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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창조신앙

Dr. Henry F. Schaefer, II
2006-08-09

과학자와 그들의 하나님 2

 : 과학자이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가능한가?

(Scientists and Their Gods; Science and Christianity : Conflict or Coherence?)


7. 과학은 근본적으로 시행착오를 포함하고 있다.

나는 몇몇 수학자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한 풍자만화 속에 나오는 수학공식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만화 속에 있는 의표를 찌르는 대사는 적절하다. 한 등장인물이 다음과 같은 말한다. "가장 우울한 것은 우리가 믿고 있는 모든 것이 몇 년 이내에 틀린 것으로 증명될 것 같다는 거야.” 이 말이 내가 연구하고 있는 양자화학(quantum chemistry) 분야에서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러나 여기에 과학에는 시행착오적인 요소가 내재해 있다는 진리가 숨어 있다. 과학은 더 정교해 지면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크리스천인 패러데이나 맥스웰을 존경하지 않는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패러데이나 맥스웰이 내린 종교적인 결정은 촌스러웠다. 그래서 동시대의 능력있는 과학자들을 파괴하고 혼란스럽게 했던 사회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회피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은, 맥스웰이나 패러데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다른 동료 과학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알콜중독, 바람피우기, 사회적 지위 차지하기 등과 같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8. 유기 화학자들

윌리암 헨리 퍼킨 (William Henry Perkins)

여기에서 몇 명의 유기화학자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것은 나의 동료들에게 내가 유기화학에 조금 신경썼다는 것을 알게해 줄 것이다. 윌리암 헨리 퍼킨은 아마도 최초의 위대한 유기합성 화학자일 것이다. 최초로 인공 염료를 합성했고, 런던 왕립학회의 퍼킨 회보(Perkins transactions)라는 이름이 붙게 된 그 사람이다. 퍼킨은 1873년 35세의 나이에 아주 이윤이 많이 남는 그의 사업체를 팔고, 개인적인 연구와 교회의 선교 사업으로 돌아갔다.


죠지 스토크스 (George Stokes)

내 분야에서 가장 좋은 학술지인 화학물리 잡지(Journal of Chemical Physics)의 어떤 호에서든지 죠지 스토크스에 대해서 읽을 수 있다. 최근에 가간섭성 반스토크스 라만 분광법(Coherent Anti-Stokes Raman Spectroscopy)가 논의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그는 분광학(spectroscopy) 분야에서 위대한 개척자였고, 액체와 형광 물질에 대해서 연구했다. 그는 50년 이상 학계에서 가장 구별되는 위치인 캠브리지 대학 수학과의 루카시안 교수직(Lucasian Professorship)을 맡았다. 이 교수직은 아이작 뉴턴과 스티븐 호킹이 맡았던 자리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런던의 왕립학회에서 회장직을 맡았었다.

그는 자연신학과 같은 유기화학 이외의 분야에서도 저술을 남겼다. 기적이라는 주제에 관해서 스토크스는 말했다.

"개인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라. 그러면 그 즉시 기적의 가능성은 따라온다. 자연법칙이 그의 의지에 따라 시행된다면... 자연법칙을 시행하신 이가 그 법칙들의 적용도 멈출 수 있다.”


윌리암 톰슨 (William Thompson)

윌리암 톰슨은 나중에 켈빈 경(Lord Kelvin)으로 알려지게 된다. 톰슨은 환상적인 과학자였다. 그는 그 당시 앞장서가는 물리학자로 그리고 우수한 과학 교사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의 전자기학과 열역학에 관한 논문들은 그가 과학자로서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증거물들이다. 그는 하나님과 성경 안에 강한 믿음을 가진 기독교인이기도 했다.

"자유로운 사고자임을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한다면 과학에 의해서 하나님을 믿게 될 것이다.” 

톰슨 (J. J. Thompson)

J. J. 톰슨은 1897년 전자(electron)를 발견하였다. 그는 캠브리지 대학의 물리학 캐번디쉬 교수였다. 오래된 캐번디시 연구소 건물은 캠브리지 대학의 한 가운데 있었다. 이 건물에서 역사적인 발견이 너무나 많이 이루어 졌기 때문에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건물에서 15개의 노벨상이 나왔다. 이 건물 출입문 위에 라틴어로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잠언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새로 지은 캐번디시 연구소 건물은 교외에 있다. 그러나 새 건물에도 이 성경 구절이 여전히 새겨져 있는데, 영어로 되어 있다.

J. J. 톰슨은 네이쳐 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과학적 업적의 봉우리들은 그곳에 올라가는 자들에게 보다 광대한 전망과 함께 과학의 모든 발전에 의해서 드러나고 있는 진리의 깊이를 느끼게 해준다. 주의 솜씨는 정말로 위대하다.”


9. 이론 화학자들

찰스 쿨슨 (Charles Coulson)

찰스 쿨슨은 분자궤도 이론을 구축한 세 명의 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지만, 상을 받기 위한 첫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노벨상을 받기위한 첫 단계는 65세가 되도록 살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시험은 30대에 매우 중요한 업적을 남겼어야 하는 것이다. 클슨은 30대에 매우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64세에 죽었다. 그래서 상을 받지 못했다.

쿨슨은 오랫동안 옥스포드 대학의 수학과 교수였으며, 감리교의 평신도 사역자이기도 했다. 그는 과학자 세계에서 기독교인들을 위한 대변자였고 'God for gaps' 이라는 신학책을 썼다.

왕립협회에서 쿨슨의 사후 전기 집필를 위한 메모에서, 그가 1930년에 20세의 캠브리지대학 학생으로서 예수님과 대화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쿨슨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었다.

"하나님을 찾았던 수십 명의 학생들이 하나님을 만났다. 나는 내 생애 최초로 하나님께서 내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하는 분이셨다. 내가 전에 전혀 상상도 못한 방법으로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때에 드린 기도는 그 날의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인생은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 목적은 모든 것들을 아름다운 색으로 입혀버린다.”

쿨슨의 경험은 내가 버클리 대학에서 가졌던 때의 경험과 매우 비슷하다. 하늘에서 천둥이 울리고, 하나님이 내게 들을 수 있는 말로 말씀하셨고, 그리고 그것이 내가 크리스천이 된 이유였다면 멋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그러한 식으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쿨슨이 말하고자 하는 관점과 같은 관점을 갖게 되었다. 각자의 삶은 목적이 있다는 것과 삶의 색깔은 더욱 생생히 살아난다는 느낌 말이다.

쿨슨의 뒤를 이어 이론 화학자로 옥스퍼드에 온 사람은 나와 좋은 친구가 된 노만 마치(Norman March) 였다. 그 역시 감리교 평신도 사역자였다.

미국 과학자 협회의 멤버이고, 카네기 벨론 대학의 오토스턴 교수인 로버트 그린피스(Robert Griffith)는 1984년에 열역학과 물리학적 과정에 대한 업적으로 미국 물리학회가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 ‘오늘의 물리(Physics Today)’라는 잡지는 그가 복음주의적 기독교인이며, 아마추어 신학자이며, 기독교와 과학이라는 강좌를 가르친다고 소개했다. 그는 최근에 말했다.

"우리가 토론을 하기 위해 한 무신론자가 필요하다면, 나는 철학과로 가겠습니다. 물리학과에는 그런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버클리 대학에서 55명의 교수 중 나의 좋은 친구인 밥(Bob) 한 명만 공개적으로 무신론자라고 선언했다. 밥과 나는 요즘도 영적인 문제에 관해서 토론을 한다.


리차드 부브 (Richard Bube)

여러 해 동안 부브는 스탠포드 대학의 물질과학과(material science) 학과장이었고, 반도체를 이론적으로 정리해서 고체상태 물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부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학자들 중에서 무신론자의 비율은 트럭 운전자들 중에서 무신론자의 비율과 비슷하다.”


