50년대는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격변의 시기였다. 그 시대는 칼 마르크스의 시대였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유럽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자유주의와 합리주의가 많은 기독교의 여러 교파에 파고들던 시기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움직임은 진화론이 번성하기에 알맞은 토양이었다.

합리주의와 유물론, 그리고 자연과 과학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일체를 거부하는 시대적 풍조로 인해서, 당시의 많은 지성인들은 성경과 초자연적인 것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고대의 이교도 철학자들처럼 그들은 우주의 기원에 대하여 이성에 호소하는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당시의 철학적이고 정신적인 분위기는 다윈과 같은 진화론자들이 귀를 기울이고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1859년에 다윈은 『종의 기원』을 발표했다. 그것을 계기로 그는 오늘날 다윈론으로 알려진 진화론의 지도자가 되었다. 1832년에 다윈은 세계여행 중에 종의 기원에 대한 해답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남미 해안 밖 갈라파고스군도 무인도에 갔을 때 흙과 기후가 비슷해도 섬마다 독특한 동물과 식물이 있음을 알았다. 이것을 보고 그가 내린 2가지 결론은 1) 동물이나 식물에 있어서 정확히 동일할 수 없을 만큼 변이가 존재한다는 점 2) 생물체는 지구의 공간과 식량이 부족할 정도로 번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는 다른 종뿐만 아니라 같은 종끼리도 먹이를 얻기 위해 경쟁하는 것을 보았다. 그가 내린 결론은 우수한 종자가 약한 종자를 밀어내는 가운데 자연에는 지속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투쟁으로 인해 약한 동·식물은 결국 사라지고 우월한 존재가 살아남게 된다. 이러한 일이 계속해서 벌어지면서 사소한 차이가 점차적으로 거대한 차이로 변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점차 자연선택에 의해 지구상의 존재는 고차원적인 단계로 진화하고 단순한 존재(단세포)에서 복잡한 존재로 진화한다. 결국 상위의 동물은 가장 하위의 동물로부터 진화했고 모든 인간이 그런 동물에서 진화했다는 것이다. 적자생존의 개념은 자연선택의 개념에서 발전되었다.

그 동안 다윈의 생각이 전 세계에 미친 영향력은 과소평가될 수 없다. 그의 진화론은 오늘날 모든 분야로 확대되었다. 천문학자들은 빅뱅으로 시작한 우주의 기원과 지구의 진화를 설명하면서 우주의 진화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역사가들과 인류학자들은 선사시대의 인간에 대하여 사색하기 시작했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을 고도로 발전된 동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물리적 환경을 변화시켜서 인간의 도덕적 질병을 치료하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신학자들조차도 성경의 가르침과 소위 과학적 진화론을 합치할 수 없어 그것을 신뢰함으로써 진화론에 굴복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성경을 단지 고도로 발달된 종교적 이상을 표현한 책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가장 보수적인 교단에서 훈련받은 신학박사들이 성경을 신화에 불과하다느니 인간 타락의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위스콘신 대학의 오토 박사는 정확히 40년 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만약 누구든지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과 하나님 안에서 진화론과 믿음을 조화시키는 것은 투명한 논리적 사고에 어떤 결함을 보인다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


3. 다윈은 어디에서 잘못되었는가?

다윈은 그의 책 『종의 기원』의 제목에도 불구하고 결코 종의 기원을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종 안에 변이를 말했을 뿐이다. 그것은 창조를 신뢰하는 사람들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선택은 적자생존을 설명할 수 있지만 적자의 출현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다윈은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 때 지구상에는 관찰할 수 있는 2-3백만의 생물의 종들이 있다. 그러나 노련한 관찰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종의 변화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오늘날 흔히들 말한다.”

진화란 새롭고 다른 종류의 생물뿐만 아니라, 눈, 뇌, 귀, 심장, 신경계, 폐, 위, 그리고 많은 다른 기관들을 생산함을 의미한다. 다윈이나 어떤 다른 진화론자들도 이러한 신체기관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으며, 이 모든 기관들이 즉시로 기능을 하는 신체로 갑작스럽게 발달할 수 있었는지 지금까지 설명할 수 없다.

다윈의 진화론은 과학적 사실이 아닌 가정, 추측, 상상 및 사색에 근거한 것이다. 다윈의 책 Ⅳ장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사용하였다. 즉,  ”만약....가령 가정한다면....인것 같다. 그러므로 아마도....우리가 가정해 본다면....만약 다음과 같이 가정된다면....였을지도 모른다....아마도....가령....가정할 수 있다....그럴 수도 있다... ” 등등

이러한 표현은 과학자가 표현하는 방식이 아니다. 과학자는 입증되고 실험된 사실을 근거로 일한다.


4. 과학자들이 거부하는 다윈론

1890년경에 조지 미바트(George Mivart)는 다윈의 이론을 세밀히 검토한 『종의 내력』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다. 그는 다윈의 이론을 모든 부분에서 입증된 바 없으며, 자연의 사실과는 위배되는 것으로 치부해버렸다. 그는 다윈의 가설을 ‘유치한 가설(puerile hypothesis)’이라 불렀다.

