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bile background
Headlines
2004-07-26

오하이오에서 가열되고 있는 진화론 전투

(Evolution Battle Heats Up in Ohio)


     CNN은 오하이오 교육위원회가 '진화론의 분석 비판 (Critical Analysis of Evolution)” 이란 제목의 선택 수업을 13 대 5 로 가결시켰다고 보도했다 (2004. 3. 12). 여느 때처럼 양편은 대립하고 있으며, 일부 과학 단체들은 그것은 '과학으로 감추고 있는 종교적 노력”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것은 학생들을 위한, 그리고 학문의 자유를 위한 승리라고 간주하고 있다.  



다윈 신봉자들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이것은 단지 선택 수업이다. 그리고 시험도 없다. 학생들의 진급에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500 페이지 중에서 478 페이지는 다윈주의자들의 이야기를 적어 놓고 있다. 오라, 다윈 당의 추종자들이여, 당신들의 최상의 증거들을 제시해 보라. 우리는 다윈주의자들의 대변지인 학술지들에 실린 주장들을 이곳 Creation-Evolution Headlines 에서 정기적으로 토론하고 있다. 우리는 증거들을 검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는가? 고등학교 학생들은 다윈의 교리를 이해하기에 충분히 현명하다고 당신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증거들을 판단하는데 충분히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오직 다윈주의자들만이 다윈니즘을 가르쳐야만 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스테픈 윅스(Akron 대학의 생물학자)의 이 비유를 살펴보라. "만약 어떤 한 전문가가 당신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제거해야할 뇌종양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동차 정비공의 의견보다는 더 무게가 있는
것이다” 대신 우리의 비유중 하나를 선택해 보라.

.이라크 전쟁에 대한 뉴스를 들을 때, 학생들에게 알자지라 방송만 듣게 할 것이 아니라, 폭스    뉴스도 들을 기회를 주어야만 한다.

.위험한 뇌종양 수술을 받기 전에, 여러 독립적인 전문가들로부터의 의견도 들어야 하며, 또한 관련 의학 책들도 읽어보아야 한다.

.중고차 세일즈맨에게서 중고차를 사기 전에, 소비자 보고서를 점검해야 한다.

.배심원들은 결정을 하기 전에 검사와 변호사의 이야기를 둘 다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검사의 명성이나 경력에 의해 흔들리지 말라. 오직 법률과 증거에 의해서 결정하라.

비유는 재미있다. 이 논쟁을 묘사하는 당신의 비유를 만들어 여기로 보내 달라 (send it here). 독자들이 보내준 비유이다.

.만약 알콜중독자가 자신이 알콜중독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기 원한다면, 술집으로 가서     자신의 술친구들에게 물어봐야하는가, 아니면 면허를 가진 알콜중독 치료 전문가를 찾아가야 하는가?

.만약 세포 안에서 모든 미세한 모터와 기계들이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를 알기 원한다면, 아마도 정비공을 불러서 진단 시험을 시작하여야만 할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creationsafaris.com/crev0304.htm

출처 - CEH, 2004. 3. 10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982

참고 : 696|551|1912|1914|5462|5461|5413|5272|5211|5210|5112|4766|4765|4636|4635|4542|4140|4039|3812|3682|3426|3423|3244|3241|3077|3055|3041|3039|3037|3024|2864|2579|2359|2353|2330|2307|2114|2039|2016|1174

Headlines
2004-07-26

학교에서 다윈주의에 모호한 이탈리아

(Italy Waffles on School Darwinism)


      미국의 일만이 아니다. 이탈리아의 과학자들과 정치가들도 또한 다윈에 관하여 분열되어 있다. 교육국은 교육 지침의 주요 정비의 일부분으로,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려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004. 4. 28일자 Science1 지는 뉴스란에서, 연립 정부의 극우 알렌자(Alleanza Nationale) 당의 압력이 있었을 것으로 주장했다. 올 해 초에 그 당은 대변인을 통해, 진화론은 유럽에서 '좌익의 맹주(hegemony of the Left)'이며, ”마르크스주의의 대기실(antechamber of Marxism)”라고 칭하면서 '반진화론 주간(Anti-evolution week)”을 후원했다는 것이다.    

'지도자급 과학자들(leading scientists)”의 반발은 강했고 예측되었다고 Access Research Network은 보도했다. The Scientist 지의 필자인 로렌치(Rossella Lorenzi)는, 교육국에 편지와 이메일이 쏟아지고 난 후, 다윈은 다음 날 학교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모라티(Letizia Moratti)는 진화론이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추방되었던 것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일(absolutely false)”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진화론은 초등학교에서부터 가르쳐질 것이라고 언론에 장담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진화론 교육의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려는 과학자들의 한 위원회가 있음을 인정하기도 했다.

진화론 전공의 과학자들 중 한 명은 6월에 '다윈 주간(Darwin week)”을 조직하고 있는 중이다. 그 주간에는 이탈리아 전역의 대학들과 자연사 박물관 등에서, 진화론 교육에 대한 세미나가 열릴 계획이다. 사이언스 지는 로마 가톨릭 교회도 다윈주의를 반대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시스틴(Sistine) 성당을 관광하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처럼, 이탈리아는 창조론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빈정대고 있다.

한편, 카우보이 시골로 돌아가서, 진화론은 몬타나 주의 다비(Darby)에서 아직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02/27/2004 headline을 보라). 대안의 제시 없이 다윈주의의 비판을 허용한 '객관적 기원 정책(objective origins policy)”은 지역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다. The Ravalli Republic 지에 따르면, 그것은 다음 번 학교위원회 선거 결과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하였다.

1'Darwin in Italy,” Random Samples, Science, Volume 304, Number 5671, Issue of 30 April 2004.
------------------------------------------------------------

흥미로운 것은 이탈리아 사람들은 다윈(Darwin)과 마르크스(Marx)를 점선으로 연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미국의 과학자들은 진화론은 종교적으로 중립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또한 사이언스 지는 다윈니즘(Darwinism)과 진화론(evolution)을 같은 뜻의 동의어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라. 몇몇 진화론자들은 그 연결을 교묘히 피해가려고 노력하면서, 다윈니즘은 단지 진화론의 의심되는 메커니즘 중의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윈니즘은 정말 좌익의 맹주인가? 강성 다윈주의자들이 얼마나 또한 좌익 성향인지를 알아보기 위한 연구도 필요할 것이다. 그 관계는 높을 것이다. 유명한 과학 학술지들의 정책을 결정하는 대부분의 편집자들은 보통 분명히 반보수적, 자유주의적 좌익의 경향을 보인다. 이 글에서도 반진화론자들을 '극우(far-right)”로 부르는데 망설임이 없다.

그러나 다윈 당에 대해서는 '극좌(far-left)' 라는 말의 사용을 피하고 있다. 찰스 다윈과 그의 타락한 추종자들은 당대에 모두 철저한 극좌였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교육적이다. 아마도 그것은 일치한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찰스다윈을 우상화 하였고, 교회를 폐쇄하였고, 사람들을 무신론의 박물관들로 돌려버렸던 것이다.

논쟁 부분에 있어서 사이언스 지는 여느 때처럼 말을 왜곡한다. 창조론은 한편으로 종교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같은 문장에서 저자는 영향력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다윈주의를 반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자, 그런데 이것은 어찌된 일인가? 미켈란젤로는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그런데 사람은 수백 수천만년에 걸쳐 진흙에서부터 진화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무에서 즉시로 창조되었음을 벽화로 그려 놓았다.

또 다른 왜곡은 지도자급 과학자들이 항의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독자들에게 모든 과학자들이 진화론을 인정했고, 단지 소수의 극우적이며 종교적인 정치가들이 그것을 반대하고 있다고 추론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다윈 당(Darwin Party)의 힘은 아직까지도 무섭다. 슬프게도 이탈리아 정부는 그들의 맹공에 결정을 지속시키지 못했다. 굴복했을 뿐만이 아니라,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을 그들에게 주게 되었다. 이제는 다윈 당이 진화론 교육을 감독하게 되었고, 진화론 교육을 장려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 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육국 관리의 말에 의하면, 정부의 결정 이유는 14 세 이하의 학생들은 그러한 복잡한 문제에 직면하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것이었다” 반대하는 과학자들은 물리학과 수학도 어렵지만 그 과목들을 가르치는 것을 멈출 수는 없을 것이라며 반박하였다. 자 그러면, 다윈에 관한 논란들을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고 말하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중력에 대해 배울 수 있다면, 다윈니즘은 여러 심각한 과학적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 학부모들의 보호력은 약한 것 같다.

우리는 그 반대의 접근을 제안한다. 이탈리아 어린이들은 진화론의 동화같은 이야기를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조숙하고 감수성이 예민하다고, 마르크스주의자며 다윈주의자들에게 말하라. 아마도 당신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마르크스주의도 무너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윈니즘이 좌익의 맹주로 남아있는 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제가 될 수도 있었으나 다윈의 혐오스러운 책을 읽은 후 무신론자가 되었던 스탈린이 그의 시대에 창조론자들에게 행했던 일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다음의 기사를 (Read this account) 읽는다면, 이탈리아인들이 경계해야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반진화론 주간에 읽혀져야 될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creationsafaris.com/crev0504.htm 

출처 - CEH, 2004. 4. 29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980

참고 :

미디어위원회
2004-07-26

진화론자들은 누구인가?

(A Who’s Who of evolutionists)

Don Batten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과 진화론을 같이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진화론은 하나님을 반드시 배제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진화가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만약 신이 어떤 역할을 했다면, 초기의 우주를 창조하거나, 빅뱅의 원인을 제공하여 진화가 일어날 수 있도록 했다는 정도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역할은 보이지 않고 명백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창조가 하나님의 작품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나타낸다고 가르치고 있는 많은 성경 구절들과 모순된다. (예로 시 19:14, 롬 1:20)


사실상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무신론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진화론에 '신'을 여분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진화론은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은 그들의 사고의 세계에서 완전히 불필요한 존재이다. 만약 2차 세계대전 이후 공공연히 진화론을 전파하고 방어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깊이 살펴본다면, 분명한 패턴이 나타나는데, 그들은 사실상 무신론자임을 공언한 사람들이다. 그 이름들을 주목해 보자.
 

• 어니스트 메이어 (Ernst Mayr) : 동물학자

• 할데인 (J.B.S. Haldane) : 유전학자, 또한 사탄주의자(Stalinist).

• 칼 세이건 (Carl Sagan) : 외계문명 탐사계획(SETI)의 운영자, 반기독교적 책과 반기독교적 영화인 ‘접촉 (Contact)’의 저자.

• 이삭 아시모프 (Isaac Asimov) : 공상 과학소설 작가, 인본주의 선언(Humanist Manifesto II) 서명자, 미국 인본주의 협회 (American Humanist Association, AHA)의 전임 회장.

• 쥴리안 헉슬리 (Sir Julian Huxley) : UNESCO의 최초 회장, 인본주의 선언 서명자.

• 쟈크 모노드(Jacques Monod) : 노벨상 수상 생물학자, 인본주의 선언 서명자.[1]
 

근래에 진화론으로 전향한 사람들:

• 스테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 마르크스주의자, 진화론을 대중화하는데 많은 일을 한 사람.

• 리차드 도킨스 (Richard Dawkins) : ‘눈먼 시계공 (The Blind Watchmaker)’과 다른 반-창조론 책들의 저자. 지금은 옥스퍼드 대학(영국)에서 근무하며, ‘과학의 공공의 이해(즉, 진화론적 자연주의)’를 증진시키기 위한 일을 하고 있음.