존 수페 (Jphn Suppe)

그는 미국의 과학 협회 회원이고, 프린스톤의 지질학 교수이며, 판구조 이론의 전문가이다. 그는 기독교인 교수로서 하나님을 찾는 긴 여정을 시작했다. 그는 프린스톤 채플의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성경을 읽고 다른 기독교 서적도 읽었다. 그는 예수님께 헌신했으며, 타이완에서 예수 믿는자로서 처음으로 중국인과의 교제를 통해 예수님과의 교제를 경험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기독교인이 아닌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인을 만날 때 논쟁을 시작하려고 한다. 그것은 정말 잘못된 일이다. 만일 과학자들이 매일의 생활에서 어떤 문제(교만, 자기중심적 야망, 질투 등)들을 겪는다면, 그 문제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스스로 돌아가심으로써 해결하려고 했던 문제들이다. 과학은 자기 고집과 자아가 강한 사람들로 가득한 분야이며, 서로 갈등을 일으킨다. 복음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과학자들에게도 똑같이 필요하다. 진화론은 근본적으로 주의할 필요가 있는 이론이다. 만일 인생에서 의미를 찾고 싶다면 진화론에서는 그 답을 찾을 수 없다. 나는 진화론을 가지고 말하면서 삶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비기독교인을 결코 만나본 적이 없다.”


찰스 타운스 (Charles H. Townes)

금세기의 과학자를 추천하라고 하면 나는 이 사람을 뽑을 것이다. (물론 그는 내 친구이며 따라서 내게 약간의 편견이 있을 수 있다). 그는 레이저를 발견함으로서 상당히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그는 별들 사이의 공간에서 분자를 발견함으로써 두 번째 노벨상을 탈 뻔했다. 그는 '파동 만들기(Making Waves)'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썼다. 그 책 이름은 파동의 성질을 지닌 레이저를 두고 말장난을 한 것이다. 이 책에서 한 구절을 인용해 보자

"당신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에 하나님이 어디에 들어올 곳이 있느냐고. 나에게는 그것이 아무 의미 없는 질문으로 보인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믿는다면, 어떤 특정한 장소가 문제 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있으시고, 어디에나 계신다. 하나님은 매우 개인적으로 만나주시는 분이지만, 또 온 우주에 계시는 분이시다. 나의 힘의 원천이시고 나에게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셨다.”

현재 80세이지만 타운스는 여전히 버클리에서 활발한 연구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아서 샬로우 (Arthur Schawlow)

샬로우는 1981년에 노벨상을 탔다. 스탠포드에서 근무하며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 자부하고 있다. 그는 아래와 같은 특별한 선언을 했는데, 나는 과학자만 이런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성경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그리고 특히 신약이 그렇다. 신약은 가까이 오셨던 하나님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사람의 용어로 말해주고 있다.”


알란 샌디지 (Alan Sandage)

카네기 대학에 있는 세계적으로 위대한 관측 천문학자인 그는 스웨덴의 왕립 아카데미에서 10만불이라는 상금을 받았을 때(노벨상을 탔을 때), 뉴욕타임즈에 의해서 우주론의 증조 할아버지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본질은 과학의 어떤 부분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성경을 보아야 한다.”

어떤 책에서 그는 고전적인 질문을 한다. "사람이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는 스스로 대답한다. '할 수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다” 유대인의 혈통으로 샌디지는 50세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거야말로 이미 늦었다라는 말은 맞지 않다는 증거이다.

이 사람은 우주의 나이에 대해 가장 정확한 값을 구해야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명석한 우주과학자는 어떻게 과학자이면서 기독교인이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우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생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세계는 너무도 복잡하게 상호 연결되어있다. 이것들이 모두 우연적으로 생겨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생명체의 존재와 모든 생명체 안에 있는 놀라운 질서들이 너무도 정교하고 조화롭다는 사실에 놀라울 뿐이다.”


윌리암 필립스 (William Phillips)

오늘날 물리학에서는 훨씬 어린 나이에도 노벨상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필립스는 50세도 안되어서 상을 받았다. 그는 원자를 레이저로 잡아서 식히는 과정에 대해서 상을 받았다. 노벨상을 탄 후 열린 기자회견석에서 그는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안에 살기에 그리고 탐색하기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세계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뉴욕 타임즈 기사에 의하면 "필립스는 페어해븐 감리교회에서 복음성가 찬양단을 만들어서 찬양을 하고 있고, 메릴랜드의 가이더스버그에서 300명 정도 규모의 다인종 목회를 섬기고 있다. 그는 주일학교 선생님이며, 성경공부를 인도하기도 한다.” 만일 그 글을 계속 읽는다면 필립스가 매주 토요일 오후 부인과 함께 워싱톤 D.C.에 가서 87세 된 흑인 할머니가 장을 보도록 돕고 저녁을 같이 한다는 것도 읽게 될 것이다.


데이비드 콜, 그리고 프란시스 콜린즈(David Cole & Francis Collins)

나의 전문영역이 물리와 화학의 중간지대이기 때문에, 나는 생물 분야에 대해서 별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오랫동안 동료로서 가까이 지낸 버클리 대학의 생명화학자 데이비드 콜이 있고, 낭포성 섬유증(cystic fibrosis)의 개척자였고 과학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인 게놈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던 프란시스 콜린스가 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공공연히 기독교인임을 이야기하고 다닌다.


10. 물리학자 중에서 무신론자는 왜 그렇게 적은가?

많은 과학자들은 그들 앞에 보이는 사실에 대해서 고민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현재와 같은 물질들의 배치는 아주 특별한 초기 조건을 요구한다” - 폴 데이비스(Paul Davies)

"사실 만약에 가능한 상수들과 거기서 유도될 수 있는 법칙들을 생각해 보면 우주가 우리를 있게하는데 방해되는 요인들은 감당할 수 없을만큼 많다.” -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일반 상식으로 사실들을 해석해보면 정말로 초월적인 지적 존재가 물리, 화학, 생물에 대해서 뭔가 했다고 생각된다. 자연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눈먼 힘은 없다.” - 프레드 호일(Fred Hoyle)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로마서 1:20)


11. 왜 진행 중인 전쟁이라고 볼까?

내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아직도 현재 과학과 기독교 사이에 전쟁이 진행 중에 있다고 생각할까? 나는 진행 중인 토론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사실이 이렇다고 생각한다. 각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그 사람이 과학에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와 상관이 없다. 

왜 어떤 사람은 이것이 전쟁터와 같다고 생각할까? 적어도 부분적으로 말이다. 나는 솔직하게 말해서 이것은 잘못 표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앤드류 딕슨 화이트(Andrew Dickson White)는 코넬 대학의 첫 총장이었다. 코넬 대학은 미국에서 철저히 세속적인 원칙에 의해서 세워진 첫 학교이다. (다른 모든 학교들은 기독교적 기초에서 세워졌다.) 그는 1896년에 매우 유명한 책인 "과학과 신학사이의 전쟁사(The History of the Warfare of Science With Theology)”를 썼다. 일부를 인용해 보자.

"존 칼빈(John Calvin)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을 저주함으로써 창세기에 대한 해석에서 선두주자였다. 그는 시편 93편을 인용하면서 질문하였다. ‘누가 감히 성령의 권위 위에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의 권위를 놓는가?’”

(이러한 인용은 존 칼빈에 대해서 별로 좋은 인상을 주지 않는다) 이 이야기 뒤에 진짜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살아있는 사람들 중 칼빈(Calvin)에 대해 가장 전문가인 옥스퍼드 대학의 브램톤 교수인 알리스터 멕그래스(Alistair McGrath)는 최근 권위있는 칼빈의 전기를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이 문제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칼빈이 이러한 주장은 과학과 종교에 관한 책을 쓰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여러번 반복되면서 경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양철학사(History of Western Philosophy)를 쓴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 같은 사람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칼빈이 원래 창세기에 대해서 그런 글을 쓴 적이 없다는 것을 밝힐 필요가 있다. 그의 주장은 입증되지 않은 19세기 글들에서야 특징적으로 보여지기 시작한다.”