디오 그래브너(Theo Graebner) 박사는 자신의 책 『하나님과 우주-무신론의 비판적 분석, 1932』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880년대에는 다윈의 영향력은 절정에 이르렀고, 기술적 연구에 대한 철저한 통제를 실시했다. 90년대에 비로소 의심과 반대의 목소리가 소심한 표현으로 들려오더니 이러한 반응은 점차 부풀어 올라 다윈 이론의 타도를 겨냥하면서 거대한 합창으로 자리 잡았다. 20세기 첫 10년 동안은 분명히 다윈론의 시대라고 표기될 정도가 되었다.”

프랑스의 『과학 대백과사전』(Dictionaire Encylopedique des sciences)을 보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즉,

”다윈론은 증거도 없이 단지 개연성에 불과한 것을 시적으로 모아놓은 허구이다.”

다윈과 연관지어 우리는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 1825-1895)를 언급해야만 한다. 그는 다윈의 책이 나오기 전부터 이미 진화론자였다. 그러나 다윈의 책으로 인해서 그는 자신의 신념을 뒷받침 해줄 근거를 찾게 되었다. 그는 열성적인 다윈 신봉자가 되었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을 확산시키기 위해서 전심전력을 다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는 "다윈의 불독(Darwin's bulldog)”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그는 또한 창조에 관한 성경의 설명, 기독교,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고 그밖의 성경의 다른 내용들을 거부하고 반대론을 강의했다.

다윈과 헉슬리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동안에 오스트리아의 수도승이며 식물학자인 그레고르 멘델(1822-1884)은 다윈론에 관하여 심각한 의문을 일으키는 과학적 증거를 제시했다. 멘델은 수차례의 과학적 실험을 통해서 창조자가 식물과 동물의 종에 설정해준 한계를 벗어나서는 변이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했다.

”개인이 받은 유전인자를 제외하고는 어떤 다른 인자도 자손에게 전달해 줄 수 없다는 것은 지금 생물학에서는 단순한 법칙에 불과하다. 생명체는 자신이 물려받지 않은 어떤 유전자도 후손에게 물려 줄 수 없다” (『유전과 환경』 p.99)

이러한 사실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진화한다는 다윈의 이론에 자물쇠를 채웠다. 그러나 멘델이 이룩한 업적의 중요성은 다윈의 이론이 발표된 지 50년 후에야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 시대에 진화의 원인에 관하여 깊이 사색했던 또 다른 인물은 네덜란드 식물학자인 휴고 드 브리스(1848-1935)이다. 그는 달맞이꽃을 가지고 실험했다. 실험 도중에 그는 새로운 종의 식물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새로운 종은 갑자기 자발적으로 단계를 건너뛰며 발생했고 후손을 건너뛰었다”고 말했다. 그의 이론은 돌연변이 이론(mutation theory)으로 불렸다. 이러한 이론은 짧은 기간 동안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큰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가정된 새 종이 동일한 종 안에 다른 변종일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그의 이론은 허망한 종국을 맞이하였다. 하버드 대학의 제프리 교수는 「과학」(Science, 1914. 4. 3) 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드 브리스의 돌연변이 이론은 이제 폐기된 가설들이 머무는 망각의 구렁으로 추방되어야 한다.”  



출처 - 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937

참고 : 6553|6486|6550|6149|6132|5081|5130|4639|5740|5683|5420|5994|6449|4821|6263|6018|6468|6148|6474|5510|5947|5954|5591|6211|5589|5602|5966|4837|6090|485|3890|390|2349|3782|6438|4510|5474|6495|5458|6243|5863|2698|6399|5460|6489|5135|5000|4828|6118|6394|6168|6138|5996|774|5497|5827|5158|5962|6358|6258|6119|4066|5544|5443|6556|6501|6096|5459|5274|5450|5909|6461|6436|5586|4542|5041|3391|6393|6476|6292|5796|5768|6271|5462|6146|6439|3591|6125|3426|6285|6152|6153|6022

Russell M. Grigg
2005-10-01

다윈은 자기의 주장을 철회하였는가?

(Did Darwin recant?)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은 1882년 4월 19일에 73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가 불신자로 죽었다는 것을 슬퍼했던 일부 사람들에 의해서, 다윈이 죽음 직전에 침상에서 기독교로 전향(death-bed conversion)했고 진화론을 포기하였다는 여러 뒷이야기들이 몇 년 동안 떠돌아 다녔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그가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1882년 5월경부터 설교들에 포함되기 시작하였다.[1] 이러한 이야기들은 1881년 가을에 다운 하우스(Down House)[2]를 방문하여 병상의 다윈을 만났었다고 주장하는 호프 부인(Lady Hope)의 말에 의해서 기인되었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다윈은 히브리서를 읽고 있는 중이었고, 그녀가 창세기의 창조에 대해서 언급했을 때 그는 괴로워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윈은 그녀에게 다음 날 다시 와줄 수 있느냐고 물었고, 여름 집의 정원에서 열리는 하인, 소작인, 이웃들 30여명이 모이는 모임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주장했다. 이 이야기는 처음 미국 침례교도 저널인 Watchman Examiner (1915년) [3]에 521 개의 단어로 된 기사로서 인쇄되어 나타났고, 그때 이후로 많은 책들, 잡지들, 소책자들에서 재인쇄 되었다.