• 다니엘 데네트 (Daniel Dennett) : ‘Darwin’s Dangerous Idea‘ 의 저자로 진화론이 종교와 도덕성의 모든 기초들을 없애버리고 있다고 즐겁게 주장한 사람.

• 유진 스콧 (Eugenie Scott) : 창조론자들을 반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세속적인 인본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소위 과학교육 국립 센터(National Center for Science Education)의 장.

• 이안 플리머(Ian Plimer) : 반창조론자로서 호주의 지질학 교수, 1995년 올 해의 호주 휴머니스트(Australian Humanist)로 선정.


공공연한 무신론자들 중에서 위에 나열된 이들은 창조론자들을 불쾌하도록 집요하게 반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창조론자들의 생각에 대항하는 출판물들의 발행과 법적 절차들을 진행시키는데 공헌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창조론자들을 침묵시키기 위한 시도로서 법의 허점들을 이용하여 (가령 미국 대법원의 제 1 수정안의 남용과 같은), 창조론적 사고들의 검열 제도를 조장하고 있다.

미국 과학자들의 39 %가 개인적 신을 믿는다고 할지라도[2], 유신론적 과학자들은 진화론을 공공연히 선전하고 있는 위의 목록에서는 뚜렷하게 빠져있다. 왜 무신론자들은 진화론을 선전하는데 그렇게 앞장 서고 있는 것일까?

무신론자인 프랑크 진들러(Frank Zindler)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생물학이 기독교에 대해 행했던 가장 파괴적인 일은 생물학적 진화의 발견이었다. 이제 아담과 이브는 진정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음을 알게 됨으로서, 기독교의 중심적 신화는 파괴되었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면, 원죄(original sin)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원죄가 없었다면, 대속의 구원도 필요하지 않다. 대속의 구원이 필요하지 않다면 구세주도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역사적 인물이든 아니든, 예수는 실업자의 부류에 속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3] 

그러므로 진화론은 창조주는 없다는, 그리고 모든 것은 스스로(즉 진화로) 만들어졌다는 진화론자들의 믿음의 기초가 되고 있으며, 그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사상인 것이다. 이것이 무신론자들이 진화론을 일반 대중들에게 인식시키려고 애쓰는 일에 앞장서는 이유인 것이다. 진화론은 무신론적 믿음을 증진시키고 있다. 만약 일반 대중들이 진화론을 '사실(fact)' 로서 받아들이도록 설득당한다면, (진정한) 기독교는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References and notes  
1. The late Theodosius Dobzhansky was also a prominent public promoter of evolution and apparently claimed ‘Russian Orthodox’ affiliation. However, in his 1970 book Mankind Evolving he favourably quoted Teilhard de Chardin, ‘Evolution [not God—DB] is a light which illuminates all facts, a trajectory which all lines of thought must follow’. Earlier, he wrote: ‘Attempts to restrict the concept of evolution to biology are gratuitous. Life is a product of the evolution of inorganic nature, and man is a product of the evolution of life.’ (T. Dobzhansky, Changing man, Science 155: 409, 1967). Dobzhansky’s ‘god’ was irrelevant to his view of reality.
2. Edward Larson and Larry Witham, Scientists still keeping the faith, Nature 386(6624): 435–436, 1997.
3. Frank Zindler, American atheist, in a debate with William Craig, Atheism vs Christianity video, Zondervan, 1996.
 

 
*참조 : Darwin’s bulldog—Thomas H. Huxley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6019/

Raymond Dart and the ‘missing link’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344

Haeckel: legacy of fraud to popularise evolution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3/j21_3_102-110.pdf

Kinsey, Darwin and the sexual revolution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0_3/j20_3_111-117.pdf

The man who made the wedge: James Hutton and the overthrow of biblical authority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8_2/j18_2_55-57.pdf

Eviscerating Eldredge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810

Gould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679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ation.com/a-whos-who-of-evolutionists

출처 - Creation 20(1):32, December 1997.

이웅상
2004-07-26

창조의 신비 29. 진화론은 신앙성장 걸림돌


       많은 사람들은 진화론이 하나의 과학으로써 신앙에는 별 관계가 없는 것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그러나 진화론은 현대과학 문명사회에서 복음사역에 가장 큰 장애물 중의 하나이다.왜냐하면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내세도 없고 인간이 영적인 존재도 아닌 물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이들은 무기물에서 우연한 충돌에 의해 유기물이 생겨나고 여기서 최초의 한 생명체에서 진화되어 나온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결국 인간은 그 기원에 있어서 다른 동물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으며 궁극적으로 무생물에서부터 생겨난 우연의 산물이다.

이런 인간속에 무슨 도덕과 영원한 세계가 있겠는가.이러한 진화론적 교육을 강요당한 지성인들에게 창조가 하나의 전설 정도로밖에 들리지 않게 된다.철저한 유물론적 사고로 세뇌된 이들에게 영적인 세계란 허황된 꿈과 같은 얘기일 뿐이며,이러한 영원한 세계를 갈망할 필요도 없게 된다.하나님의 독생자도 예수그리스도도 별 의미 없게 되고 만다.

또한 이러한 철저한 유물론적 사고에 근거한 진화론적 사고는 인간의 도덕관념을 흐리게 한다.궁극적으로 인간은 동물과 같은 조상에서 진화된 존재에 불과하며 동물과 같은 모든 행동을 할 수 있다고까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가장 자유롭고 행복한 인간의 상태라고까지 미화하는 자들이 있지 않는가.옷입기를 거부하는 나체주의자와 현재의 가정제도를 부인하는 동성연애자들이 바로 이러한 영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뿐만이 아니라 진화론은 이미 신앙을 소유한 기독인에게도 신앙성장에 큰 장애물이 되고있다.믿음으로 신앙이 시작된 후에도 이 문제가 분명히 해결되지 않으면 늘 방황하기 쉽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대학시절에 교회를 떠나는지 모른다.고등학교까지는 부모님의 강권에 못이겨 교회를 나가고 자연히 창조에 관해 들어왔지만 학교교육을 통해선 진화론만이 과학적 정설로 꾸준히 강요되면서 자연스럽게 진화론으로 세뇌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대학에 들어가면 한꺼번에 밀려오는 너무 많은 자유속에 부모님과 교회에 의해 강요되어 온,비과학적이라고 여겨온 창조론을 포기하는 것이 당연한 현실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청소년 때부터 신앙과 함께 진화론의 비과학성과 창조론의 과학성을 가르침으로 성경은 현대과학과 모순된다는 잘못된 학교 교육을 교정해주어야 한다.

일단 이렇게 기본적인 것에 확신이 생기면 그 후에 새로운 이론과 반론이 엄습해 와도 스스로 방어할 준비를 할 수 있게 된다.



출처 - 국민일보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477

참고 :

미디어위원회
2004-07-26

세속적 인본주의란 무엇인가?

(What is Secular Humanism?)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란 어렵다. '인본주의”라는 말을 들을 때, 여러 가지 관념이 떠오른다. 예컨대, Webster 씨는 인본주의를 '인간의 이익, 가치, 또는 존엄성이 우위를 점하는 체계나 사상, 또는 행동의 형태”[1]라는 뜻에 가깝게 정의하였다. 인본주의의 정의를 물을 때 일부의 사람들은 일반교양과목을 생각할 것이다. Webster 씨의 정의나 일반교양과목을 생각하는 사람이나 다 똑같이 타당하고 훌륭하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바는 세속적 인본주의라는 세계관에 대한 정의이다. 

첫째, 세속적 인본주의는 하나의 세계관 이다. 즉, 그것은 모든 현실적인 사안을 해석하는 시각으로서의 하나의 신념체계다. 안경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세속적 인본주의는 종교적 세계관 이다.[2] '세속적” 이라는 단어로 인해서 오도되지 말아야 한다. 인본주의자들 스스로가 종교적인 세계관에 집착한다는 걸 자인하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이른바 인본주의 선언 I & II 에 의하면, 인본주의란 "하나의 철학적, 종교적, 그리고 도덕적인 관념”[3] 이라고 한다.

하지만, 인본주의자들은 "종교적”인 사람으로 식별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미국의 공교육기관에서 종교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관적인 생각으로는 그렇다). 세속적 인본주의를 종교와 동일시하면, 인본주의 신념의 중요한 선전수단이 제거될 것이다. 그런데 인본주의는 하나의 신앙임을 부인 할 수 없다. 그들 스스로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다. 인본주의 선언은 이렇게 선언한다. 즉,

"이 확언[선언 안에 천명된]은 최종적인 신경(credo)나 교의(dogma)는 아니다. 그것은 살아 성장하는 신념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4]


세속적 인본주의의 기본 신조들(beliefs)은 무엇인가?

세속적 인본주자들은 무엇을 믿는가?

신학적으로,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은 무신론자들(atheists) 이다. Prometheus Books의 출판업자이며 Free Inquiry지의 편집자인 인본주의자 Paul Kurtz는, '인본주의는 어떤 의미로서 보든 간에 여전히 하나님을 우주의 기원이나 창조자로서 믿는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5] 라고 말한다. Corliss Lamont도 이에 동의하면서, '인본주의'는 "신들이 우주를 창조한 것이 아니고, 우주가 개별화된 형태를 갖춘 인간의 상상력에 자유재량권을 주어 신들을 창조하게 하였다"고 강력히 주장한다.”[6] 라고 말한다.


철학적으로,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은 자연주의자들(naturalists) 이다. 즉, 그들은 존재하는 것은 모두 자연이라고 하면서 물질세계만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없다. 영혼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세는 없다. Carl Sagan은 그의 Cosmos 시리즈의 서문에서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는 "우주는 현재, 과거, 그리고 미래의 존재의 전부다.”[7] Roy Wood Sellars는 이에 동의하면서, "인본주의는 자연주의적인 이념으로서 하나님을 창조주로 가정하는데서 당연시 되는 우주의(cosmic) 주재자로서의 그의 초자연적 지위를 거부한다.”[8]라고 말한다.


생물학 분야에서의 세속적 인본주의 신조들은 그들의 표방하는 무신론과 자연주의 철학에 밀접하게 연루되어있다. 만약에 초자연적인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생명도 포함하여, 모든 생명은 순전히 자연 현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은 진화론을 믿을 수밖에 없다. 예컨대, 줄리안 헉슬리(Julian Huxley)는 "인간은... 그의 육신, 마음, 그리고 영혼까지도 초자연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모두 진화론적으로 생산되었다.”[9] 라고 주장한다. Sagan, Lamont, Sellars, Kurts - 이 모든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은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무신론을 주장하는 대부분의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은 윤리적 상대론 (ethical relativism)을 수용한다. 그들한테는 절대적 도덕규범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상황에 따라서 자기 자신의 판단에 준하여 자기 나름의 윤리적 규범을 조정하여야만 한다 [10]라는 이론을 내세운다. 만약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의 절대적 도덕규범이 설 수 없을 것이다. 인본주의자 Max Hocutt는 인간이 "스스로의 규범들을 만들 수도 있고, 또 만들기도  한다. ...도덕률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만들어지는 것이다.”[11] 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세속적 인본주의는 무신론, 자연론, 진화론, 그리고 윤리적 상대론에 근거하는 종교적 세계관 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의는 빙산의 일각만을 보고 하는 말일 따름이다. 보다 상세한 토론 내용이 David Noebel의 Understanding of Times 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이 저서에서 신학, 철학, 윤리학,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 법학, 정치학, 경제학, 그리고 역사학 등등 10종에 걸친 학문 하나하나에 대한 인본주의적 접근을 (상세히) 토론하고 있다.