칼빈에게 직접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어떻게 생각했느냐고 물어보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답을 알 수 없다. 칼빈은 아마도 코페르니쿠스를 알지도 못할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라는 이름은 1520년 대에 프랑스나 스위스에서 들어볼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프랑스어로 번역한 신약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고, 이것들이 의미하는 모든 것들과 함께 그를 알아가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정지해야 되고,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12. 결론

나는 독자들에게 과학의 역사를 약간 맛보게 하고 싶었다. 대학 일학년 때에 화학 과목이나 물리 과목을 수강한 사람들은 여기서 거론한 많은 사람들의 이름에 친숙할 것이다. 사실 내가 이 강연을 준비한 이유는 그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수업을 가르쳤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 과학자의 전통은 매우 뿌리가 깊다. 내가 한 일도 충분히 중요해서 나도 내가 이야기했던 사람들과 같은 부류에 들어가기를 희망한다. 나는 또한 여러분들에게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충분한 증거를 제시했기를 희망한다.

 


*참조 : 위대한 창조과학자들 (List of great Creation Scientists)
http://crev.info/?scientists=index


번역 - 김은숙

링크 - http://www.irr.org/schaefer1.html 

출처 -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436

참고 :

Dr. Henry F. Schaefer, II
2006-08-08

과학자와 그들의 하나님 1 

: 과학자이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가능한가?

(Scientists and Their Gods; Science and Christianity : Conflict or Coherence?)


     “헨리 셰퍼 박사는 그래함 퍼듀 대학의 화학과 교수이며, 조지아 대학의 컴퓨터 양자화학 센터의 소장이다. 그는 노벨상 후보로 5차례나 추천 된 적이 있으며, 최근 그의 연구 논문들이 인용되는 회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화학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나 자신에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바로 이렇게 하신 거란 말이지"라고 말할 때에 과학을 하는 진정한 의미와 기쁨이 찾아 온다. 나의 목표는 하나님의 계획의 작은 한 구석을 이해하는 것이다.” - U.S. News & World Report, 1991년 12월 23일


1. 이 강연이 만들어진 내력 (The Genesis of This Lecture)

나는 1983년에 대학 일학년생들에게 화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550 명 정도 들어가는 대형 강의실에서 강의했다. 강의 첫날 아침에 680 명이 앉아 있었다. 강당은 꽉 차 있었다. 규모가 큰 대학에서 일학년 화학 강의를 해 본 사람이라면 그 강좌에 대해서 만감이 교차하게 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나는 680 명이나 되는 사람 앞에서 얘기를 해 본적이 없었고, 좀 걱정이 되었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위해 환상적인 시범을 준비했었다. 버클리의 강의실은 앞의 강단이 세 부분으로 되어 있고 돌아가는 무대같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강의가 시작 되기 몇 시간동안 이라도 작업을 해서 강의할 때 쓰게 될 부분에 모든 것을 준비해 놓을 수 있었다. 나를 도와주던 로니 마틴은 버클리의 모든 화학 시범을 맡은 사람이었고, 벤젠, 철, 수은, 에틸 알콜 등 여러 가지 물질을 10몰씩 준비하고 있었다. 강의의 적절한 순간에, 멋진 최고의 정점에서 내가 스위치를 누르면 무대가 돌아가서 로니가 10몰씩 되는 여러 가지 물질과 함께 나타날 계획이었다. 학생들은 이 모든 물질들에서 공통점은 바로 각각의 물질들이 같은 분자수만큼 있다는 점을 알게 되면서 굉장한 직관을 가지게 될 터이었다.

그 시범은 매우 멋질 것으로 기대 되었다. 마침내 강의 중 내가 “로니, 보여주세요” 라고 말하는 순간이 왔고 무대를 회전시키기 위해 내가 스위치를 눌렀다. 그런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로니가 아직 준비가 덜 되어서 무대가 회전되지 않도록 해 놓았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무척 난처한 상황이 되었다. 680 명의 학생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전혀 준비되지 않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가 기다리는 동안 어제 아침 교회에서 일어난 일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나는 필사적이었다. 학생들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신입생들은 대학 화학 시간에 많은 기대들을 하고 출석했겠지만, 교회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전혀 예상못했을 것이었다.

나는 계속했다. “어제 주일학교에서 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학생들의 호기심이 더욱 커졌다. 나는 교회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680 명이나 되는 이 대형 강의를 맡는 것에 대한 사기를 북돋아 주거나, 영적으로 격려해 준다거나 하는 어떤 무엇인가 지지가 있기를 바랬었다. 그러나 전혀 받지 못했다. 사실 주일 학교 선생님은 반학생들에게 내 체면을 세워 주면서 질문하였었다. “길 가운데 누워 있는 죽은 개와 길 가운데 누워 있는 죽은 화학 교수와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학생들은 모두 흥분해서 내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까지 기다리지도 않았다. 학생들이 웃는 소리로 강의실이 떠나갈 것 같았다. 길 가운데 누워 있는 죽은 화학 교수라는 생각 자체가 그들에게는 너무나 엉뚱했다. 나는 그들 중 몇 명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으리라고 확신한다. “만일 이 교수가 학기말 시험 바로 전에 죽어서 누워 있는 그 교수가 된다면, 우리는 학기말 시험도 보지 않고 낙제 없이 이 강좌를 패스할거야. 그렇게 되면 정말 신나겠는데”

나는 학생들에게 “길 가운데 누워 있는 죽은 개와 길 가운데 누워 있는 죽은 화학 교수와의 차이는 바로 개 앞에 자동차 바퀴자국이 나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은 아주 좋아했다. 분위기가 다시 정리되면서 나는 무대 스위치를 눌렀고, 로니가 같은 몰의 화학물질들과 함께 나타났다. 대학 일학년 화학 강의 경력으로는 멋진 시작이었다.

약 50명의 학생이 수업 후에 질문하러 다가왔다. 절반 정도는 “수강 신청 카드의 어디에 표시해야 하나요?”와 같은 일반적인 질문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 정도는 같은 내용을 묻고 있었다.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어제 교회에서 뭘 하고 있었어요?”라고 물었다. 특히 한 학생은 말했다. “제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작년에 고등학교에서 저에게 화학을 가르친 선생님이예요. 그 선생님은 화학자로서 생활하면서 어떤 형태로든 종교적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어요.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는 그때 그다지 오래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학생들은 앞으로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계속 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이것이 이 강연의 시작이 되었다.

나는 이 강연을 버클리와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많이 되풀이 했다. 몇 년 전 조지아 대학으로 옮긴 후, 이 강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더욱 커졌다. 교수진 중에서는 대학 본부에 불평을 하기도 했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흥미롭던 기간이었다. 미국 남동부 지역에서 가장 큰 신문인 아틀란타 저널(The Atlanta Journal and Constitution)이 내가 이 강연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지지하는 편집자의 글을 게재하면서, “광신자들이 그들의 생각을 널리 알리는 것에 대해서는 엄격한 통제가 필요로 한다”라고 썼다.