이 이야기에 있어서 주요한 문제점은 다윈의 가족들에 의해서 그러한 사실들이 모두 부인되었다는 것이다. 프란시스 다윈(Francis Darwin)은 1887년 2월 8일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에게 편지를 썼는데, 찰스 다윈이 죽기 직전 침상에서 진화론을 철회했다는 보고는 "잘못되었으며 어떠한 근거도 없다”[4] 라고 하였다. 그리고 1917년에도 프란시스는 "아버지가 그의 회의론적(agnostic) 관점을 바꾸었다고 믿을만한 어떠한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5] 라고 단언했다.

찰스 다윈의 딸 헨리에타(Henrietta, Litchfield)는 1922년 2월 23일 영국의 복음 주간지인 The Christian 의 p.12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아버지의 임종 시에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호프 부인은 아버지의 마지막 또는 어떠한 투병 기간 동안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심지어 그녀를 보지도 못했으며, 그래서 어떤 경우에서든지 아버지의 사상과 믿음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지 못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또는 그 이전에도 그의 과학적 견해를 조금이라도 결코 철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한 모든 이야기들은 어떠한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6]

일부 사람들은 심지어 어떠한 호프 부인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만 하는가?

다윈의 전기 작가이며, 영국 오픈 대학(The Open University)의 과학사 강사인 제임스 무어(James Moore) 박사는 20여년 동안 3개 대륙에 걸쳐서 자료들을 조사하였다. 그는 그가 ‘다윈의 전설(Darwin legend)’[7] 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조사하여 218 페이지의 책을 발간하였다.

그는 호프 부인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1842년 Elizabeth Reid Cotton에서 태어났고, 1877년에 은퇴한 홀아비인 제임스 호프(James Hope) 제독과 결혼했다. 그녀는 복음 전도(tent evangelism) 팀에 몰두했으며, 1880년 대에 켄트(Kent, 다윈의 집이 있던 곳)에서 나이든 사람들과 아픈 사람들을 방문하곤 했었다. 그녀는 1922년에 호주 시드니에서 암으로 죽었고, 그곳에서 그녀의 무덤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8] 무어는 프란시스와 헨리에타가 거의 확실히 없었던 기간인 1881년 9월 28일(수요일)과 10월 2일(일요일) 사이에 아마도 호프 부인이 찰스 다윈을 방문했을 것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그러나 그때 다윈의 부인 엠마(Emma)는 아마도 있었다는 것이다.[9] 그는 호프 부인을 묘사하면서 감동적인 장면과 대화를 유도할 수 있는, 그리고 감상적인 영성(sentimental spirituality)을 가지고 그것들을 과장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숙련된 이야기꾼(a skilled raconteur)으로서 기술하고 있다. 그는 그녀의 출판된 이야기가 시기와 장소에 관해서 일부 신뢰할만한 세부사항들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실제와 틀린 사실들도 있었음을 또한 지적했다. 즉, 찰스 다윈은 죽기 전에 6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있지 않았으며, 그의 여름 집은 30여명의 사람들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작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포기하거나,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단지 그가 젊었을 때 발표했던 이론들의 운명에 대해서 관심을 표현하였고, 종교적 모임에 소수의 사람들이 참석하는 것을 찬성했다는 것이다. 주장되는 다윈의 철회/전향(recantation/conversion)은 다른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읽거나, 스스로 만들어서 가지게 된 장식(embellishments)이라는 것이다. 무어는 그러한 행위를 "거룩한 위조(holy fabrication)" 라고 부르고 있다!

다윈의 아내였던 엠마는 결혼 생활 대부분의 기간 동안 다윈의 견해가 가지는 반종교적인 본질(irreligious nature) 때문에 굉장히 고통을 받았었다는 것을 주목해야만 한다. 만약에 그러한 일이 진정으로 발생했다면, 그녀는 다윈의 전향에 대한 이야기들을 확증하기 위한 강한 동기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윈은 자기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오늘날 호프 부인의 이야기가 간혹 소책자에 출판되어 선의의 사람들에 의해서 배포되고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References

1. James Moore, The Darwin Legend, Baker Books, Grand Rapids, Michigan, 1994, pp. 113-14.
2. Down House retained the spelling of the old name of Darwin's village, which was changed to Downe in the mid-nineteenth century to avoid confusion with County Down in Northern Ireland. Source: Ref. 1, p. 176.
3. Watchman Examiner, Boston, 19 August 1915, p. 1071. Source: Ref. 1 , pp. 92-93 and 190.
4. Ref. 1, pp. 117, 144.
5. ibid, p. 145.
6. ibid, p. 146.
7. ibid.
8. After the death of Admiral Hope in 1881, Lady Hope married T.A. Denny, a 'pork philanthropist', in 1893, but preferred to retain her former name and title (Ref. 1, pp. 85; 89-90).
9. Ref. 1, p. 167.
10. ibid, p. 94.