Footnotes:

1. Webster's Encyclopedic Unabridged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New York: Gramercy Books, 1989), p. 691.

2. For detailed proof that Secular Humanism is a religion, see Clergy in the Classroom: The Religion of Secular Humanism by David A. Noebel, J.F. Baldwin and Kevin Bywater (Manitou Springs, CO: Summit Press, 1995).

3. Paul Kurtz, in the preface to Humanist Manifestos I & II (Buffalo, NY: Prometheus Books, 1973), p. 3.

4. Kurtz, Humanist Manifestos I & II, p. 24. Italics added.

5. 'Is Everyone a Humanist?' in The Humanist Alternative, ed. Paul Kurtz (Buffalo: Prometheus Books, 1973), p. 177.

6. Corliss Lamont, The Philosophy of Humanism (New York: Frederick Ungar Publishing, 1982), p. 145.

7. Carl Sagan, Cosmos (New York: Random House, 1980), p. 4.

8. Roy Wood Sellars, 'The Humanist Outlook,' in The Humanist Alternative, ed. Paul Kurtz (Buffalo: Prometheus, 1973), p. 135.

9. Julian Huxley, as cited in Roger E. Greely, ed., The Best of Humanism (Buffalo: Prometheus Books, 1988), pp. 194-5.

10. David A. Noebel, Understanding the Times: The Religious Worldviews of Our Day and the Search for Truth (Eugene, OR: Harvest House, 1991), p. 200.

11. Max Hocutt, 'Toward an Ethic of Mutual Accommodation,' in Humanist Ethics, ed. Morris B. Storer (Buffalo: Prometheus Books, 1980), p. 137.

[ If this information has been helpful, please prayerfully consider a donation to help pay the expenses for making this faith-building service available to you and your family! Donations are tax-deductible. ]

Adapted from Understanding the Times: The Religious Worldviews of our Day and the Search for Truth, and Clergy in the Classroom: The Religion of Secular Humanism by David A. Noebel, J.F. Baldwin and Kevin Bywater of Summit Ministries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christiananswers.net/q-sum/sum-r002.html 

출처 - ChristianAnswers

미디어위원회
2004-07-26

진화론 : 그 선전 배후에 감춰진 비밀 

(Evolution : The Secret Behind the Propaganda)

Margaret Helder 


     진화론은 사실(facts)이고, 창조론은 신앙(belief)이라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고 생각하기 쉽다. '진화론' 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던 PBS TV 시리즈가 전하는 메시지가 확실히 그랬다. PBS 방송국에 보내졌던 내부문건(memo)은 진화론에 관하여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알려진 모든 과학적인 증거는 진화론을 지지한다. … 지난 150년 동안에 있었던 신발견들은 하나같이 진화론을 지지하고 있었다.” (PBS 내부문건 2001. The Evolution Controversy: Use It or Lose It. Evolution Project/WGBH Boston. June 15, p.5). 이 문건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과학적인 이론은 ”사실들을 묶는 보다 높은 수준의 이해”라고 정의하였다 (p.5). 하지만 창조론에 관해서는 ”과학이 아니다” 라고 간단히 처리해 놓았다 (p.6). 최근 다년간에 발표되었던 그와 유사한 여러 주장들로 인해서, 일반적인 과학이론은 물론 특히 진화론은 자연계에서 관찰된 증거에 근거하고 있어서 실험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사실에 입각하고 있다는 확신을 많은 사람들에게 심어주기에 충분하였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과학자들 중에는 이것이 현대적 해석이 아니라고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과학자들이 실질적인 데이터에 관한 걱정 따윈 포기한지 오래라고 생각한다.

과학에 관한 현대적 조망은 학문(discipline)에 관한 과학자 자신들의 평가에 잘 나타나고 있다. 유명한 과학철학자 데이비드 헐(David Hull)은 일찍이 1965년에 이렇게 기술한 적이 있다.

”…과학은 많은 과학자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실험적인 학문이 아니다. 관찰되지 않은 실체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관찰될 수 없는 실체까지도 과학이라는 학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과학은 그냥 관찰하는 것만으로 되는 학문이 아니다. 그것은 세워놓은 어떤 이론의 틀 안에서 시행된 관찰에 근거하는 추론이다.” 1

이 진술 안에서 우리는 사실과 그에 대한 해석, 즉 이론과의 사이에 일종의 균형(balance)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Dr. Hull이 데이터를 잘못 파악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의심을 해소할 수 없다. 지난 해에 그는 하나의 공동 조상으로부터 수정을 거쳐 태어나는 후손들에 관한 개념에 관한 이론(계통발생론 또는 진화론)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계통발생론 프로그램에 있어서 제일차적인 요소는 그리고 유일한 요소이기도 한 그것은 계통발생론의 실험적인 성질이다. 그러나 심지어 계통발생론까지도 마냥 쳐다보고 바라보는 것만으로써 발견되는 맹목적인 대상만이 전부는 아니다. 계통발생론의 주제 분류는 하나의 추상적인 문제다.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추상적이다. 첫째로 그것은 형태학적, 유전학적, 고생물학적, 그리고 그 어떤 형태의 학문적 증거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독립적으로 추론되는 학문으로 결코 직접적으로 관찰되지 않는다.” 2

우리가 알기로는 진화론적 후손에 관한 그의 사상은 그냥 내린 결론이지 결코 직접적인 증거에 의해 뒷받침된 이론이 아니다.

헐 박사가 이 논문을 쓸 당시엔 과학의 본질에 관한 관념이 실질적으로 일종의 유동상태에 있었다. 1934년 칼 포퍼(Karl Popper)는 과학에 관한 어떤 이론도 일찍이 진리로 증명될 수 있었던 것은 없었다고 지적한 적이 있었다. 그가 암시한 독특한 대안은 과학이론들은 허위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노력일 따름이라고 하였던 점이다. 그런대로 나름으로 충분한 실험을 거친 이론들은 실험결과의 데이터에 근거하여 허위로 밝혀지지 않든가 논박되지 않았을 때엔, 그것이 과학적인 이론이라는 자격으로 인정되었다. 이 때 유일하게 가려진 문제는 많은 분야에 걸친 과학적 탐구가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허위가 입증될 수 없었던 이론은 과학적이기보다는 (믿음에 바탕을 둔) 형이상학적이었다. 따라서 과학 잡지 Nature 지는 1981년에 ”가정상의 과거 진화의 과정은 재현될 수 없기” 3 때문에 다윈사상과 하나님의 창조 사상은 똑같이 형이상학적인 이론이라고 지적한바 있었다. 그러나 다윈사상을 비과학적이라고 특징짓는 것처럼 어려운 작업은 모습을 드러낼 수 없을 것 같았다.

토마스 쿤(Thomas Kuhn)은 1962년에 출판한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 에서 그는 과학적인 이해에 일종의 포스트-실험시대를 도입하고 있다. 토마스 쿤에 의하면, 모든 과학은 일종의 사상의 통일된 틀에 준하여 진행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와 같은 이론체계가 없다면 사상(事象, facts)은 의미가 없으며, 또 과학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과학철학자 델 라치(Del Ratzsch)의 최근 저서 ”과학과 그것의 한계(Science and its Limits)” 에서, 그는 이론을 데이터보다 우위에 두는 것이 과학실습에 엄청난 함축을 내포한다고 지적했다. 결과적 실험 데이터는 과학에 더 이상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라치는 ”과학자는 패러다임에서 동떨어져 독립적으로 일부 궁극적인 현실에 접근한다는 주장과, 선택된 패러다임도 부분적으로는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선택된 가치라는 주장을 하면서, 토마스 쿤은 현실의 정확한 양상에 관한 궁극적인 상소재판(판단)을 세계자체(데이터)와는 상관 않고 전문적인 과학자들의 의견일치에만 맡기려한다.” 4 라고 말했다. 라치는 한발 더 나아가,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완전하고 안정된 그리고 독립된 외적 현실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과학에 있어서의 진리라는 것에 관하여 왈가왈부할 특별한 이유는 없다…” 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면 현대의 과학자들은 데이터를 가지고 무엇을 하는가? 그들이 하는 일은 현행 과학적 패러다임에 시각에서 데이터를 해석하는 일이다. 그들은 말하자면 진화론과 같은 패러다임을 거짓으로 입증해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패러다임이란 전형은 쉽게 파괴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의 허위성을 밝힌다고 해서 개별적으로는 결코 패러다임을 거부되게 만들 수는 없다. 심지어 패러다임에 반대되는 수없이 많은 데이터들도 패러다임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 한다. 진화론이야말로 가장 극명한 패러다임으로서 실험적인 데이터에 크게 면역이 되어있다. 우주론도 이에 준하는 다른 예다.

과학의 새로운 정의의 가장 명백한 피해자는 진실과 진리에 대한 새로운 정의다. 예컨대 생물학자 마크 시달(Mark Siddall)과 아놀드 클루즈(Arnold Kluge)는 1997년에 ”'진리의 탐구'는 출발부터 오도된 과학탐구이며, 그리고 아무런 현실적 기본도 없는 탐구이다.” 5 라고 암시하였다. 그들은 한 발 더 나아가서 ”비록 과학이 진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이론도 검증되기 전에는 진리와 상관이 없다.” 어쨌거나 이 저자들은 ”다행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우리는 과학탐구를 계속할 것이라는 소식이다.” 라고 결론짓는다. 그들은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 진리라는 명사(名辭)의 포착하기 어려운 개념에 관한 우리들의 주장을 골칫거리로 혹은 허무주의적인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과학에 대한 연속적인 노력을 보장하고, 진리 그 자체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즉, 인식━을 우리가 영구적으로 인정하도록 보장하는 진리를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반격한다.

과학은 분명히 먼 길을 왔다. 애당초 18세기와 19세기에는 실제 관찰내용 (실험 데이터)이 높게 평가되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관찰내용들이 지나치게 높게 평가되기도 하였다. 18세기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과 같은 일부 철학자들은 우리들의 감각이 인식하는 것 말고는 실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존재하는 것은 물질계뿐이라는 것이다. 이론의 중요도가 점차로 증대하더니만 마침내 현재에 이르러서는 실험 데이터가 무시되는 데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모든 과학자가 다 의견통일(consensus)에 대한 Kuhnian 호소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과학철학자 톰 세틀(Tom Settle)은 그 상황을 이렇게 비탄하였다. ”진리탐구가 끝이 없는 탐색으로 생각하고 (아마도 실망한 나머지) 노력을 포기하고 동료과학자들과 합의에 안주하는 사상가들이 많다. 만약 그들이 옳다면, 그들이 지향하는 과학탐구의 목표가 진리에 있지 않고 의견통일에 있다. 그렇다면 그 그림은 음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때의 상황에서 출현하게 될 최악의 양상은 과학자들이 오직 의견통일에 근거하는 독단적인 해석을 악착같이 옹호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 넋 나간 짓은 다름이 아니라 규제력으로서의 진리를 포기하고 진리 아닌 그 무엇이 규제력이 있는 것으로 합의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은 호소(呼訴)를 현실의 잣대에 맞추고 노력을 객관화의 잣대에 맞추기 때문에 과학을 굳히기는커녕 손상을 입힌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패러다임이나 진화론과 같이 중요한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그냥 이론의 데이터들을 패러다임의 시각으로 해석할 뿐이다. 진화론은 관찰의 이론이 아니고, 어떤 철학의 시발점일 따름이다. 시달과 클루즈가 언급하였듯이 ”만약에 우리 직업이 단순히 감각경험들의 목록이나 작성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이상의 무엇이어야 한다면 생물학자들은 건전한 철학의 기본적인 요구에 대해 면역이 될 수 없을 것임은 여타의 과학이 그렇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진화론적 생물학, 특히 계통학이 물리학에서의 양자이론의 위치와 마찬가지로 설명하려 하는 그 내용을 우리는 관찰할 수 없는 것이다.”