2. 과학과 기독교의 관계에 대한 전망

과학과 기독교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이 질문을 가능한 한 광범위하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자. 과학과 다른 지적 추구 사이의 관계는 항상 쉬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과학과 기독교 사이에 극심한 다툼이 있어왔다고 느끼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전체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수잔 갈라거(Susan Gallagher)와 로저 루딘(Roger Lundeen)는 최근의 문학 교과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최근의 역사에서 문학은 과학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문학에 대한 현대적인 관점을 이해하려면 문학에서 과학이 지배하는 정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몇 세기 동안 과학자들은 서양 문화에서 진리에 대한 기준을 세워 왔다. 그리고 사실들을 조직화하고, 분석하고, 다루는 과학자들의 능력은 부정할 수 없어서, 현대 사회에서 전례를 볼 수 없는 중요성이 과학자들에게 부여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모든 사람이 좋아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위대한 낭만파 시인인 존 키이츠(John Keats)는 아이작 뉴턴의 사실(reality)에 대한 관점을 좋아하지 않았다. 키이츠는 신화와 시적 환상이 사라진 세계는 황무지와 같고 배타적인(누구라도 방문하고 싶지 않은) 장소가 될 것이라고 염려하였다. “라미아(Lamia)”라는 시에서, 그는 이러한 파괴적인 힘을 논의하고 있다. 그 시에서 그는 “과학(science)”을 “철학(philosophy)”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아래의 시에서 시인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하기 위해 나는 철학이라는 단어를 과학으로 바꾸었다.

“모든 매력은 날아가 버리지 않는가
과학이 잠시 손댈 때마다

하늘에는 한 때 경이로운 무지개가 있었다.
우리는 무지개가 내는 소리와 그 구조를 알게 되었다.
이제 무지개는 일상 속에서 흔한 물건들의 빛 바랜 목록이 되었다.

과학은 천사의 날개를 잘라버리고
법칙과 선들로 모든 신비를 정복해 버렸다.
유령이 떠도는 대기와 난쟁이의 마음을 비워버렸고
무지개의 올을 풀어버렸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과학과 다른 모든 지적 활동 사이에는 논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과 기독교 사이에 약간의 논쟁(갈등)이 있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3. 과학은 신의 부재를 증명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신의 부재를 증명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다. 루이스(C. S. Lewis)는 ‘기쁨으로 놀라며(Surprised by Joy)’ 라는 자서전적 글에서 이 선언을 믿었었다고 말한다. 그는 어린 시절 무신론자였다고 말하며, 그렇게 된 것은 과학 때문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가 쓴 글을 인용해 보자.

“나의 무신론(atheism)은 과학과 과학이 발견한 것들을 믿음으로 근거해서 형성되었다는 것을 당신은 이해해야한다. 과학자가 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사실 과학적 권위들에 대해서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면 누군가가 신의 부재를 과학이 증명했다고 그에게 말했으며, 그는 과학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었다는 것이다.

좀 더 균형잡힌 견해는 과학에서 나의 우상인 사람들 중 한 사람인 어윈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에게서 볼 수 있다. 그는 파동역학(wave mechanics)의 창시자이며,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식인 슈뢰딩거 방정식(Schrodinger's equation)을 만든 사람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현실 세계에 대한 과학적 그림이 결점 투성이라는 사실에 무척 놀라게 되었다. 과학은 사실적인 정보들과 우리의 경험을 놀랄만큼 일관성 있는 질서 안으로 이끌어준다. 그러나 모든 것들에 대해서 혐오스러울만큼 침묵을 지키고 있으며, 진실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과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는 것이 없다. 과학은 빨갛거나 파란 것, 쓰거나 단 것, 신체적 고통이나 즐거움 등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으며, 아름답거나 추한 것, 선과 악, 하나님과 영원 등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과학은 가끔 이런 영역에 대해서 답을 가지고 있는 척 하기도 하지만, 그 답들은 너무도 어리석어서 우리는 그 답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들을 만들어 낸다. 또한 과학자들은 종교에 대해서 흥미있는 이야기들을 하기도 한다. 아래의 글은 ‘화학(Chemistry)’이라는 잡지에서 인용하였는데, 이 잡지는 영국의 화학계통 전문인들에게 ‘타임(Time)’ 지와 같은 위치를 차지하는 잡지이다. 과학 정책에 대한 새로운 책을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하나님께서 정부에 하늘과 땅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 과제를 신청한다면, 다음과 같은 이유로 거절당할 것이다

.그의 기획은 너무 야심차다.
.그의 이전 연구에 대한 기록이 없다.
.지금까지 그의 실적은 책 한 권뿐이며, 심사과정이 있는 학술지에 논문이 실린 적이 없다.
.그는 가장 강한 경쟁자와 공동연구하는 것을 거절한다.
.하늘과 땅에 대한 그의 기획은 전혀 구체적이지 못하다.“


4. 우주의 지존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대신한 대안들

레프 란다우 (Lev Landau)

나는 두 명의 무신론자를 소개하고 싶다. 금세기에 소련에서 가장 명석한 레프 란다우가 첫 번째 사람이다. 그는 동료인 리프쉐츠(Lifchets)와 함께 유명한 책을 많이 썼다. 나는 사실 내가 MIT에서 학생으로 공부할 때, 이 중에 몇 권을 공부했다. 이것은 그의 친한 친구이자 전기 작가인 콜로트니코프(Kolotnikov)에게서 들은 란다우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것은 란다우의 최후에 관한 이야기로 ‘오늘날의 물리학(Physics Today)’에서 나타나있다. 콜로트니코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란다우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가 수술 받은 직후인 1968년이었다. 그의 건강은 많이 상한 상태였다. 나와 리프쉐츠는 병원으로 불려갔다. 우리는 실질적으로 그가 회생할 가망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란다우는 그의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누워있었다. 그가 나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머리를 돌리더니 말했다. “콜라트, 나를 구해주게” 그 말이 내가 란다우에게서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그날 밤 죽었다.“


찬드라세카르 (Chandrasekar)

찬드라세카르는 유명한 천체물리학자이다. 그는 1983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는 오랫동안 시카고 대학의 교수였다. 그의 전기 뒷부분에는 그가 인터뷰한 내용이 나와있다. 찬드라세카르는 말했다.

“사실 나는 나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실망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희망했던 만족스럽고 평화로운 삶은 목표만을 추구한 결과로 아직도 대부분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기 작가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뭐라고요?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과학연구의 한 길에 몰두해서 위대한 성공과 함께 자연과 자연의 조화로움을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된 후에도 불만족스럽다고 느끼신다는 뜻입니까?”

찬드라세카르는 진지하게 계속 말했다.

“나는 정말로 만족스러운 느낌이 없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이룬 것은 사소한 일로만 보입니다.”

전기 작가는 누구나 그런 느낌을 어느 정도는 가지지 않겠느냐고 얘기하면서 대화의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했다. 그러나 찬드라세카르는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런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다른 사람이 경험한 사실이 한 사람이 경험하고 있는 사실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그것 때문에 덜 개인적인 것이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찬드라세카르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나 개인의 경우에 진실은 내가 어릴 때 희망했던 조화로운 느낌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난 50년간 열심히 과학자로서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에 바친 시간은 너무도 적었습니다.”


5.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가능한가?

그래서 내가 검토해 보고 싶은 질문은 버클리에서 내가 가르치는 일학년 화학수업 후에 한 청년이 내게 했던 질문이었다.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기독교인일 수 있나요?” 분명히 그 학생과 그의 고등학교 선생님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스노우 (C. P. Snow)

특별히 종교적인 성향이 없는 두 사람을 인용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스노우(C. P. Snow)는 ‘두 문화(Two cultures)’라는 책으로 유명해진 사람이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물리화학을 연구했다. 그는 과학자로서 길을 가는 중에 글쓰는 재능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 소설들은 영국의 대학 생활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특별히 “거장들(Masters)'이라는 제목의 글을 추천하고 싶다. 스노우는 글을 쓰면서 상당히 부유해졌고, 문학과 과학의 중간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출판 당시에 매우 유명했던 두 문화에 대한 책을 썼는데, 여기서 두 문화란 ‘과학(sciences)과 인간성(humanity)'이다. 그의 책에 의하면, 종교를 가진 사람이 상당히 많고 젊은 사람 중에서 더 증가하고 있지만, 과학자들과 다른 분야의 지식인들을 통계적으로 비교해 볼 때, 종교적인 용어로 불신자의 비율은 과학자 중에서 약간 더 높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기독교인인 것이 가능한가? 기독교인이 확실히 아닌 스노우는 그렇다고 답하고 있다.