 

*관련기사 :  '성경·예수 안 믿어' 다윈 편지 첫 공개 (2015. 9. 12. 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9/12/2015091200286.html

다윈의 편지 공개... '성서도 예수도 믿지 않는다'(2015. 9. 12.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43522

'성경·예수 안 믿는다' 다윈 편지 경매에 나와 (2015. 9. 11. 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9/11/0200000000AKR20150911071200091.HTML


* 참조 : Charles Darwin Questions and Answers
http://www.answersingenesis.org/home/area/faq/darwin.asp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18/i1/darwin_recant.asp

출처 - Creation 18(1):36–37, December 1995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888

참고 :


Headlines
2005-08-31

런던동물원은 사람을 전시하였다. 

(Do You Belong in the Zoo?)


        런던동물원에서 관람객들은 한쪽 우리에 갇혀서 전시되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영장류 중의 하나를 전시하기 위해서, 몸의 중요 부위만을 살짝 가린 8명의 백인들이 우리 안에 전시되고 있다고 AP 통신은 보도했다 (MSNBCYahoo을 보라). 수영복 위에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입은 그들은 서로 놀고, 긁어주며, 단장시켜주고, 관람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준다. 이러한 전시 의도는 사람은 특별하지 않으며, 단지 동물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영장류 우리에 있는 원숭이나 침팬지와 같지 않게 우리 안에 있던 사람들은 밤에는 집으로 퇴근한다.  
   
이러한 이목을 끄는 행사는 동물원을 결코 방문하지 않았던 관람객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것이다. 일부 관람객들은 사람들이 옷을 입고 있는 것에 대해 실망한다. 전시가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모르는 어린이들은 머리를 갸우뚱하며 질문하곤 한다. '왜 사람들이 저기에 있어요?” 진화론자들의 개조된 성경이야기에는 침팬지 중의 하나가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한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적어도 이번에는 백인을 전시하였다. (흑인 오타 벵가를 동물원에 전시했던 사건에 대한  Carl Wieland Jerry Bergman의 글들을 보라). 이 이야기에 대해 독자들의 논평을 부탁드린다. 이곳으로 소감을 보내 달라 (Write Here)

 


*참조 :  1. ‘인간 동물원’ 등장 … 런던동물원, 남.여 8명 4일간 ‘전시’
http://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05/08/28/20050828000016.html

2. 런던 동물원에 '사람'도 전시
http://www.chosun.com/international/news/200508/200508270052.html

3. 런던 동물원에 '사람'도 전시
http://www.donga.com/fbin/output?f=ni_&n=200508270174

4. 오타 벵가의 비극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644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creationsafaris.com/crev200508.htm 

출처 - CEH, 2005. 8. 29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849

참고 :

한국창조과학회
2005-07-18

제임스 허튼의 전기 

: 현대지질학의 주류인 동일과정설의 창시자 

(Biography of James Hutton)


제임스 허튼 (James Hutton, 1726-1797).

스코틀랜드의 지질학자였던 제임스 허튼은 1726년 6월 3일 에든버러(Edinburgh)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 도시인 에든버러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면서, 그는 과학적 질문들에 대해 열정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었던 학생이었다. 그는 법률가(lawyer)로 도제(apprentice, 견습생)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고용주는 그에게 취미가 맞는 직업을 선택할 것을 충고하였다. 젊은 도제는 그가 좋아했던 화학 과목과 가장 가까운 의학(medicine)을 선택했다. 그는 에든버러에서 3년 동안 공부를 하고, 파리에서 의학 교육을 마쳤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1749년(23세)에 레이덴(Leiden)에서 의사(doctor of medicine) 자격을 취득했다. 그러나 그의 앞에 진로가 잘 보이지 않자, 그는 의사로서의 직업을 포기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베르윅셔(Berwickshire)에 있는 약간의 유산을 물려받았고, 농업(agriculture)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농사에 필요한 경작 방법을 배우기 위해 노폭(Norfolk)에 갔고, 계속하여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북부를 여행했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지구 표면에 관한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고, 훗날 그의 정렬을 바쳤던 문제들에 대해서 점차적으로 그의 생각 깊은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1754년(28세) 여름, 그는 베르윅셔에 자신의 농장을 세우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14 년 동안을 살았고, 농업의 가장 개선된 형태들을 소개했다. 농장이 체계적으로 잘 돌아가게 되면서, 농장의 관리는 더 쉬워졌고, 흥미를 점점 잃어갔으며, 농장은 스스로 돌아가도록 하게 하였다. 그는 에든버러에 돌아와 삶의 휴식을 취하게 된다. 이것은 1768년(42세) 쯤에 일어난 일이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고, 이 기간부터 그가 죽은 1797년(71세)까지 그의 세 여동생들과 살았다. 그는 취향이 같은 문학적 과학적 친구들과 어울렸고, 연구를 가까이 하게 된다.