또 한 사람의 생물학자 앤드류 브로워(Andrew Brower)는 '변형된 퇴보(descent with modification)'를 순환논리, 즉 하나의 형이상학적 가정이라고 특징지었다. ”개별적인 관찰에 대한 실험과 변형된 퇴보에 대한 실험과의 사이에는, 만약에 후자가 원인과 결과의 혼돈이 없이 실험할 수만 있다면, 일종의 존재론적 비약이 개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만약에 진화의 파생을 함축하는 변형된 퇴보에 관한 배경지식이 독립적인 방법으로는 실험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생기설(生氣說)이나 정향진화설(定向進化說)처럼 포퍼(Popper)의 가설-연역적 접근의 성분보다 더 형이상학의 제일원리로 보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진화는 허위로 증명될 수는 없으나 하나의 선험적인 가정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다른 한편, 크리스천들은 전형적으로 과학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그 어떤 학설보다 더 전통적이고 또 실험적이다. 그들은 반대 데이터가 지적됐을 때엔 청취자는 그 패러다임이 거부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런데 청취자는 그 데이터의 의미성을 최소화하고 그 데이터를 '이례적(異例的)'이라든가 이해하기엔 너무 조잡스럽다고 치부해버리기 일쑤다. 대부분의 진화론 지지자들은 명백한 문제들은 결국에는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패러다임의 덜 논쟁적인 측면에만 집중한다.

현재로서는, 과학자들의 의견통일이 패러다임을 지지하기 위한 주요 요소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소수 의견의 입장에서 펼치는 개별적인 주장은 이미 대대적인 반대의견에 의해 타격을 받았다. 일부 과학자들은 과학이란 어떤 학문의 개별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비평적인 평가의 여지를 조금도 허락하지 않고 ”전부가 아니거든 아무것도 없다.” 라는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전부가 아니거든 아무 것도 없다”라는 원리를 주창한 사람은 Hull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유기체의 목록을 작성함에 있어서 진화론적 방법에 수(數)적 [실험적]인 방법을 대비(對比)시켰다. 그런데 바로 이 주장이 오늘날 창조론적 표본에 반대하는 논거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계통발생론을 재구성하는 작업에서 진화론자들이 구축한 연역추단은 충분히 입증되고 있는가? … 그 어떤 결정도 … 반드시 발견과 판단의 기술을 사용하는 다양한 과학적 접근에 근거하여야 한다. 이렇게 해서 추단은 연역에 의해서 정당화된다! 실험주의자들에 의해서 제기된 진화론적 재구성에 반대하는 주장은, 만약 그 주장이 건전하다면, 진화론적 분류만을 무효화할 뿐만 아니라 모든 실험과학도 역시 무효화한다.” 8 헐의 주장에 의하면, 데이터에 근거하여 과학적 공리를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전체의 과학적인 기획은 어쨌든 유지되기 때문이다. 만약에 어떤 이론화가 인정됐다면, 그 다음으로는 그 이론의 모든 내용은 어떤 도전도 초월한다.

과학에 있어서 실험 데이터의 중요도가 오래전부터 이론에 비해서 부차적인 것으로 강등된 마당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에 관한 PBS TV 시리지의 진술은 한결 흥미를 더한다. PBS 메모는 진화론이 네거티브 증거들에 의해서 쉽게 그 허위성이 증명될 수 있다고 함축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과학자들은 진화론을 네거티브 데이터들로부터 진화론을 방어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에 헌신하고 있다. 사실상 오늘날 실험적인 증거들 (암호화된 DNA의 본질과 정보와 같은 것)에 그토록 빈번하게 호소하는 쪽은 창조 모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진화론자들은 바로 이 데이터의 중요한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차라리 다행한 일이다. 과연 그렇다. 모든 것을 다 까놓고 살펴보았을 때, 대부분의 현대 과학의 본질은 전혀 실험적이 아니고, 오히려 포스트-실험적이든가 다분히 이론 지향적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진실과는 차이가 있다. 이러다가는 아마 PBS가 진실을 일반에게 알리기 위하여 창조론에 근거한 새로운 시리즈를 발표하여야만 할 것 같다.

 

References

1. David Hull. 1965. The effect of essentialism on taxonomy??two thousand years of stasis (II). British Journal for the Philosophy of Science 16 (61): 1-18.

2. David Hull. 1964. Consistency and monophyly. Systematic Zoology 13 (1): 1-11.

3. Editorial. 1981. How true is the theory of evolution? Nature 290 March 12: 75-76.

4. Del Ratzsch. 2000. Science and Its Limits: The Natural Sciences in Christian Perspective. InterVarsity Press. pp. 191.

5. Mark Siddall and Arnold Kluge. 1997. Probabilism and phylogenetic inference. Cladistics 13: 313-336.

6. Tom Settle. 1979. Popper on 'When is a Science not a Science?' Systematic Zoology 28: 521-529.

7. Andrew Brower. 2000. Evolution is not a necessary assumption of cladistics. Cladistics 16: 143-154.

8. David Hull. 1967. Certainty and circularity in evolutionary taxonomy. Evolution 21 (1): 174-189.

* Dr. Helder is a botanist and President of Creation Science Association of America.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icr.org/article/evolution-secret-behind-propaganda

출처 - ICR, Impact No. 351, 2002.

임번삼
2004-07-26

지상강좌 - 진화론, 창조론, 그리고 유신진화론


카톨릭의 유신진화화

카톨릭내의 유신진화론의 뿌리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가미된 스콜라 철학(Thomism)과 유니테리언(Uniterianism), 니이덤의 자연발생설(abiogenesis), 다윈의 진화론(evolutionism) 및 베르그송의 생의 철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그림4).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74)는 13세기에 야기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단죄사건'(Aristoteles Condemnation 1210)을 성경과 교묘히 조화시킴으로써, 카톨릭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접목시켰다. 그는 그리스의 자연관, 성경, 하나님, 인간 및 자연을 망라하는 스콜라철학을 <신학대전>에 집약하여 카톨릭 내에 범신론적 자연사상이 침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아퀴나스는 하나님을 '만물의 제일생성원인'(prima causa)이라고 표현하였다.

한편 예수회 신부였던 니이덤은 창세기를 인용하여 하나님이 물과 흙에서 생물(신종)이 자연적으로 발생하도록(tadsche, produce) 만드셨다고 해석하면서 생명의 자연발생설을 주장하였다(창세기 1;20-21, 2;19).

19세기로 들어서면서 영국성공회 출신의 뉴먼(John Henry Newman, 1801-1890)은 카톨릭교회의 추기경으로 자리를 바꾸면서 카톨릭 내의 진화서적에 대한 금서조처를 해제하고 유신진화론을 도입하였다.

20세기초 나타난 생의 철학자 베르그송(1859-1941)은 진화론과 창조론의 조화를 처음으로 시도한 사람이었다. 그는 <진화적 창조>(1907)에서 진화현상을 물질과 기계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에는 반대했으나 진화의 역사적 측면은 인정하였다. 자연계의 생명현상은 그 내면에 어떤 잠재력이 숨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창조주가 진화 메커니즘을 통하여 생물을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생명의 내부에는 보다 높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생의 원동력'(vital impulse)이 있기 때문에 생명의 기원과 역사는 창조적 진화론에 의해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며 이러한 생명의 추진력을 '초월의식'이라고 불렀다. 이 흐름이 생식작용으로 다음 세대로 이전되면서 신종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예수회 신부인 샤르뎅(1881-1955)은 진화론을 입증하기 위하여 비정상적이리만큼 열성적으로 활동한 사람이었다. 샤르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에 동양의 신비주의를 접목시켰다. 그는 태초에 원물질(en arche)이 있었고 이것이 진화하여 단세포에서 식물, 동물,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후 온 세계가 하나로 통일되는 오메가포인트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예수라는 것이다.

이러한 샤르뎅의 저서들에 대해 카톨릭 당국은 처음에는 퇴출과 불매명령을 내렸으나(1957), 그후 모니텀(Monitum, 1962)은 금서조치를 해제했다. 샤르뎅이 소속한 예수회에서도 그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변호하였다. 그는 유인원으로부터 인간이 진화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필트다운인, 북경인, 로데지아인 등의 조작 및 조립사건에 선도적으로 관여하였다. 그는 교황청과 프랑스정부에 의해 두 번에 걸쳐 추방당하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카톨릭의 유신진화화를 촉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비오 9세는 사실상 진화론을 수용했으나(Syllabus of Errors), 비오 12세는 <인간탄생>(Humani Generi, 1958)이라는 교서를 통해 진화론과 공산주의를 격렬히 비난하였다. 그러나 교황청 산하 과학아카데미의 압력으로 진화론을 신중히 연구, 검토할 것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카톨릭은 급속히 진화사상으로 물들어갔다.

이러한 추세는 마침내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청 산하의 과학아카데미에 보낸 서신(1996. 10. 23)을 통해 "인간이 생명의 초기형태에서  진화했다는 진화론은 가설 이상의 이론"이라고 피력함으로써 극에 달했다. 그리고 1999년에는 진화론을 카톨릭의 한 교리로 수용하면서 "이미 있던 존재(유인원)에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 아담이 탄생했으며, 진화론은 지동설처럼 언젠가는 정설로 인정받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진화론을 카톨릭의 공식 교리로 명확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이러한 결정에 대해 카톨릭계의 한 신문은 "교황이 갑자기 우리를 원숭이의 후손으로 만들었다"고 개탄하였다. 이러한 전통복음주의의 퇴조는 사도 바울이 말했던, 말세에 나타날 배도 사건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개신교의 유신진화화

초대교회에서 교부시대까지 카톨릭과 같은 역사와 전통을 공유하는 개신교의 유신진화론의 역사적 뿌리는 역시 일부 교부들이 6일이라는 기간을 해석한 것에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보다 명백하게 유신진화론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 것은 에든버러 대학의 교수이자 목사인 찰머스(1780-1847)가 큐비에(1768-1832)의 다중격변설(multiple catastrophism)을 창세기의 내용과 조화시킨 간격설(gap theory)을 주장한 데서 비롯한 것으로 볼 수 있다(그림5).

큐비에는 창세기의 6일은 비유이며 지구상에는 여러 번 국지적 홍수가 있었고 그 때마다 지층과 화석이 형성되었으며,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가 전 지구를 덮었던 최후의 대홍수였다고 주장하였다. 찰머스는 창세기 1장의 1절과 3절 사이에 간격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6일창조설에 대해서는 문자적으로 24시간의 하루(literal 24 hour theory)를 지지하는 비교적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 후,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이면서 목사인 버클랜드(1784-1856)는 간격설을 수용하면서  여기에 6기간설을 덧붙였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그의 제자 라이엘(1797-1875)은 허튼의 지층형성 이론을 더욱 발전시킨 동일과정설과 국부홍수론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동일과정설은 다윈의 진화론은 물론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 등의 종교계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영국 지질학의 아버지"라 불린 스미스(1774-1851)도 국부홍수론을 주장하였다.