리차드 파인만 (Richard Feynman)

리챠드 파인만은 1965년에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이며, 매우 특별한 사람이다. 그는 노벨상을 타기 9년 전 쯤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많은 과학자들은 과학과 하나님-계시의 하나님-을 동시에 믿고 있으며 전혀 모순이 없이 그렇게 한다.”

잘 알려진 “기원(Origins)”이라는 책을 쓴 알란 라이트만(Allen Lichtman)은 이 면에 대해서 잘 요약하고 있다. 그는 MIT 교수이며 하버드 대학 출판부를 통해서 그의 책을 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과학적 문헌에서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1800년대 중반 또는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이후에 종교에 관해 언급이 없는 것은 과학자들이 내부에 가지고 있는 생각의 변화라기보다는 과학자 사회의 사회적이고 전문분야의 관례의 변화인 것으로 보인다. 대중적인 신화들과는 대조되게, 과학자들은 일반 대중과 비슷한 정도의 종교적인 태도를 보인다.”

위의 이야기를 단순한 개인적인 느낌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국인들은 통계를 좋아한다. 시그마 자이(Sigma Zi)라는 전문 여론 조사기관이 조사한 결과를 보자. 3300명이 응답을 했으므로 통계적 불확실성은 적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과학자들도 일반인들의 생각과 같다”가 글의 제목이었다. 이 조사의 결과에 의하면 조사에 참여한 사람 중 절반이 정규적으로 종교적 활동을 한다고 대답했다. 박사 학위를 가진 과학자들 중 43%가 일요일에 교회에 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일반 대중 중 44%가 교회에 간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종교적인 경향이 있는지의 여부는 그 사람이 과학 분야에서 높은 학위를 가지고 있는 것과 상관이 없어 보인다.


마이클 폴라니 (Machael Polanyi)

맨체스터 대학의 화학 교수였다가 철학 교수가 된 마이클 폴라니가 한 이야기와 함께 좀 더 깊이 들어가보자. 그의 아들인 존 폴라니(John Polyani)는 1986년에 노벨상을 탔다. 나는 아들 존 폴라니의 위대한 업적이 잊혀진 후에도 아버지의 업적이 기억되리라고 확신한다.

마이클 폴라니는 물리화학 교수였다. 그의 경력 중간에 그는 철학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그는 철학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책은 읽기가 쉽지 않다. 그의 책 중 가장 영향력을 많이 미친 것은 “개인적 지식(Personal Knowledge)”이다. 그는 유대인의 혈통이었으며, 헝가리에서 태어났다. 화학에서 철학으로 바꿀 무렵, 그는 로마 카톨릭에 입교하였다. 다음은 그가 말한 내용이다.

“나는 과학의 신념 아래에 숨어 있는 가정들을 다시 살펴 볼 작정인데,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그 범위가 넓다는 것을 보여 줄 것으로 기대한다. 그것들은 사람의 영적인 기초 전체과 더불어 확장되는 것으로 보이며, 그 사람의 사회적 존재 자체의 뿌리까지 뻗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나는 과학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더 큰 범위의 신념의 한 조각으로 인정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 책을 읽는다면 여러분도 내가 내린 결론과 동일한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폴라니는 관찰자가 언제나 실험실의 일부분이며 언제나 결정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험자는 결코 중립이 아니다. 모든 과학자들은 자긴 또는 자신의 연구에 전제(presuppositions) 조건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과학자는 과학적인 방법이 믿을만하다는 것에 대해서 절대 의문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러한 믿음은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질서있는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기독교적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나는 이 면에서 몇가지 증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6. 과학은 기독교 사회에서 발전하였다.

나는 언제나 반응을 불러 일으키는 격렬한 선언으로 시작하기를 좋아한다. 이것은 영국 과학자 로버트 클락(Robert Clark)의 말이다. 이 말은 여러분을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그는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적 발전이 기독교 문화에서만 발생하였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옛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바빌론, 이집트, 그리이스, 인도, 로마 페르시아 중국 같은 모든 문명에서 과학은 어느 정도까지 발전했으나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정지해 버렸다. 기독교가 없이도 그러한 문명이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는 쉽다. 그러나 사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전혀 이상한 사실이 아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과학은 근본적으로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 그리스에서 이러한 믿음은 신에게서 불을 훔쳐서 인간에게 준 대가로 신을 노하게 해서 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나는 그가 “과학 발전을 지연시켰다”라고 말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서 그는 좀 지나쳤다. 그러나 이 글이 사람들을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은 확실하다.


프란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클락과 폴라니가 말한 것을 좀더 생각해 보자. 즉 과학은 기독교적 환경에서 발전했다는 선언을 좀 더 탐구해 보자. 나는 프란시스 베이컨이 과학적인 방법을 발견했다고 배웠다. 높은 수준의 비판가들은 이제 베이컨이 그 방법을 누구에게선가 훔쳤으며 단순히 널리 알렸을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쟁점은 과학사 연구가에게 맡기기로 하겠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한 말 중 한 가지는 '두 개의 책 선언'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매우 유명하다. 그는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이나, 하나님의 작품인 자연을 너무 많이 공부했거나 너무 깊게 조사했다고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그는 성경책과 자연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두 책에 대해서 가능한 한 많이 배울 것을 격려하고 있다. 과학적 방법의 시작과 이러한 선언은 정말 서로 딱 들어 맞는다.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요하네스 케플러는 행성의 궤도가 타원형이라고 제안한 사람이다. 그는 행성의 운동에 관한 법칙을 발견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신실한 루터교회 신자였다. 왜 사람이 과학을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의 과학적 연구를 통해서 성스러운 창조자가 그의 일(작품)에서 느꼈던 기쁨를 조금이라도 맛보고 싶다고 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케플러는 그의 첫 문장만 본다면 Diest(하나님이 창조하시기는 했으나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예수님을 섬기는 것만을 믿는다. 그 안에서 모든 피난처와 위안을 얻는다”


블레이즈 파스칼 (Blaise Pascal)

파스칼은 위대한 과학자이다. 그는 수학에서 확률과 경우의 수를 분석하는 이론의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다. 그는 유체와 단단한 물체 사이의 핵심적인 연결점을 제공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과학자로서 유일하게 기독교적인 생각에 크게 공헌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생각들 중 많은 부분이 팡세(The Pensees)에 실려 있다. (내가 MIT를 다닐 때에 우리같은 멍청이들을 문화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몇 개의 인문계 과목을 듣는 것이 필수였는데, 몇 년 뒤에 별 효과가 없다고 인정되어서 인문계 필수과목이 사라졌다.)

파스칼의 신학은 구원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는 말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내적인 사악함과 하나님의 끝없는 자비하심을 알도록 하셨다. 이 사악함을 성경은 죄라고 부른다. 그들의 가장 내부의 영혼에 매여있는 자신을 풀어버리고 겸손과 기쁨으로 채우라. 영혼을 하나님 그분 외에 어떤 것도 그 끝에 두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끝이시고, 또 모든 것이 향하는 중심이다.”

파스칼은 또한 이런 말도 했다.

“사람의 중심에는 하나님 형상의 빈 공간이 있는데, 오로지 예수님만 그 공간을 채울 수 있다.” 