그 당시에 지질학(geology)이라는 적절한 의미를 갖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광물학(mineralogy)은 상당한 진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허튼은 그 당시의 광물학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보다 더 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여러 가지 광물과 암석들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지구의 역사를 어느 정도 명백히 이해해 보고 싶어 했다. 수 년동안 그는 그 주제를 연구하기를 계속했다. 마침내 1785년(59세) 봄에, 그의 견해를 당시 설립되지 얼마 안 된 에든버러 왕립협회에 ”지구의 이론, 또는 지구 육지의 구성, 소멸, 회복에 있어서 관측되는 법칙들에 대한 조사 (Theory of the Earth, or an Investigation of the Laws Observable in the Composition, Dissolution and Restoration of Land upon the Globe.)” 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주목할 만한 논문에서, 지질학은 우주창조설(cosmogony)이 아니라, 지구 물질들에 대한 연구에 한정되어야만 하다고 상술되었다. 지구 도처에 다음과 같은 증거들이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지구 표면의 현재 암석들은 더 오래된 암석의 부스러기들로부터 많은 부분들이 형성되었다. 바다 아래에 쌓여져 내려오던 이들 물질들은 엄청난 압력 하에서 단단해지고, 연속적으로 파열되고, 지하 열(subterranean heat)의 팽창적인 힘에 의해서 융기되었다. 이 격동 동안에 광맥들과 용융된 암석 덩어리들은 지층 단층면의 갈라진 틈으로 관입되었다. 융기된 땅들의 모든 부분들은 대기에 노출되자마자 분해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분해는 육지 전체가 닳아 없어져 해양저에 퇴적될 때까지 계속 진행되었으며, 미래의 또 다른 융기가 단단해진 퇴적물들을 새로운 땅으로 다시 또 들어 올릴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허튼의 이러한 광대하고 대담한 개념의 일부는 이탈리아 지질학자들에 의해서 제시되었던 것이었지만, 허튼은 최초로 그들의 상호 관계를 신뢰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그들을 관측에 기초한 반짝이는 조리있는 이론으로 연합해 내었다.


허튼이 직접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단지 땅(earth)만이 아니었다. 그는 대기의 변화에 대해서 오랜 기간 연구를 하였다. 그의 책 ‘지구의 이론 (Theory of the Earth)’에 나타났던 같은 부피의 량이 또한 ‘비의 이론 (Theory of Rain)’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것은 1784년 에든버러에 있는 왕립협회에서 읽혀졌다. 그는 공기가 용액으로 보유할 수 있는 습기의 양은 온도가 증가함으로서 증가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다른 온도를 가진 두 덩어리의 공기가 혼합되었을 때 습기를 가진 부분은 응축되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지구의 다른 지역에서의 강우(rainfall)와 기후(climate)에 관련된 이용할 수 있는 자료들을 조사했다. 그리고 강우는 모든 곳에서 한편으로는 습도에 의해서 조절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높은 대기 중에서 다른 공기 흐름들의 혼합을 증진시키는 원인이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열정은 그가 30년 동안 에든버러에 거주하면서 발표한 다양한 연구들로부터 알 수 있다. 1792 년에, 그는 ‘자연 철학에 있어서 다른 주제들에 대한 논문(Dissertations on different Subjects in Natural Philosophy)’ 이라는 제목의 4절판으로 된 책을 출판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물질, 유동성(fluidity), 응집(cohesion), 빛, 열, 전기 등의 본질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이 주제들의 일부는 에든버러 왕립협회에서 읽혀진 논문들에서 그에 의해서 더 자세히 설명되었다. 그는 물리학(physics)의 영역 내에서만 자신을 제한하지 않았고, ‘지식의 원리 및 이성의 과정들에 대한 조사 - 감각으로부터 과학과 철학까지 (An Investigation of the Principles of Knowledge, and of the Progress of Reason - from Sense to Science and Philosophy)’ 라는 제목의 세 권의 4절판 책을 출판하면서 대담하게 형이상학(metaphysics)의 영역까지 나아갔다.


그 책에서, 그는 우리에 의해서 인지되고 있는 외부 세계는, 외부로부터 자극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우리 자신의 마음의 창조물이라는 개념을 전개하였다. 즉, 바깥 세계에 대한 우리의 그림과 실제성(reality) 사이에는 유사점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성과 일관성을 가지는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인상(impressions)들은  마치 그들이 정확히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물체들처럼 우리들에게 많은 실제성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도덕적 행위는 마치 우리의 생각이 완벽하게 그것들을 만드는 원인들과 부합되는 것처럼 똑같이 남아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의 말년은 그의 ‘지구의 이론’의 확장과 재출판에 힘을 쏟으며 보냈다. 그것에 대한 2 권의 책이 1795년(69세)에 출판되었다.