창세기의 6일창조설을 6기간설로 재해석하려는 이러한 국부홍수론(local flood theory)은 히치칵(1793-1864)에 의해 미국에 소개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찰머스의 간격설은 그후 밀러, 쿠르츠, 펨버, 스코필드 등에 의해 이론이 더욱 체계화되었으며, 특히 펨버의 이론이 스코필드 주석성경(Scofield Referance Bible 1917)에 소개됨으로써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에서 개신교의 유신진화화는 먼저 개신교의 한 축인 성공회를 통하여 가속화되었다. 스트라우스(1808-1874)는 <종의 기원>을 접한 후 성경의 기적들을 믿지 않게 되었다고 다윈에게 고백하였다. 킹슬리 신부(1819-1875)는 다윈에게 기증 받은 <종의 기원>의 영향으로 종의 불변설을 부인하고 자연선택설을 수용하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다윈은 "기독교의 한 성직자가 내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은 스스로 다른 형태로 분화할 수 있는 약간의 원형만을 창조하신 것으로 믿는다고 하였다......그가 만든 법칙에 따라서" 라고 <종의 기원> 제2판에서 기술하고 있다. 킹슬리는 어린이용 교재인 <물의 자손들>(1863)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자연 어머니"라고 고쳐서 부르기도 하였다.

캔터베리의 추기경인 프레드릭 템플턴(1821-1902)은 진화론을 본격적으로 성공회 내로 이끌어 들였을 뿐만 아니라 영국 상원에 영향력을 발휘해 다윈을 기독교 심장부인 웨스트민스터교회당에 묻히도록 했다. 그의 아들인 윌리엄 템플턴 추기경(1881-1944)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진화론에 좌익사상까지 성공회 내로 유포시켰다. 이 밖에도 보이스카웃을 창설한 포웰(1857)과 나탈의 주교로서 모세오경과 여호수아서의 기적을 믿지 않았던 클렌소(1814-1883)의 역할도 지대하였다.

미국에서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죤 듀이(1859-1952)가 진화론적인 환경론을 교육계에 끌어 들였다. 그는 진화론에 기초한 인본주의선언(1933)을 만들어 기독교와의 대결을 선언하였다. 기독교계에서는 대중설교가 비쳐(1813-1887), 자유교회의 목사인 포스딕(1878-1969) 등이 진화론의 전파에 열성적이었다. 그리고 복음주의 신학자로 알려진 독일의 성경주석가 델리치(1813-1890)를 비롯하여 프랜시스 쉐퍼(1912-1984)나 에드워드 영(1907-1962)과 같은 학자들도 6기간설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유신진화론의 주장 종합

이상에서 보았듯이, 유신진화론에는 간격설, 날-연대설, 골격가설, 진행적 창조설 등이 있다. 이들의 주장하는 바는 조금씩 다르고 상호 모순되는 점도 있지만 개요는 다음과 같다.

간격설(Gap Theory)은 창세기 1장 1-2절 사이에 큰 간격이 있다는 주장이다. 첫번째의  창조세계가 천사장 루시퍼의 반란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그 상태가 2절에 나타난 혼돈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3절부터 시작되는 6일간에 지금의 우주를 다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첫번째 세계가 파괴되면서 동식물과 인간이 지층 속에 매몰된 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화석이 되었다고 한다. 창세기 1장의 1절과 3절 사이에 큰 지질학적 간격이 있다 하여 간격설이라 하며 재창조설(reconstruction)로 부르기도 한다.

날-연대설(Day-Age Theory)은 창세기 1장 3절 이하의 6일 창조가 문자적으로의 24시간이 아닌 지질학적 여섯 기간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각 지질연대마다 그 시대에 살았던 진화된 동식물들이 그 지층에 묻혔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날의 원어인 욤(yom)의 복수형 야민(yamin)이 '날' 이외에 '기간'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는 데 근거를 둔다. 그러나 창세기 1장에서는 모두 단수형으로만 기술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골격가설(Frame Theory)은 성경은 구원에 대한 골격을 설명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즉 창조→타락→구속→회복의 과정을 나타낸 것이므로,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과정은 구원을 설명하기 위한 신화이며 풍유이거나 비유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인한다. 눌찌(1924) 등이 주장했으며, 일명 풍유설(allegory theory)이라고도 한다.

진행적 창조론(점진적 창조론, Progressive Creationism)은 하나님이 진화과정을 통해 천지를 창조하셨으나 필요에 따라 진화를 중단시키거나 직접 개입하여 신종을 만드신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생물의 신종이 전혀 태어나지 않는 현상을 설명하려고 고안해 낸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설명한 유신진화론의 공통된 주장은 다음과 같이 종합할 수 있다.

① 하나님이 창조의 주체이시나 진화론적으로 만물을 만드셨다. 따라서 지금도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법칙에 따라 창조는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은 창조사역에 직접 관여하지 않으며, 모든 자연계의 작용은 자연법칙에 따라 정해진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결정되어 있다(결정론).

②아담이 탄생하기 전(Pre-Adamic Age) 긴 지질연대가 있었다. 그 지질시대에 살았던 생물들이 그 해당되는 지층 속에 묻히면서 무기질과 치환된 것이 오늘날의 화석이다.

③하나님이 한 유인원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현생인류인 아담을 만드셨다.

④창세기에는 창조의 구체적 기록이 없으며, 모두 신화, 비유, 풍유적이다.

⑤하나님이 굳이 엿새동안에 서둘러서 창조하실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복음과는 너무나도 먼 거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비복음주의적 성격에 대한 신학적 연구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①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신화나 비유화로 치부하며, 성경을 상징적이거나 상황적으로 해석한다. 예컨대 아담을 지은 흙은 선재하는 피조물(pre-existence 유인원)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②자연계에서 진화가 일어나 사람이 탄생했다는 주장은 질서도(orderness)의 지속적 증가를 나타내는 주장으로 이는 열역학 제2법칙(무질서도의 증가법칙)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더구나 훼손된 자연회복에 대한 성경의 예언과도 대치된다.

③창세기 1장에는 10회나 모든 생물을 '종류대로'(min, kind)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풀과 채소(창1;12), 물고기들(창1;21), 새들(창1;21), 육상동물들(창1;24-25) 등이 진화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완전한 형태로 만드신 것이다. 종(species)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으며 벌게이트 성경 주석에 능통하였다는 린네는 성경에 기록된 '종류'가 생물학적인 '종'과 같은 의미라고 해석하였다.

④창세기에는 만물을 6일만에 창조했다고 했으며, 출애굽기에서도 하나님이 직접 6일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 쉬셨다고 말씀하셨다. 그 어디에도 진화적 표현은 찾아 볼 수 없다. 만일 6기간설이 맞다면 성경은 왜 6일이라고 표현했을까 하는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⑤아담이 유인원에서 진화했다는 말은 반성경적이다. 그렇다면 이브 역시 같은 시기에 아담처럼 암컷 유인원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만드셨다고 추리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 경우, 인류는 한 혈통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신구약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고 말한다.

⑥고통과 죽음은 첫 사람 아담의 범죄에서 왔다는 것이 성경의 핵심교리이다. 그러나 유신진화론에서는 아담이 태어나기도 전에 수많은 동식물과 인간이 죽어서 지층 속에 화석이 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아담의 범죄로 죽음이 온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성립하게 되어 전통복음의 기초를 흔들고 있다. 창조라는 기초가 파괴되면 구원이라는 건축물은 자동적으로 무너지고 말  것이다.

⑦유신진화론자들은 특수계시(성경)보다 자연계시(자연법칙)를 더 중시한다.

⑧이들은 과학과 성경을 분리하여(Compartmentalism) 이분법적으로 해석하려 한다. 그럼으로써 양자간의 불일치와 마찰을 회피하려고 한다.

⑨창조연대가 길다는 주장은 역으로 짧다고도 주장할 수 있는 자가당착의 논리에 빠지게 한다. 유신진화론자들이 왜 굳이 진화론과 성경을 조화시키려고 하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창조론

창조론의 뿌리는 창세기이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문자적 표현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축자영감설1)에 기초하고 있다. 여기에 플라톤(BC 429-347)의 관념론(idealism)과 로마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시의였던 갈레노스(130-200)의 목적론적 생기론(teleological animationism)이 창조론의 학문화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선포된 후(313) 창조론은 다윈의 진화론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사실상 서양의 학계를 지배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견지되어 왔다. 중세기에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루터를 비롯하여 캘빈과 멜랑히톤(1497-1560), 카톨릭의 수아레스(1548-1617)와 페타비우스(1583-1652) 등에 의해 지지되어 왔다.

루터(1483-1546)는 어거스틴의 6기간적 해석을 비판하면서 지구는 6천년 전 어느 봄에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장로교 창시자인 캘빈(1509-65)도 이렇게 단호하게 말했다.

"(6일간이라 기록한 것은) 여러 나라에서 성행하는 괴이한 우화들을 물리치고 세계는 처음부터 시작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하나님의 영원성을  분명히 빛내며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며...... 우리로 하여금 일체의 공상을 물리치고 유일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6일간으로 나눔으로써 우리가 일생동안 이를 명상토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우주를 카오스상태로 창조하셨다고 했다.(When God in the beginning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 the earth was empty and waste.)

이러한 창조론적 해석은 히브리원어성경을 가장 정확하게 번역했다는 흠정역 성경(King James Version 17C)에 인용됨으로써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번역에 참여했던 캠브리지 대학의 부총장인 라이푸트(1602-75)는 지구의 창조연대를 기원전 3,928년 9월 17일로(1642), 아일랜드 아르마 교구의 어셔 주교(1581-1656)는 기원전 4004년 10월 3일로 추정하였다(1650).

이러한 연대가 너무 짧은 것 같다고 지레 판단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추측보다는 사실의 확인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9세기의 옥스퍼드 운동을 주도했던 웨슬레(1703-91)도 창조신앙의 회복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개신교는 물론 카톨릭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자연과학계에서는 린네, 파스퇴르(1822-1895), 슈라이덴(1804-1882), 슈반(1810-1882), 버효(1821-1902), 멘델(1822-84) 등을 포함한 수많은 생명과학자들이 창조론에 입각한 자연과학의 이론을 확립하였다. 오늘날의 생명과학 이론들은 대부분 창조과학자들에 의해 수립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린네(1707-1778)는 생물과 광물의 분류체계를 확립하였다. 그가 동식물을 이분법으로 분류한 것은 종간에 불변하는 독립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비록 하등생물에서 고등생물의 방향으로 분류하였지만, 이것은 진화계열이 아닌 형태적 배열을 나타낸 것이었다.(Not phylogeny but taxonomy)

한편 프랑스의 해부학자인 큐비에(1769-1832)도 루터교도인 부인의 영향으로 종의 불변설을 주창하면서 라마르크(1744-1829)의 진화설과 대립하였다. 그리고 파스퇴르는 약관 39세의 나이에 <자연발생에 관한 시험적 검토>(1861)에서 "생명은 오직 생명으로부터 유래한다(life from life only)"는 생명속생설을 실험적으로 입증하여, 천여 년간 지속되어 온 생명의 기원논쟁에 종지부를 찍게 하였다.

오스트리아의 수도원 신부였던 멘델(1822-1884)은 완두콩과 분꽃을 이용한 실험으로 모계의 형질이 자손에게 유전된다는 사실을 실험적으로 밝혔다. 그가 수립한 유전법칙은 다윈의 진화론과 대립되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인정을 받지 못했으나 오늘의 생명과학은 그의 이론 위에 세워진 것이다. 독일의 슈라이덴, 슈반, 버효 등의 세포학자들도 "세포는 세포로부터 유래한다(cell from cell)"는 세포설(cell theory)을 확립하였다.