로버트 보일 (Robert Boyle)

로버트 보일은 아마도 첫 화학자일 것이다. 그는 원자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대학 일학년 화학 수업을 듣는 학생들 중 많은 수가 보일의 법칙을 알고 있다. 과거에 내 수업을 들은 학생을 만났을 때 무엇을 기억하는지 물어볼 때가 있다. 그럴 때 보일의 법칙: PV = nRT 를 이야기하는 학생도 이따금 있다. 그러면 나는 내 수업이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공식은 이상기체 방정식으로 보일의 법칙이 포함되어 있다.

보일은 바쁜 사람이었다. 그는 많은 책을 썼다. 그 중 하나는 “그의 작품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지혜(The Wisdom of God Manifested in the Works of Creation)”라는 책이다. 그는 무관심 주의와 무신론에 대항하여 기독교를 방어하기 위해 매년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보일은 리차드 벅스터(Richard Baxter)와 친한 친구 사이였는데, 그는 가장 위대한 청교도 신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뉴 잉글랜드에서 예수님의 복음 전파를 위한 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아이작 뉴턴 (Isaac Newton)

나는 그 결과에 동의하지 않지만 최근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아이작 뉴턴 경이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로서 뽑혔다. 뉴턴은 수학자이고 물리학자이며, 라이프니츠(Liebnitz)와 함께 미적분을 발견한 사람이고, 또한 고전 역학을 성립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세 명의 위대한 이론 물리학자 중 첫째 사람이다. 그는 다양한 여러 가지 것에 대해서 글을 남겼다. 그는 화학에도 손을 댔지만 유명해지기 전이었다. 그가 신학에 대해서 쓴 책이 과학에 대해서 쓴 책보다 많다. 그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도 책을 한 권 썼는데, 책의 제목은 “다니엘의 예언에 대한 관찰과 요한계시록”이다. 이 책에서 그는 말한다.

“태양과 행성과 혜성들의 가장 아름다운 이 운행체계는 지적이고 능력이 있는 존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뉴턴이 Deitst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계시(현 세상에 대한 관심과 개입)는 인정하지 않는 자연 종교 체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구절은 그러한 짐작이 틀린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불경스러운 역사보다는 성경에서 더 많은 진실함을 찾을 수 있다.”

뉴턴은 성서문학자였다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성경을 근거로 믿음의 글 한편을 쓰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말했다.

“사도들에 의해 전해진 그런 분명한 말로 표현되어야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유혹에 의해 쉽게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나간 모든 잘못된 길에는 유혹이 있었다. 진실한 믿음은 성경의 본문 속에 있다.”

믿지 않는 역사가인 조지 트레벨리안(George Trevellian)은 위의 인물들이 기여한 바를 이렇게 요약하였다.

“보일과 뉴턴 그리고 왕립학회의 초기 회원들은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으며, 토마스 홉스의 의심쩍은 선언들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당시의 일반 사람들에게 우주에 질서가 있으며, 과학적인 탐구의 방법을 사용하여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익숙해지는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방법들이 성경의 역사나 기적적인 종교와 일치하지 않는 어떤 결론으로도 이끌어 가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뉴턴은 이 믿음 속에서 살았고 또 죽었다.”


마이클 페러데이(Michael Faraday)

마이클 페러데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학자이며, 또한 아마도 역사상 가장 훌륭한 실험과학자였을 것이다. 마이클 페러데이 탄생 200주년 기념행사가 영국 왕립 연구소에서 열렸다. 내 친구인 존 토마스 경(Sir John Thomas)이 쓴 흥미 있는 글이 발표되었다. 이 글에 의하면 마이클 페러데이가 노벨상 수상이 있는 시대에 살았더라면, 적어도 8개의 노벨상을 탔을 것이라고 한다. 패러데이는 벤젠과 전자기파 복사현상을 발견했고, 발전기를 발명했으며, 고전적인 장 이론(classical field theory)의 틀을 짜 놓았다.

그의 생의 마지막을 란다우의 그것과 비교해 보자. 패러데이가 죽음이 가까웠다. 친구이면서 복을 빌어 주는 사람이 와서 물었다. “마이클 경, 이제 당신은 무슨 추론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 친구는 약간 분위기를 띄우려는 참이었다. 패러데이는 평생동안 뭔가 추론하고, 실험실로 달려가 실험으로 확인하는 일을 해왔다.

패러데이는 진지하게 받아들인 후 대답했다.

“추론이요? 나는 전혀 그런 것 없습니다. 나는 확신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죽어가면서 추론에 의지하고 있지않다는 것에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왜냐햐면 나는 내가 믿고 있는 분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그로부터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지켜주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클럭 맥스웰 (James Clerk Maxwell)

세 명의 위대한 이론물리학자 중 두 번째가 맥스웰이다. 맥스웰의 경력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기도 한다.

“맥스웰은 이론에서 혁명적인 진보에 필요한 은사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물질 세계의 실제 모습에 대해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고, 수학적 능력이 뛰어났으며, 선입견에서 완전히 자유로웠고, 고도의 질서에 대한 창조적인 상상력이 있었다. 그는 또한 이러한 능력에 맞는 과제를 발견하는데도 뛰어났다. 패러데이의 장에 대한 수학 공식이 그 예이다. 맥스웰의 성공적인 과제의 완성은(맥스웰 방정식) 인간 지성의 위대한 성취의 한 가지로서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나는 위 글 중 한 문장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만일 맥스웰이 선입견에서 진정 완전히 자유로왔다면, 그는 과학적인 업적을 전혀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과학자가 아닌 사람에 의해서 쓰여졌다. 그러나 이 문장은 기본적으로 좋다. 맥스웰이 말했다.

“그의 의로심 앞에 무릎 꿇고 기쁘게 그의 선물(예수님 안에서 영생)을 받는 이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기로 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졌고, 그들이 예수님의 형상과 닮았다는 것을 보게 된다면, 더 이상의 저주가 없을 것입니다.”

맥스웰과 찰스 다윈은 현대적인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맥스웰이 다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해 한다. 사실 그는 2월의 어느 모임에서 과학과 성경 사이의 새로운 관계의 형성에 대해서 토의하기 위해서 이탈리아의 리비에라에 갈 예정이었다. 만일 여러분이 영국 케임브리지에 살아본 적이 있다면, 겨울에 매우 암울한 날씨라는 것을 알 것이다. 내가 그곳의 교수였다면 이탈리아의 리비에라에 갈 기회를 활용했을 것이다. 맥스웰은 그 초청을 거절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과학적 가정들의 변화는 성경의 해석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된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해석이 이러한 가정을 근거로 하고 있다면, 그 가정이 땅에 묻히거나 잊혀져야하는 시기 훨씬 뒤에도 그 해석은 남아 있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은 진리이다. 이러한 예는 정상상태 이론(steady–state theory)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이 이론은 프레드 호일(Fred Hoyle)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것은 기원에 대한 두 이론 중 하나이다. 정상상태 이론의 가정은 기본적으로 오늘날 우리들이 보는 것이 그전에도 항상 그랬다는 것이다. 아놀드 팬시아(Arnold Pansias)와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이 초단파의 존재를 관찰한 1965년 이후 정상 상태 이론을 믿는 사람의 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1960년대만 해도 창세기가 정상 상태 이론과 어떻게 일치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보려고 노력했던 주석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창세기가 무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정상상태 이론과 창세기가 서로 들어 맞게 하려면 매우 특이한 해석을 필요하게 된다.