그 작업을 완료하는 데에 필요했던 세 번째 책은 그의 손으로 쓴 필사본으로 남겨졌고, 그의 전기 작가인 플레이페어(John Playfair)에게 넘겨졌다. 이 책의 한 부분은 레오나드 호너(Leonard Horner)에 의해서 런던 지질학회(Geological Society of London)로 보내졌고, 1899년에 게이키 경(Sir A. Geikie)의 편집 하에 학회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필사본의 나머지 원고들은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튼은 경작(husbandry)에 관한 그가 기록했던 많은 글들을 수집하는 분류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는 이것을 ‘농업의 요소들(Elements of Agriculture)’ 이라는 제목 하에 출판하려고 하였다. 그가 거의 이 작업을 마무리할 무렵인 1797년 3월 26일, 치유할 수 없는 질병으로 그의 활동적인 경력은 끝을 맺게 되었다.


그의 책 ‘지구의 이론(Theory of the Earth)’에 의해서, 허튼은 지질학이 발전을 지속하는 한 숭배를 받으며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무겁고 애매한 허튼의 글 형태 때문에, 그의 책들은 그의 생애 동안에는 그가 노력을 기울인 만큼 관심을 끌지 못했다. 허튼에게 다행스러운 것은 그의 과학 친구들 가운데 존 플레이페어(John Playfair)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에든버러 대학의 수학(mathematics) 교수였으며, 허튼의 교리를 전파하고자 하는 열정이 넘쳤던 사람으로 허튼의 주장들이 빛을 발하게 하였다. 허튼이 죽은 후 5년 후에, 그는 ‘허튼의 지구의 이론에 대한 해설(Illustrations of the Huttonian Theory of the Earth)’ 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플레이페어는 허튼의 이론을 훌륭하게 요약하였고, 많은 부가적인 해설과 논의들을 첨부하였다. 이 작업은 지질학 저술들에서 공헌도가 높은 고전 중에 하나로서 간주된다. 그 책은 영국 지질학의 발달에 있어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1805년에, 플레이페어에 의해서 쓰여진 허튼의 전기는 ‘에든버러 왕립협회 보고서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 of Edinburgh)’ (A. Ge.) 제 5권에 실리게 되었다.     

 


*참조 : The man who made the wedge: James Hutton and the overthrow of biblical authority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8_2/j18_2_55-57.pdf

St Hutton’s Hagiography
http://creation.com/st-huttons-hagiography

Darwin, Lyell and Origin of Species
http://creation.com/darwin-and-lyell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gennet.org/facts/hutton.html 

출처 - Encyclopaedia Britannica, 11th Edition, 1910-1911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752

참고 : 2662|2663|2383|2386|2390|1810|545|2253|2258|2107|1071|1462|1466|1192|2050|1464|1493

Headlines
2005-06-23

역사학자가 근본주의 진화론의 몰락을 예언하다. 

(Historian Predicts Downfall of Darwinian Fundamentalism)


      2005. 6. 20일자 Forbes 지에서, 영국의 역사학자인 폴 존슨(Paul Johnson)은 근본주의적 진화론자들을 공격하면서, 그들의 서거(demise)를 예측하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의 거대한 근본주의자들 그룹 중에서, 다윈주의 신봉자들은 나에게는 가장 못마땅한(most objectionable) 그룹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기독교나 이슬람교의 근본주의자들처럼 논쟁에 대해 폐쇄적이고, 불쾌한 발언들을 쏟아낸다. 그러나 이들 두 그룹과는 다르게 다윈주의자들은 지적인 존경(intellectual respectability)을 받으며 그것을 즐기고 있다.

다윈주의자들과 그들의 동맹자들은 서양의 과학 체제를 지배하고 있다. 그들은 대학 캠퍼스를 지배하고 있다. 무신론(atheism)이라는 그들의 호전적인 상표는 대부분 대학의 교수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철학적 무신론자들과 자연적인 동맹을 맺게 하였다. 그들은 선도적인 과학 잡지들을 지배하였고, 그들에 대한 비평과 반대 의견들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텔레비전에서 가장 좋은 시간대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진화론이라는 다윈주의자들의 상표는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그 약점들이 계속 드러남으로서 점점 상처투성이가 되어가고 있다. 어느 날 (아마도 곧) 진화론은 처참하게 붕괴될 것이다."

전체 기사는 Discovery Institute에서 볼 수 있다.



다윈주의자들에 반대하는 그의 가치있는 열변에도 불구하고, 존슨은 비판력 없이 빅뱅 이론과 장구한 우주 연대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는 뉴튼을 자연력(impersonal Force)을 가르쳤던 사람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는 선행적(front-loading, 생명체에 필요한 모든 정보가 어느 정도 빅뱅 시에 이미 존재했고 적당한 시기에 기계적으로 스스로 작동되었다는) 설계철학(design philosophy)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사람이 만들어지는 데에 선행적 설계를 가정한 후에, 언어의 기원에 대해서는 신의 간섭을 주장하였다. 이 이상한 생각은 진화론의 몰락에 대한 그의 흥미로운 예언을 반감시키고 있다.