이처럼 오늘날의 생명과학 이론은 대부분 창조과학자들에 의해 기초가 잡혔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자들은 이러한 이론들이 흡사 진화론을 증거라도 하는 양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현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성경적 창조론(biblical creationism)은 스키너의 제목설(title theory)로 정리되었다. 즉 창세기 1장 1절은 1장 전체의 제목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창조론에서는 전통적으로 지구의 나이를 6천여 년에 문자적인 6일창조설을 신봉하고 있다. 그리고 창조과정은 두 단계로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창 2;3f)라는 창세기의 내용은 무에서 유(時空物)의 창조(bara, creation)와 6일간 질서를 부여하는 만듦의 과정(asah, make)을 내포한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창조론은 헵(1879-1950), 훽세마(1886-1965), 루터교의 피퍼(1852-1931) 및 안식교의 지질학 교사였던 프라이스 등으로 이어졌다. 프라이스의 영향을 받은 헨리 모리스는 창조론연구회(CRS:The Creation Research Society, 1963)와 창조과학연구소(ICR: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1973)를 설립하여 전세계적인 창조과학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현재 켄 햄이 주도하는 AIG(Answers In Genesis)를 비롯하여 130여 개의 창조과학 단체들이 활동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1년 필립 존슨은 '지적설계'(intelligent design)를 제창하고 진화론과 그 바탕이 되는 자연주의를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윌리엄 뎀스키와 마이클 베히 등에 의해 더욱 체계화된 이 이론은 자연과학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창조-진화논쟁을 사회과학의 무대로 확대시키고 있다는 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우리 나라에서는 세계복음화성회(1980)에서의 창조론 강의를 계기로 탄생한 한국창조과학회(1981)가 창조과학관 건립 등의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창조과학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이 밖에 창조사학회(1997)와 창조신학회(1999)도 활발한 학술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맺는 말

진화론은 무신론적이며 유물론적인 세계관으로서 조립, 조작, 사기 사건으로 점철되어 왔다. 유인원의 발굴 역사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는 나치의 만행을 포함한 수많은 역사적 범죄사건에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 앞에 진실한 참회나 반성 없이 그런 사건들을 학문의 발전과정에서 빚어진 해프닝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지금도 진화사상에 알게 모르게 오염된 많은 과학자들이 인류의 복지와 국익을 내세워 낙태수술과 인간 배아의 복제를 감행하려 하고 있다.

진화론의 사실 날조는 일본 동북구석기문화연구소의 후지무라(藤村新一) 부이사장이 자국의 고대사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가짜 유물로 역사를 조작했던 것과 유사한 상황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두 곳에서의 유물날조를 시인했지만(2000. 11) 일본고고학회에서는 20개소 이상의 날조사실을 확인(2001. 9)한 것으로 보도된 바 있다.

역사가들은 과거는 용서하되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참회가 없는 용서가 진화론자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더욱 비극적인 미래가 도래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마저 갖게 한다. 세계사는 이처럼 국수주의, 종교, 이데올로기, 진화론 등의 영향으로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잘못된 역사는 반드시 정사로 복원되어야 한다.

특히 동물이 인간으로 진화했다는 전제 아래 구성된 진화론적 시각의 문화사는 시급한 수정이 요구되고 있다.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 시대로 이어지는 역사기술이 전형적인 역사왜곡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창세기의 기록은 인간이 창조되면서 바로 목축과 농업이 시작되었고, 축성문화가 있었으며, 아담의 7대손 라멕 때에는 이미 지금과 같은 음악, 목축, 동철 문화가 있었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4-5천년 전에는 노아가 2만 톤이 넘는 방주를 건조하였고, 뒤이어 그 후손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드높은 바벨탑을 건조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최초의 인류문명이 매우 뛰어난 것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죄의 유입으로 홍수심판을 받아 모든 문명이 일시에 바닷속으로 수장되어 소멸하였다는 것이다. 그 후에 다시 신구석기의 문화가 출현하여 공존하면서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성경적 암시이다. 이토록 구체적인 성경의 기록을 무슨 이유로 굳이 외면하면서 인간의 상상력으로 과거사를 추리해 내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마음속에 하나님을 멀리 하려는 인간의 죄성에 기인함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진화론에 각별한 경계를 기울여야 한다. 진화론이 기독교계로 침투하는 것은 매우 교묘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들이 처음부터 무신론적 유물론의 모습으로 도전해 왔다면 기독교계는 놀라 합심하여 대항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유신진화론의 옷으로 갈아입고 우리에게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진화사상을 흡사 성경에 대한 해석의 일환인 양 신학의 형태로 침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구미의 많은 교육기관들이 이러한 사상으로 물들어 있는 것은 매우 우려할 상황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기독교계마저 진화사상으로 물든다면 세계의 복음주의는 암울한 미래만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 교계에는 현재 이러한 진화사상이 구미제국에서 공부하고 갓 돌아온 젊은 신학자들에 의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한국교계마저 유신진화론으로 물든다면 '진리의 기둥과 터'인 하나님의 교회는 머지 않아 설자리 마저 완전히 잃게 될 것이다. 여기에 창조과학운동의 중요성이 있으며 모든 교회교육에 창조과학 커리큘럼을 필수적으로 삽입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교계와 학계가 협력하여 유신진화사상의 침투에 대처해야 한다. 학계에서는 창조신앙에 입각한 이론의 정립과 진화론의 허구를 체계적으로 파헤쳐야 하며, 진화론자들을 비롯한 불순한 세력들에 의해 왜곡된 인류의 역사를 정사로 복원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아울러 신학계에서는 창조과학에 대한 신학적 정통성을 뒷받침해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복음전파의 수단으로 우리 나라에 설립되었던 미션계통의 연세, 이화, 숭실 등의 대학과 배재, 경신, 오산, 이화, 정신, 대광 등의 고등학교들이 지금은 생물과 지구과학시간에 진화론에 입각한 내용만 열심히 가르치고 있을 뿐이다. 반면, 창조과학은 거의 외면을 당하고 있다.

학교 당국의 행정책임자들이 현재의 상황을 이처럼 무관심으로 일관해도 되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도대체 교육부에서는 무슨 권한으로 우리 자녀들에게 무신론적 유물론인 진화사상만 가르치도록 강요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계가 집단적으로 항의라도 해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 아니면, 홈 스쿨링(home schooling)이라는 극단적인 처방까지도 검토해야 할 상황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1)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 verbal inspiration) : 성서의 한자 한자가 모두 하느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주장.  

  

출처 - 창조지, 제 131호 [2002. 5~6]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902

참고 : 5462|5461|5413|5272|5211|5210|5112|4766|4765|4636|4635|4542|4140|4039|3077|3426|3812|3244|3241|3041|3039|3037|3024|2864|2579|2359|2307|2114|2039|2016|1174|6107|6110

한국창조과학회
2004-07-26

진화론과 현대 발전 이론


     19세기 후반에 진화론은 영국의 철학자이며 사회학자인 스펜서(Herbort Spencer)의 노력에 의하여 좀 다른 형태로 출현하였다. 스펜서는 맬서스(Thomas Malthus)로부터 생각을 도출하여 다윈(Charles Darwin)과 같은 '적자생존(適者生存)'의 개념을 수정하면서 그 자신의 사회진화론을 그 자체의 조직 구조에 근거를 두었다. 스펜서의 진화에 대한 정의는 고전이 되었다.

"진화는 사물의 통합이며 운동에 부수하는 소실(燒失)이다. 그 기간 동안에 사물은 불명확하고 앞뒤가 맞지 않은 동질(同質)로부터 명확하고 시종 일관하는 이질(異質)로 변화하고, 보유된 운동은 평행적인 변형을 하게 된다"(Timasheff, 1964: 32).

콩트는 진화가 주로 도덕적 발달과 관념의 발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으며, 스펜서는 진화가 사회구조의 심층적인 전문화와 분화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콩트는 진화가 인간의 중재에 의하여 유도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사회의 과학적 지식은 도덕적 발전으로 귀착되며 계획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주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과 '사회위생학(social hygienics)'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반면에 스펜서는 '사회적 다원주의자(Social Darwinist)'라고 명명되었다. 그는 식물과 동물세계의 진화와 같이 '적자생존'의 원리가 사회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스펜서는 가난한 자들은 그들이 보다 덜 적합하기 때문에 가난하고, 반대로 부유한 자들은 부자가 될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상 스펜서 사상의 정치적 의미는 당시의 방임주의의 정치적 정책과 일치하였으며 현재의 철학적, 정치적 사상 속에도 존재하고 있다.

진화론은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도 때로는 미미하지만 계속 보급되었는데 특히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켐(Emile Durkheim)과 다른 사회학자들의 이론 속에 보급되었다. 진화라는 말을 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의 사회는 단순한 원시적 상태로부터 복잡한 현대적 상태로 발전한다는 논지를 포함시켰다.

사회발전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러한 일반 이론을 실제적으로 적용하면 이렇다. 가난하고 산업화되지 않은 사회는 진화의 원시적 단계를 나타내는 것이고, 반면에 산업화된 국가는 보다 복잡하고 개화된 단계와 관련되었다는 것이다. 보다 발전되고 복잡한 사회는 원시적(덜 발전된)사회가 결과적으로 도달하게 될 목표점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모든 사회는(비록 그 사회가 발전된 형태일지라도) 계속 발전적인 방향으로 진화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 기간 동안에 진화론은 다른 나라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드는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특히 식민지 사회의 노동력과 물적 자원을 자국의 산업화를 지원하는데 사용하는 반면에 식민지 사회는 전산업단계에 그대로 남아 있도록 하는데 활용되었다. 식민지 정부의 활동과 종교 전도사업은, 덜 개발된 사회의 사람들은 원시적이고 '퇴보적'이며 '미개'하므로 자신들의 사회가 횡단한 것과 같은 단일의 직선적인 진화의 길을 따라서 발전하도록 이들을 도와줄 필요가 있다는 가정에 기초를 두었다.

20세기초 '진화론은 발전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생각이 도전을 받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사회적 행위의 특별한 측면과 어떤 사회 발전의 수준은 그 자체 기원(起源)의 견지에서만은 효과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비평가들은 주장하였다. 즉 한 사회의 역사적 진화의 계속성을 가정할만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진화론에 대한 두번째의 비판은 그것이 사회적 변칙, 예를 들면 현대 산업화된 환경 속에서도 대단히 전통적인 종교의식(宗敎儀式)이 존재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을 항상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진화론자들은 이론에 맞지 않는 불규칙한 형태를 과거의 시대착오적 자취로서 설명하는 반면에 어떤 학자들은 사회 내에서의 그들의 기능적 상호관계와 실용의 측면에서 그것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진화주의에 대한 세 번째 비평은 점차로 지지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단일의 직선적인 성격에 관한 가정에 대한 것이었다. 이것은 특히 사회주의 국가의 출현으로 명백해졌다. 많은 비평가들은 진화론이 인과율(因果律)의 메커니즘과 변화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지 않았다고 느꼈다. 즉 이 이론은 사회의 상이한 진화단계는 기술할 수 있으나 한 사회가 한 단계로부터 다음 단계로 어떻게 이행되어 가는지에 관해서는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류의 필연적인 진보에 관한 가정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이 사건들은 사회가 발전해감은 물론 쇠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지적해 주었던 것이다.

 


출처 - 창조지, 제 130호 [2002. 3~4]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896

참고 :

John D. Morris
2004-07-26

진화론의 댐에 생긴 틈새가 넓어지고 있다.