정상상태 이론은 20년 정도면 사라지고 잊혀질 것이다. 그러한 주석들은 아직도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는 있겠지만,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다음에 계속 됩니다)



번역 - 김은숙

링크 - http://www.irr.org/schaefer1.html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434

출처 -

참고 :

Headlines
2006-06-05

헨리 모리스 (Henry Morris) 

: 현대 창조과학 운동의 아버지


많은 훌륭한 책들의 저자요, 과학자요, ICR(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의 설립자인, 그리고 "현대 창조과학 운동의 아버지"로서 간주되고 있는 헨리 모리스 박사는 몇 번의 작은 뇌졸중 후에 2006. 2. 25일 87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헨리 모리스(Henry Morris, 수력학, 라이스 대학) 박사와 존 휘트콤(John Whitcomb) 박사는 1961년에 함께 저술한 ‘창세기 대홍수(The Genesis Flood)’ 라는 책을 통하여 잠자고 있던 교회를 흔들어 깨웠다. 많은 사람들은 그 책의 출간이 현대 창조과학 운동(modern creationist movement)의 시작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책은 오래된 연대에 반대되는 증거들과 한 번의 전 지구적인 대홍수 격변을 찬성하는 과학적인 명백한 증거들을 제공했다. 1970년에, 헨리 모리스는 그의 창조과학 사역에 전념하기 위해서 토목공학(civil engineering)부의 장을 맡고 있었던 버지니아 공대(Virginia Tech)를 떠났다. 버클리 대학(UC Berkeley)의 생화학자였던 듀안 기쉬(Duane Gish) 박사와 함께, 모리스는 미국창조과학연구소(ICR,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를 설립하였다. 미약하게 시작했던 ICR은 점점 성장하여, 세계에서 선도적인 창조과학연구소가 되었고, 이제는 박물관과 대학원을 가지게 되었다. 모리스와 기쉬는 미국 전역을 다니며 대학 캠퍼스에서 수많은 과학자들과 창조/진화 토론을 벌였다. 문자적 성경 해석과 기독교관을 견고히 하며, 진화론적 과학과 역사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는 그의 50여권이 넘는 책들은 일반 독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사람들을 만나면 부드럽고 온화하면서도, 펜을 들면 강하고 견고했던 헨리 모리스는 마지막 숨을 거두기 몇일 전까지도 저술 작업을 하였다. 그가 저술했던 주제들의 폭과 깊이는 탁월하고 깊었다. 그의 정신은 87세의 나이에서까지 날카롭고 명철했다. ICR 에서의 사역들은 그의 아들 존 모리스(John Morris, 지질공학) 박사의 리더쉽 하에서 계속되고 있다. ICR은 최근 8년간 11명의 과학자들에 의해서 수행되었던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법들에 대한 학문적 분석 연구였던 RATE(Radioisotopes and the Age of the Earth)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2005년 11월), 유전학 분야를 포함한 새로운 여러 연구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있다.

2002년에, ICR은 코스타메사(Costa Mesa)에 있는 갈보리 예배당(Calvary Chapel)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조론의 횃불을 넘기며(Passing the Torch of Creation)”라고 불리는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곳에서 헨리 모리스는 그의 마지막 대중 연설을 하고난 후 모든 사람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와 그의 저서들을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은 그를 그리워할 것이다. 심지어 그의 적이었던 진화론자들도 그를 존경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믿음에는 반대하지만, 진화론자들도 그의 개인적 인격, 성실성, 영향력은 결코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저술했던 많은 책들과 이어진 오디오와 비디오물들, 그리고 그가 설립한 ICR과 함께 헨리 모리스(Dr. Henry M. Morris, Jr)의 이름은 그가 부활시켰던 창조론 운동과 함께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헨리 모리스 박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랐던 한 사람에 의해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거의 모든 창조론 지도자들은 모리스의 사역과 저술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1960년 대에, 창조론을 주장하고 있는 책은 극히 드물었다. 교과서들은 진화론에 의해서 완전히 점령당해 버렸고, 과학에 의해서 협박당하고 있던 대부분의 교회들은 이 주제를 다루는 것을 회피했다. 헨리 모리스의 첫 번째의 작은 책 ‘성경과 현대과학(The Bible and Modern Science)’은 이러한 것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창세기 대홍수(The Genesis Flood)’는 대학을 졸업한 새로운 세대의 크리스천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자유주의 교회들은 오래 전부터 진화론으로 완전히 물들어 있었고, 많은 성경을 믿는 교회들도 수십억 년의 오래된 연대와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ism)에 굴복되어 있었다. 과학이 오래된 연대를 사실로서 입증했다고 생각하고, 그들은 간격이론(gap theory)과 점진론적 창조론(progressive creation) 등으로 타협하며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모리스와 휘트콤은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전 세계적인 홍수 기록과 일치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화석기록과 지질학적 지층들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단지 그 뿐만이 아니라, 진화론자들이 진화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과학적인 증거들이 대홍수를 동반한 격변설적 개념으로 해석할 때 더 합리적으로 해석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새로운 일단의 창조과학자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그들은 오늘도 더 깊이있는 조사들을 진행하고 있다. BSA(Bible-Science Association)와 CRS(Creation Research Society) 같은 새로운 기구들이 조직되었고, 창조과학 운동을 지지하는 무수한 클럽과 단체들이 강하게 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며 성장하고 있다. 그들 거의 모두는 거슬로 올라가면 ICR로부터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헨리 모리스는 결코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않았으며, 늘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렸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였다. 그는 이 지적 전투(intellectual battle)의 본질과 그 마지막을 잘 알고 있었다. 전투는 일찍이 있었던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욱 뜨겁게 가열되고 있다. 새로운 세대에게 그 횃불을 넘겨주었지만, 그는 이 전투의 현장을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다른 이들에게 도전을 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일을 계속했던 것이다. 헨리 모리스 박사는 현대 창조과학 운동의 모세였다. 그의 개인적인 인내심, 근면성, 성결함, 그리고 그의 책들에서 볼 수 있는 지혜로움은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새로운 세대의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 넣었고, 그들을 강하고 용기있게 만들어서, 진정한 과학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들이 안주하고 있던 땅들을 떠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참조 : 위대한 창조과학자들 (List of great Creation Scientists)
http://crev.info/?scientists=index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creationsafaris.com/crev200603.htm 

출처 - CEH, 2006. 3.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334

참고 : 3153|3177

Ann Lamont
2006-06-03

위대한 창조과학자, 니콜라스 스테노 

: 현대 지질학과 젊은 지구 창조론의 창시자

(Great Creation Scientists: Nicolas Steno)


      니콜라스 스테노(Nicolaus Steno)는 지질학에서 최초로 ”진정한 위대한 발견들”을 했던 사람으로 인정되어 오고 있다.[1] 지질학에서의 그가 발견한 기본적인 원리들은 아직도 일상적으로 퇴적지층들을 해석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다. 비록 그가 현대지질학의 창시자(a founder of modern geology)라고 불려지지만, 스테노의 발견이 성경, 특히 창세기에 대한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는 것을 대부분의 지질학자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닐스 스텐슨(Niels Stensen, 그의 본명)은 1638년 1월 10일 덴마크의 코펜하겐(Copenhagen)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금세공인(goldsmith)이었다. 닐즈는 한 명의 루터교도(Lutheran)로서 코펜하겐에서 성장하였다.


해부학

1656년에, 닐스 스텐슨은 코펜하겐 대학에서 해부학(anatomy)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의사(physician)가 되었다. 그는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과 레이덴(Leyden)에서 더 많은 공부를 했다. 암스테르담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그는 이하선관(parotid salivary duct, ductus Stenorzarianus)을 발견하였다.[2] 레이덴에서 4 년을 보낸 후, 그는 코펜하겐에서 자리를 찾았으나 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파리에 갔고, 거기서 뇌(brain)의 해부구조에 관한 중요한 관찰을 하였다.[2]

스텐슨은 동물들도 송과선(pineal gland)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송과선이 사람의 영적 본성(spiritual nature)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반증했다. 그는 또한 사람의 림프계(lymphatic system)를 추적하였다. 비록 심장(heart) 지식에 대한 그의 공헌이, 혈액순환에 관한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의 위대한 실험에 의해서 곧 무색해졌지만, 스텐슨은 심장이 2 개의 비교적 독립적인 펌프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최초로 밝혀내었다.[3]

1665년에, 스텐슨은 이탈리아의 플로렌스(Florence)로 갔고, 투스카니의 대공작(Grand Duke of Tuscany)의 시의(court physician)가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그의 이름을 닐스 스텐슨에서 라틴식인 니콜라스 스테노(Nicolaus Steno)로 바꾸었다. 다행히도, 대공작은 스테노가 의사로서 역할 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것을 기뻐했다.