존슨도 또한 상투적인 황색 언론(yellow-journalism) 이외의 근본주의에 대해서는 거의 알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근본주의를 폐쇄적이고 불쾌한 발언들을 쏟아내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것은 그레셤 마헨(J. Gresham Machen)과 같은 기독교 학자가 사용하는 단어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근본주의란 기독교 신앙의 훼손 없이 타협될 수 없는 성서적 교리를 지켜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존슨이 오늘날 많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교회 안에 들어와 본다면, 그는 폐쇄된 생각을 가지지 않은, 불쾌한 말을 쏟아내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게 것이다. 그는 AK47 총들로 무장하고, 깃발을 불태우며, 일전불사를 외치는 무슬림 전사들과 같은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반대의견에 대해서 철저한 사전검열을 가하고 있는 진화론자들과 같은 모습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겸손하고, 기쁨에 넘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낮선 사람을 환영하면서 다음과 같이 물어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당신을 위해 어떻게 기도하면 될까요?”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creationsafaris.com/crev200506.htm 

출처 - CEH, 2005. 6. 8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706

참고 : 6553|6486|6550|6149|6132|5081|5130|4639|5740|5683|5420|5994|6449|4821|6263|6018|6468|6148|6474|5510|5947|5954|5591|6211|5589|5602|5966|4837|6090|485|3890|390|2349|3782|6438|4510|5474|6495|5458|6243|5863|2698|6399|5460|6489|5135|5000|4828|6118|6394|6168|6138|5996|774|5497|5827|5158|5962|6358|6258|6119|4066|5544|5443|6556|6501|6096|5459|5274|5450|5909|6461|6436|5586|4542|5041|3391|6393|6476|6292|5796|5768|6271|5462|6146|6439|3591|6125|3426|6285|6152|6153|6022

김정훈
2005-05-27

해리포터와 마술, 그리고 창조과학


      <해리포터> 보셨습니까?  동명의 베스트 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해리포터>가 2001년 연말에 처음 개봉할 당시 많은 사람들 사이에 큰 화제가 되어 한 두 번쯤은 서로 이런 인사를 주고받곤 했던 적이 있었다. 특히 초등학교나 중학교 학령기의 자녀를 가진 분들이라면 자녀들의 등쌀에 못 이겨 같이 영화를 관람하셨을 분들도 많을 것 같다. 최근에는 그 2편까지 개봉되어 여전히 세계 극장가의 box office를 석권하며 그 위력을 과시하고 있는데, 이미 여러 형태의 대중매체를 통해서 <해리포터>의 내용이나 아이들에 대한 유해성 논란이 많이 보도되어 있으므로, 영화가 좋은지 나쁜지는 각자 독자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고, 대신 필자는 이 자리에서 작품 <해리포터>의 중요한 배경과 소재가 되고 있는 ‘마술’이란 것에 대해서, 특별히 창조과학을 연구하는 한 과학자로서의 견해를 피력해 보고자 한다.


우선, 마술은 과연 사실일까? 각종 오락 시설을 잘 갖춘 웬만한 테마 파크에 가면, 으레껏 마술쇼를 위한 상설 공연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동네나 학교의 크고 작은 축제가 있을 때에도 마술쇼는 인기 프로그램의 하나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마술쇼는 비록 그 재빠른 마술사의 손놀림에 박수를 보내며 즐거워한다고 할지라도, 모자 속에서 사과를 토끼로 바꾸어 꺼내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단지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어린 아이들도 잘 알고 있다. 물론 세계적인 일류 마술사 David Copperfield의 마술쇼쯤 되면, 그 trick이 매우 고단수여서 현실과 환영을 분별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수준이 높아지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단지 고도로 훈련된 마술사의 눈속임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해리포터>에서 보여 주는 마술의 세계는 눈속임의 경지를 넘어서 어떤 다른 차원의 세계로 사람들을 이끈다. 가로막힌 벽 속으로 사람의 몸이 그대로 통과하는 것이나, 빗자루를 타고 공중을 날라 다니는 것, 물체를 물리적인 접촉 없이도 움직이는 것, 그리고 투명 담요로 덮어 몸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 등은 모두가 자연과학의 법칙을 벗어나는 일 들인데, 이런 일들이 마술이라는 이름으로 다반사로 행해짐으로, 일시적인 눈가림과는 차원이 다른 어떤 세계의 존재를 은연중에 암시 받게 된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소설이나 영화적 재미를 위한 가공의 것들이긴 하지만, 마술사 양성을 위한 학교가 등장하고 연구와 훈련을 통해서 마술의 경지를 넓혀간다는 이야기의 기본 전개는 이런 차원의 마술도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기에 충분하게 만들고 있다. 이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해리포터>식의 마술도 어느 정도는 가능할 수 있다는 쪽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런 일들은 자연 법칙으로는 불가능하며, 동네 마술쇼에서와 같이 무대 뒤에서 보이지 않게 돕는 제 3자가 있거나, 혹은 감추어진 상자나 물체가 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첫째, 고도로 발달된 과학 지식을 갖추어 자연 법칙을 위배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자연을 다스려 마술처럼 보이는 현상을 창출해 내는 것이요, 둘째는 어떤 영적 존재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눈부시게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술이 횡행하던 고대나 혹은 중세시대의 사람들의 눈에는 당연히 마술로 보일 것이 틀림없다. 가령, 현대인들이 remote control 이나 자동음성인식 장치를 통해 직접적인 신체의 접촉이 없이도 전자제품을 작동시키는 것이나, 개인용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 오르는 것들을 과학을 모르는 옛날 사람들이 본다면, 무어라고 하겠는가? 벽 속으로 사람의 몸이 사라지는 것도 영화에 나오는 물체 전송장치 같은 것을 이용하면 될 일이겠지만, 이것은 아직까지는 언제 실현될지 모르는 과학적 허구이다. 과학의 역사는 학자들의 보는 견해에 따라 그 시작점을 정하는데 차이가 있지만, 소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으로서의 과학이 시작한 시점을 갈릴레오와 뉴튼 등에 의해 주도되었던 ‘과학혁명’이 일어났던 17세기로 보는데 대부분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듯이 ‘과학혁명’ 이전에 이미 혁명을 위한 지성적 그리고 기술적 토양이 준비되어 가고 있었음을 지적하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Paolo Rossi 같은 과학 역사학자는 중세에 횡행했던 연금술 같은 작업들이 어떻게 과학적 지식과 기술의 축적으로 전환되어 갔었는지를 그의 저서 <마술에서 과학으로>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과학이 발달하기 오래 전에 소위 마술사들에 의해 행해지던 많은 신비로운 행위들이 이제는 과학적 지식에 의하여 더 이상 마술이 아니거나 혹은 그 신비로움을 상실해 버린 것들이 많다. 