(Cracks are widening in Evolution's Dam)


     지난 수십년 동안 공립학교 교실은 진화론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교과서에 있는 진화론 편향의 수많은 주장들이 허위라는 것과 심지어 어떤 것들은 새빨간 사기라는 것이 알려진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은 총체적 통제를 여전히 만끽하고 있습니다. 주(州) 교육법과 전국 교습(敎習)기준은 기원에 관한 과학적 이론을 다룸에 있어서 진화론에 대체할 수 있는 이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화론만을 배타적으로 교수하라는 지령을 내립니다. 진화론에 부합하지 않는 증거들은 교실 안에 도입되어서는 안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진화론에 반대하는 학생들은 동료 학생들 앞에서 모욕을 당하든가 등급사정 때 핍박받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사태가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진화론의 댐에 틈새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육계에 대한 진화론의 목조르기도 머지않아 곧 손을 놓고야 말 것입니다.

하지만 성급한 결론은 금물입니다. 성경적 창조이론은 공립학교의 과학수업에서 진화론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꿰찰 수는 없을 것입니다. 법정은 공립학교에서 '종교'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제어의 목소리가 단호합니다. 아무리 과거에 오랜 기간동안 공립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쳤지만, 아무리 미국의 머릿돌을 놓은 선조들과 나라의 교육체계가 창조론을 학교에서 가르치기를 소망하였지만, 오늘날의 기상조건 하에서는 창조론이 다시는 학교에 도입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기도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본래의 목적을 손상할 뿐입니다.

그러나 진화론도 또한 종교라는데 주목하여야합니다! 이 글에서는 물론이고 다른 세속적인 글에서도 그 사실이 극명하게 밝혀지고 있습니다. 진화론이라는 종교도 또한 학교에서 가르쳐서는 안 되기는 마찬가집니다. 미국의 과학교실에서는 다시 과학을 다루어야 합니다. 역사를 다루어도 안 되고, 과거에 대한 철학적(종교적) 이념을 다루어도 안 됩니다. 진화론의 기원의 이념 ━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라는 주제를 과학교실에서 다루지 말아야 합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동물적 본능으로부터 유발된다는 진화론의 도덕관이나, 인간생명을 천대하는 진화론의 인생관도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은 우리 학교를 송두리째 틀어쥐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학생들의 세계관도 큰 부분은 진화론의 영향하에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용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화론의 댐에 생긴 주요 틈새는 1999년 8월에 드러났습니다. 캔자스 주 교육위원회가 교육계의 '엘리트' 한 분으로부터 건네 받은 추천내용을 좇아 내놓은 새로운 교수안내 지침을 거부하는 투표를 하였던 때가 그 때입니다. 그 교수안내 지침 내용은 지난날의 것보다 오히려 더 진화론적이었습니다. 여러 명의 교수들과 교육자들, 그리고 관련된 시민들은 학교 이사진과 함께 새로운 안내지침을 제기하였던 것입니다. 그 새로운 안내지침이란 것은 학교 교습시간에 찬성과 반대의 증거를 같이 제기하여도 좋다는 허락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비평적 사고의 능력을 고양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안내지침이 채택되어 마침내 전 세계의 진화론자들로부터 빗발치는 비평을 유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곧 '전문가'들이 캔자스 주로 쏟아져 들어와서 진화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사들을 학교 이사회에서 제거할 것을 극구 주장하였습니다. 외부로부터 막대한 자금이 그 안내지침을 반대하는 이사들의 금고 속으로 흘러 들어갔던 것입니다. 뒤이어 11월에 진화론자들은 이사회의 통제를 탈환하고 결국 결정을 뒤집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캔자스 주의 학교들은 예전보다 더 진화론적으로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진화론의 댐에 틈새가 생겨 누수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 누수 틈새가 임시변통으로 땜질이 됐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뒤이어 다른 주와 다른 학교 이사회들이 과학교육을 개선하고 과학시간에 종교교습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심사숙고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이때 이래로 펜실베이니아주, 서 버지니아주, 루이지애나주, 아칸서스주, 미시간주, 캘리포니아주, 인디아나주, 워싱턴주, 앨라배마주, 코네티컷주, 하와이주, 그리고 아마 그 밖에 다른 주들에서도 중대한 노력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진화론자들의 패배가 결정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진화론을 옹호하기 위하여 집결한 열성분자들은 언제나 똑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창조론자들의 조직과 창조론에 대한 선교와 과학적 탐구는 계속 활기를 띠어 갔습니다. 특히 창조과학회(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는 진화론의 과학적 파산상태에 관해서 계속 사람들을 교양하면서 창조론을 강화해나갔습니다. ICR는 어떤 정치적인 조직체가 아님은 물론이고 학교 이사회에 대해 로비활동 따위는 더더구나 하지 않습니다. 또한 어떤 후보를 후원하려는 의도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가능할 때면 정보를 제공하고, 또 자문에 응합니다. 캔자스 주에서 그렇게 하였으며, 또 많은 주에서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육에 초점을 맞추자는 것이지 법제화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시민이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주의적인 진화론에 반대하는 이론적 근거들이 엄청나게 팽창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다 덜 '종교적'으로 개선된 교육을 원하는 욕구도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현상은 우리가 노력한 소산입니다.

물론 이 사역은 창조론자 조직이 혼자서 한 것이 아닙니다. 최근 이 일에 주요하게 참여한 사역자는 '지적 설계 (Intelligent Design)' 운동입니다. 이 단체는 특별히 고명한 과학자나 철학자를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기독교운동 단체라는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단호하게 반-자연주의자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들은 진화론이 의지하고 있는 종교 색을 띤 토대와 파탄 난 주장을 거침없이 폭로하고 있습니다. 많은 측면에서 이들의 이론은 주도면밀하게 비종교적이며, 또 훌륭한 과학교습을 창설하고 있기 때문에 공립학교 교습에 훌륭하게 부합합니다.

부가해서 말씀드리면, ICR는 지적 디자인 운동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들의 일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들은 공공연하게 크리스천임을 천명하는 과학자들입니다. 우리는 자연주의적 진화론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초자연적인 창조사역을 지지할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창조주이신 성경의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로 하는 인격적인 친교를 옹호합니다. 우리는 ID (지적 설계) 단체의 과업을 지지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과업은 한계가 있는 것으로 느끼고 있음을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비록 어느 누가 자연 속에서 디자인의 증거를 발견한다 해도, 그한테는 여전히 구주가 필요할 것입니다. ICR과 ID의 십자군운동 (개혁운동)은 하나같이 효과적이고도 중요합니다.

2002년 1월에 부시 대통령은 새로운 교육 법안에 서명하였습니다. 그 법안은 학생들은 생물학적 진화론을 지지하지 않는 증거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증거들을 배울 수 있어야한다는 특별 지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학생들은 이런 사안들에 관하여 어느 한 쪽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흉내 내지 않고 비평적 사고를 어떻게 하는가 하는 사고방법을 가르쳐야만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법안에 대해서는 Acts & Facts에 실린 본 사안의 Back to Genesis 장에서 토론되어 있습니다).  

오하이오 주가 이 새로운 연방법의 적용을 제일 먼저 기도하였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예전의 그 진화론의 부하들은 오하이오 주로 몰려와서 그 진저리나는 주장을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현재까지도 그 어떤 결론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합니다. 이제 이 사안의 진실한 본질을 인지하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진화론자들의 주장에서 그들의 열기와 거친 호통을 여실히 알았습니다. 그들은 진화론자들이 전문가인 체하는 말속에 진실을 갈파하였던 것입니다. 지도급 진화론자들은 모두가 무신론자들이든가 아니면 무신론자인체 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미국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사람들은 과학이라는 허울을 쓴 종교를 식상하고 있음은 물론, 보다 더 훌륭한 그 무엇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진화론 사상과 가정과 사회의 도덕에 끼친 진화론의 악영향을 비난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오하이오주의 창조론자들에게 불리하게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창조론자들은 실패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화론의 댐은 틈새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사태는 결코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 Dr. Morris is President of ICR.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pubs/president/prz-0205.htm

출처 - ICR President's Column, May 2002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703

참고 :

Douglas W. Phillips
2004-07-26

법과 규범은 진화하는가? 

(Do Laws and Standard Evolve?)


       모든 지적, 또는 문화적 투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가설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말의 뜻을 명확히 정의하는 자는 승리한다. 진화론과 성경의 창조론과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은 화석이나 유인원 차원 이상에 것에 관한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 논쟁이 관여하는 기본적인 전제들에 비추어 인생, 법률, 그리고 인간관계에 관련된 질문에 대답한다. 가장 중요한 논쟁의 주제는 지배권(Lordship)에 관한 싸움이다. 즉, 누가 주인인가? … 하나님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금세기(20C)의 대부분을 통하여 다윈의 진화론이 문화 투쟁에서 승리자로 부상하였다. 진화론은 미국의 생물학 교과서를 재구성하는 일을 훨씬 넘는 성과를 이룩하여, 쟁점 사항인 자연에 새로운 정의를 내렸다. 뱀이 하와에게 던졌던 질문, ”하나님이 말씀하시더냐?” 바로 그 질문을 다윈이 현대인들에게 물으면서 선언하기를, 권위의 궁극적인 원천은 인간이라고 부추겼다.

이로 인해서 초래된 결과는 가히 파괴적이었다. 기독교를 공공의 장에서 배제하는 일, 모태 안에 있는 9개월 짜리 제 자식을 죽이는 일, 그리고 동성결혼의 합법화를 공공연하게 토론할 수 있을 만큼 우리 사회가 타락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많은 크리스천들은 물론 이런 것들을 승인하지 않지만, 일단 수세에 몰리면 그들도 도덕이 정치의 본령이 아니라는 항의에 순순히 침묵하고 만다.

그와 같은 논쟁에 사회가 취할 대응방법은 다음의 3 가지 원초적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과 직결된다. (1) 인간은 도덕률을 입법화할 수 있는가? (2) 가능하다면, 어떤 규범에 따라서 입법화할 수 있는가? 그리고, (3) 그와 같은 규범은 진화하는가? 이 질문들이 그것이다. 이 질문들 하나하나에 대한 대답은 기원의 문제에 접근하는 태도 여하에 따라서 결정된다. 법률은 도덕적으로 중립이며, 인간 이성은 진리의 전권 결정자이다, 규범은 문화의 성숙도에 따라서 변한다는 화두를 가지고 다윈주의는 수많은 크리스천들을 설파하여 문화에 대한 성경적 기독교의 억제력을 무력화 시켰다. 많은 크리스천들은 진화론의 전제들을 정식으로 수용하기를 거부하지만, 그들은 그 이론이 근거하는 가정들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였다.

 

사람은 도덕률을 법제화할 수 있는가?

도덕률이 함축되어 있지 않는 법은 법제화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실질적인 질문은 과연 인간은 도덕률을 법제화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고, 도덕률의 어떤 체계를 법제화할 것인가에 있다. 모든 법률은 명시적으로 도덕적이든가, 아니면 어떤 확실한 도덕적 개념을 지향하는 절차이다. 심지어 교통 신호등을 규제하는 법규까지도 도덕률을 내포한다. 교통신호등의 목적은 사람들이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게 하여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교통신호등도 다음의 명제들을 도덕적 개념으로 전제한다. 즉, (a) 질서는 선이고 혼돈은 악이다, (b) 재산권은 존중되어야한다, (c) 생명은 보전되어야 한다, 이런 것이 그것이다. 이 하나 하나의 원칙은 기원에 대한 창세기의 규명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즉, (a) 당신의 사역을 '심히 좋았더라'(창세기 1:31)라고 선언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무질서의 창시자가 아니다(고린도전서 14:33), (b) 그는 사람으로 땅을 다스리게 하시며, 피조물에 질서를 마련하게 하사 재산권의 기초를 놓으셨다 (창세기 1:26), 그리고 (c) 그는 생명의 신성함을 합법적인 정부의 제1 원리로 정하셨다 (창세기 9:5, 6). 이런 명제들이 하찮은 신호등에도 그 기조를 이루는 무언의 도덕적 전제들이다.

물론 법률은 사람을 구원할 수도 죄를 씻을 수도 없다. 하나님은 민법으로 악행을 억제하려 하시지, 영혼구원의 원천으로 삼으려는 의도가 없다 (로마서 13:4). 아이러니컬하게도 실정법을 통한 인간구원을 주장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진화론적 인본주의자들이다. 인간의 문제는 상황적인 것이지 죄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진화론자들은 그 해결을 정부 차원에서의 계획이나 교육개선으로 도모할 수 있을 것으로 희망한다. 그런 세상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 국가가 참 구세주로 존경받을 것임은 당연하다 하겠다.

 

법제화가 준거하는 규범은 무엇인가?

인간이 통치에 적용할 수 있는 규범은 단지 두 가지뿐이다. 즉, 하나님의 법이 아니면 인간의 의지다.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은 이 두 규범들 사이에서 중간적인 바탕은 없다고 이해했다. 그들은 창조주에 대한 충성을 선언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초월적인 원리로서 법질서를 설정하셨음을 인정하였다. 우리들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창조주로부터 고유한 권한을 부여받았음을 자명한 진리로 확신한다.

이와 같이 선언하면서 독립선언서는 창세기의 기원설에 견고하게 근거하고 있는 서유럽의 1000년에 걸친 법의 전통을 미국의 헌장에 구현하였다. 수십년 동안 미국의 법학도들은 윌리엄 블랙스톤 경(Sir William Blackstone)으로부터 법 이론의 기초를 창세기에서 배워왔다. 블랙스톤의 영국 법률에 대한 논평(Commentaries on the Laws of England)은 미국 법학도의 주요 교재였다. 그의 논평은 법 연구의 접근방법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법이었다.


1. 블랙스톤 전통 (The Blackstone Tradition)

블랙스톤은 법에 대한 총체적 분석의 근거를 일반계시(자연)에 대한 특별계시(성경)의 우월성 위에, 문자적 24 시간으로 된 6 일간의 창조주간 위에, 문자적 아담과 그의 원죄가 인간이성의 타락을 결과한 이유 위에, 그리고 재산권의 법률적 근거로 온 땅을 다스리게 허락하신(Dominion Mandate) 창세기의 기록 위에 세웠던 것이다. 블랙스톤은 성경의 권위를 사회의 유일한 합법적 근거로 단정하고 법은 사회의 변화에 따라서 진화한다는 사상을 반박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은 법을 만들지 않는다. 그 대신에 사람은 법을 찾아낸다. 법은 대다수의 의지 이상의 그 무엇에 의해 정당화되어야만 한다. 법은 영원한 의(義)의 기초 위에 서야만 한다. … 이에서 정해진 원리를 우리는 계시된 법률이라, 또는 신성한 법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런 법률은 성경 속에서만 발견된다. … 그리고 만약에 우리 이성이 우리의 최초의 조상이 죄를 범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언제나 정욕에 의해 어지럽혀지지 않은 상태로 있고, 편견에 의해 흐려지지 않은 상태로 있고, 질병이나 방종에 의해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있다면, 우리 과업은 쉬울 것이다. … 그러나 사람마다 경험하는 자기 자신은 이에 역행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즉, 자기 이성이 타락하였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

계약, 재산권, 사범(私犯, 개인적 불법행위), 그리고 증거에 관한 기본적 관습법의 이론의 기원은 창세기의 처음 열한 장(章)들 안에 들어있다. 창세기는 하나님을 법의 부여자로(창세기 2:17) 명시하고 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의(義)와 자비의 의미를(창세기 3:15), 최초의 관례로서의 결혼의 취지를(창세기 2:21), 범죄자에게 속죄와 복원의 필요성을 (창세기 2:17, 3:17, 9:6), 성약(聖約)의 뜻을(창세기 9:12, 13, 15:18), 국가의 살인자 사형집행 관할권을(창세기 9:6), 가족의 자손양육권을(창세기 1;28), 가족에 대한 가장의 지휘권을(창세기 3:16, 18:19), 환경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창세기 1:31), 등등을 제정하신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법에 대한 블랙스톤의 명백한 창조주의적 접근의 엄청난 영향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작물은 대부분의 학교에서 무시되고 천대받았다. 미국변호사협회 저널(American Bar Association Journal)의 1978년 7월 판에서 역사학자 헨리 스틸 코매거(Henry Steele Commager)는 벌어진 이 일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진화의 법으로 대체해버렸다.'


 2. 법에 대한 '과학적' 접근 (The Scientific Approach to Law)

”19세기 한 세기 내내 진화론의 영향 하에서 역사, 법률, 그리고 정치경제와 같은 구시대의 학문들에는 철저한 변화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인류학, 사회심리학, 비교신학, 범죄학, 사회지리와 같은 새로운 학문들이 대두하였다 …” (Julian Huxley).

1000년을 이어온 크리스천 법의 전통은 1870년에 들어와 맥이 끊겼다. 그 해 하버드 법과대학 신임학장 크리스토프 콜럼버스 랑델(Christopher Columbus Langdell)은 법학교육에 진화론적 접근을 시작하였다. 특히 법에서 창세기적 근본을 버리고 다윈주의에 뿌리를 대고 있는 철학을 취하였던 것이다.

랑델은 관습법에서 기독교 원리의 전통적 교수법을 포기하고 새로운 '케이스 북 방법'을 택하였다. 케이스 북 방법은 꾸준히 진화하는 판사들의 의견들을 통하여 법을 찾아내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최초로 출판된 그의 '케이스 북'인 Cases on Contrasts의 서문에서 랑델은 과학과 법률, 그리고 동일과정설과의 사이에 개재하는 상호관계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과학으로 간주되는 법은, … 현재의 상태로 되기까지는 그 진전이 완만하였다. 환언하면, 법은 하나의 성장하는 생명체로서 많은 경우 신장하는데 몇 세기를 걸리기 일쑤였다. 법의 성장과정은 대체로 일련의 사건 사례들(cases)을 통하여 추적해볼 수 있다. 그런데 법 이론이 구현된 사건사례들을 연구하는 것이 법 이론을 통달하는데 유일한 방법이 아닌 이상, 많은 경우 가장 짧은 사례들의 연구가 최선의 방법이라 하겠다.”

법학자 허브 티투스(Herb Titus)는 설명하기를, ”랑델은 사건사례들은 법 이론들과 원리들의 '원천'이라고 믿었다. 사건사례는 법규를 탄생시켰다. 탄생된 법규는 완만하게나마 일련의 사건사례들을 통하여서 완숙한 법의 원리로 진화한 것이다”라고 했다. 랑델은 한 세기를 풍미하던 전통을 세웠다. 그 전통에 따라서 판관들은 스스로를 선재(先在)법을 해석할 의무에서 해방되었다고 내다봤다. 그들은 이제는 무슨 법을 적용할 것인가를 자력으로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랑델은 ”무슨 규범에 따라서 사람은 법을 제정하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인간의 자유이성을 지목하면서 대답에 대신하였던 것이다.

 

법률은 진화하는가? (Do laws evolve?)

랑델의 법의 진화설은 1765년에 블랙스톤의 Commentaries가 출판된 이후 유일하게 미국의 법률에 크게 영향을 미친 이론이었다. 케이스 북 방법이 출판된 이후 여러 해를 통하여 학자들과 법학자들은 진화론을 미국의 법체계에 통합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랑델의 주된 영향은 법률 교육에 분명하게 다윈주의 방법론을 도입하는 일이었으나, 법 이론에 진화론적 인본주의 형상을 갖추는 과업은 그의 후배 법학도들과 지적 후계자들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미합중국 대법원 판사 올리버 웬델 홈즈 2세(Oliver Wendell Holmes Jr.)는 누가 뭐라고 해도 20세기를 통틀어 최대의 영향력이 발휘하였던 독보적 법학자였다. 그의 묵중한 논문, The Common Law는 블랙스톤의 Commentaries를 법학도들의 입문교재의 자리에서 밀어내고 대신 들어앉았다. 홈즈는 "법의 생명은 논리가 아니고 경험"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법원은 법의 진화를 가르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옳고 그름은 절대적 의미로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판관들은 어떤 주어진 시점에서 진화하는 사회에 가장 적절한 규범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스스로 결정하여야만 한다고 설파하였던 것이다.

30여 년 간 홈즈는 그의 명백한 진화론적 편견을 법정에 도입하였다. 그는 지나가는 말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사람에게 개코원숭이나 한 톨의 모래알과 다른 의미를 부여해야할 이유를 모르겠다.”

지조 굳은 진화론자 홈즈는 '인간 생명을 신성시하는 것은 관할지역 밖에서는 효력이 없는 순전히 제한적인 이상에 불과하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Buck v. Bell에서 획기적인 결심을 피력하였다. 즉, 그는 버지니아 주정부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간주한 사람들에게 강제로 거세를 명령하는 우생학 법을 공포하였을 때 이를 지지 격려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퇴보한 후손들이 범죄로 사형집행 되기를 기다리는 대신에, 또는 그들이 기아로 저능인간으로 영락하게 내버려두는 대신에, 사회가 나서서 명시적으로 적절치 못한 자들이 후손을 이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세상을 위해 좋은 일임을 알아야 한다.”

홈즈와 그의 동료들은 임신중절의 합법화, 이유 없는 이혼, 동성결혼의 입법화, 그리고 헌법입안자들의 이상을 거부하는 헌법해석, 이런 목표를 위한 기초를 놓았던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법정은 헌법을 입안자들이 의도하였던 의미에 비추어 해석하여야 한다는 개념을 거부하고 진화론적 기준을 헌법해석에 적용하고 있다.

 

결론 (Conclusion)

악(惡)이 문화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있어서 진화론이 광범위한 호응을 얻는 일까지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그 이론의 배후에 있는 가정들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진화론과 창조론과의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은 그것이 주도권의 싸움이기 때문에 포괄적이다. 법의 원천은 언제나 문명의 참 주인이어야 한다. 법의 수여자는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규범은 절대로 진화할 수 없다(히브리서 13:8). 인간을 위한 주님의 도덕법은 그것이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의 불변의 속성을 반영하기 때문에 결코 변할 수 없다. 이 원리들의 특정한 적용은 문화와 문화와의 사이에서는 다를 수 있겠지만 원리 그 자체는 변화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도덕과 정치의 분리, 아동 권리, 과다인구, 환경주의, 동성결혼, 교육, 극형, 형법체계의 목적, 이런 문제들에 관한 논쟁은 창세기에 근거하여 토론을 펼쳐야만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은 창세기 말씀으로 무장하고서만이 권위를 가지고 오늘날의 문제들을 명료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Douglas W. Phillips, Esq., is an attorney and adjunct professor of apologetics at ICR.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pubs/imp/imp-303.htm

출처 - ICR, Impact No. 303, 1998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90

참고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26길 28-3

대표전화 02-419-6465  /  팩스 02-451-0130  /  desk@creation.kr

고유번호 : 219-82-00916             Copyright ⓒ 한국창조과학회

상호명 : (주)창조과학미디어  /  대표자 : 오경숙

사업자번호 : 120-87-70892

통신판매업신고 : 제 2021-서울종로-1605 호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26길 28-5

대표전화 : 02-419-6484

개인정보책임자 : 김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