당시의 그리고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일부 마술사들은 체계적인 과학 지식도 없이 비록 작게나마 어떻게 자연을 다스리는 효과를 낼 수 있었을까? 물론, 그들에게 체계적인 과학지식이 없음으로 인해 오늘날 우리가 자연의 법칙을 이용하여 얻어내는 유익과는 수준의 격차가 현격히 크지만은, 그들 나름대로의 방법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물론 일부는 타고난 지혜로 말미암아 체계적인 이론은 갖고 있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자연의 이치를 이용할 수 있었을 수도 있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마술적 힘의 원천은 아마도 영적 존재에 의탁하여 얻어낸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었나 싶다. 앞서 언급한 <해리포터>식의 마술도 사실 정도의 차이는 크게 있지만, 이방 종교의식이나 주술 가운데 영적 존재의 힘을 빌어 지금도 어느 정도 행해지고 있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이런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와 비슷하게 요가에서 행하는 공중부양이나 유리겔러 식의 초능력, 혹은 심령술 등의 배후에도 사실은 뒤에서 보이지 않게 작용하는 영적 존재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마술이나 무당, 그리고 점성술 등에 대해서 단호하게 사악한 행위로 규정을 짓고 있으며, 이러한 행위의 뒤에는 결국 사탄이 자리하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에 기독교계에서 특히 <해리포터>에 대한 경계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결국 마술이라고 하는 것은 그 근본 성격이 사람의 눈을 속인다는 점에서, 에덴 동산에서부터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를 속여왔던 사탄의 작품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지혜를 주시어 과학이라는 열매를 잉태케 하심으로, 혼돈 속에서 질서를 깨닫게 하시고 그 분이 설계하신 자연의 원리들을 하나씩 발견케 함으로써 마술적 눈속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축복하시었다. 그러나, 이같은 축복은 마술적 현상 뒤에 숨어서 역사 하는 사탄의 존재를 바로 인식하기 위함이기도 하였는데, 과학적 결과에 교만해진 대다수의 인간은 그만 영적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우를 범하고 모든 것을 물질로만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진화론적 인본주의 유물사상을 낳게 되었으니, 이 또한 과거 마술이 인간을 우매하게 하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또 다른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이 되고 말았다. 이런 점에서 창조과학자들은 과학의 본래의 목적을 회복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자들이다. 마술과 같은 눈속임에 더 이상 무지한 사람들이 현혹되지 않도록 과학적인 답을 찾는데 노력을 기울일 뿐만 아니라, 그 과학적 발견을 주신 자의 지혜와 솜씨를 찬양하기 즐겨하는 자들이다. 더 나아가 그 마술적 현상 뒤에 숨어 있는 영적 존재를 인정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성경을 통해 찾기를 마다하지 않는 자들이다.  <해리포터>의 상업적 성공을 지켜보면서, 자연의 이치를 밝히 보여주는 과학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기는커녕 여전히 영적으로 공허한 그래서 신비적 마술에 시선을 뺏기는 현대인의 참모습을 보는 듯 하였다면, 그것이 단지 필자만의 기우일까?



출처 - 이브의 배꼽, 아담의 갈비뼈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655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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