지질학

스테노는 1671년에 "자연적으로 암석 안에 포함된 고형체들에 관한 논문 서론(The Prodromus to a Dissertation Concerning Solids Naturally Contained Within Solids)" 이라는 책에서 그의 지질학적 발견들을 발표했다. 그 책은 현대 물상지질학(physical geology)의 원리를 개략적으로 기술하고 있었다.[4] 암석 안에 포함된 본체들은 화석과 결정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암석들의 대부분은 지층(strata)이라고 불리는 층(layers)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스테노의 논문은 화석들에 관한 연구(고생물학), 암석 지층에 관한 연구(층서학), 암석 결정들에 관한 연구(결정학)를 다루고 있었다.

그의 책 Prodromus 에서 예시했던 더 완벽한 논문은 만들어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은 지질학에 가장 근본적인 공헌 중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왜냐하면 과학적 연구가 형이상학적 추측에 머무르던 시기에 스테노의 작업은 관찰, 분석, 귀납적 추론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었다.[5] 사실상, 스테노는 현대의 과학적 연구 방법(modern scientific method)이 채택되기 오래 전에 그 방법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고생물학

스테노의 빛나는 지질학적 통찰력은 분리되어 일어나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의 해부학에 대한 연구는 그의 지질학에 대한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상어를 해부하는 동안, 상어 이빨에서 보여지는 분명한 특징들은 먼 내륙에서 발견된 다른 어떤 화석들의 이빨과 비교하게 했다. 그리고 그가 깨달은 것은 과거에 살았던 상어들의 몸체들은 한때 바다 아래에서 퇴적되었던 암석들에 보존되었다는 것이었다.” [2]

즉 스테노는 화석들은 실제 살았던 동식물들의 석화된 부분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므로 그는 당시에 일부 지질학자들에 의해서 가르쳐졌던, 화석은 하나님에 의해서 암석층 내에서 창조된 동식물들의 단순한 모사품(replicas)들이라는 생각을 거절했다.[6] 그는 또한 화석들은 하나님이 창조 사역을 본격적으로 하시기 전에 ‘연습 창조(practice creations)’를 하시는 동안 만들어진 진정한 생물체의 나머지였다는 반성경적인 생각도 거부했다.[7]

스테노는 그의 발견들을 1667년에 '근육학 요소들의 실례(Sample of the Elements of Myology)'에서 발표했고, 이빨이 어떻게 광물화가 되었는지를 설명하였다.[8] 이것은 화석 연구에 있어서 막대한 공헌이었다.

상어 이빨들은 자연스럽게 스테노에게 그러한 화석들이 어떻게 암석 깊숙이 묻혀있게 되었는 지를 숙고하도록 하였다. 그는 상어들은 바다 생물이기 때문에, 그 지역이 한때는 바다이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9] 그는 성경으로부터, 창조가 있었고, 한때 육지들은 엄청난 물들로 뒤덮였던 때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10] 따라서 6,000여 년의 성서적 시간틀을 사용해서, 스테노는 지구 역사와 생물체들의 역사에 대한 가장 최초의 직접적인 지질학적 설명들 중 하나를 발전시켰다. 이 작업은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유명한 무신론자 아이삭 아시모프(Isaac Asimov)는 ”스테노가...화석들은 과거에 정상적으로 살았었던 고대의 동물들이며, 죽어서 석화가 일어난 것임을 제안했다”는 것을 인정했다.[7]  그러나, 아시모프는 ”어떠한 초자연적인 힘도 스테노의 설명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스테노가 노아의 홍수를 거부했다고 잘못 결론내렸다.[7] 이 결론은 사실을 넘어선 정당하지 않은 확대해석이었다. 종교적 정당화는 과학적 논문에서는 부적절할 것이었다. 기적에 호소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필요하지 않았다. 오늘날 홍수지질학자들이 문헌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노아의 홍수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기적적인 면은 매우 한정되어 있다.[11] 물에 의한 전 지구적인 파괴를 지질학적 과정들을 통해 설명하는 데에 어떠한 기적에 호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노아의 방주가 부력의 원리를 사용하여 홍수를 극복했던 것처럼, 존재하는 물리적 법칙들에 기초하여 침식, 퇴적, 화석형성 등은 전 지구적인 홍수 동안에 엄청난 스케일로 발생했다.[12]
 
스테노는 문자적으로 창세기 1-11장에 기록된 사실들(가령 6,000년 정도의 시간틀)과 한 번의 전 지구적인 홍수를 믿었다. 그는 또한 그의 지질학적 발견들을 해석하는 데에 성경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가 발견한 것은 노아의 홍수와 전적으로 일치했다.


층서학


그림 1. 스테노에 의해서 확립된 층서학의 기본 원리들. 각 층들의 퇴적은 단단한 아래 지층 위에 발생하며, 오래된 지층 위에 젊은 지층이 누중(superposition) 된다. 기저층을 제외한 모든 지층들의 발생은 두 지층 사이가 본질적으로 수평적인 면을 갖는다.

의사로서 스테노는 이탈리아 북부의 투스카니 지역을 넓게 여행을 하면서, 그 지역의 암석들에 대한 상세한 지질학적 연구를 수행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많은 암석들이 퇴적작용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관찰과 그의 성서적 이해로부터, 그는 층서학의 몇몇 기본 원리들을 확립했다. 즉, 각 층들의 퇴적은 단단한 아래 지층 위에 발생하며, 오래된 지층 위에 젊은 지층이 누중(superposition)되며, 기저층을 제외한 모든 지층들의 발생은 두 지층 사이가 본질적으로 수평적인 면을 갖는다는 것이다.[13] (그림 1을 보라).

”지층들은 단단한 표면 위에 원래 수평적으로 쌓여졌음에 틀림없다.... 그들의 습곡과 단층들은 후에 발생하였다.”[9]  그러한 구부러짐과 잘려짐은 산들의 형성과 다른 지질학적 모습들을 설명할 수 있었다. 스테노에 의해서 확립된 층서학적 해석의 원리들은 오늘날에도 기본 원리로서 간주되고 있다.[6, 14]


.습곡과 단층

일부 진화론적 역사가들의 주장처럼, 스테노가 교회적 교리에 의해서 6,000 여년의 시간틀로 마지못해 강요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지질학적 이슈에 대해서 스테노와 교회 사이에 마찰이 있었다는 어떠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교회의 압력보다는 오히려 스테노 자신이,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젊은 지구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독립적으로 지질학과 화석들을 해석하는 데에 적용했다.  
 

결정학 (Crystallography)

스테노의 책 Prodromus는 결정학의 기초를 놓았다. 그는 석영 결정(quartz crystals)들은 외관상 많이 달라 보이지만, 그들 모두는 상응하는 면들 사이에 같은 각(same angles)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하였다.[15]  마찬가지로, 각 타입의 화학 결정과 광물 결정의 각 종류들은 그들 자신의 특징적인 각을 가지고 있다(그림 2를 보라). 가장 단순한 결정 형태는 입방체(cube)이다. 이것은 예를 들면 소금(salt, sodium chloride)과 같이 직각으로 된 6 개의 동일한 정사각형 면들을 가지고 있다. 석영, 녹주석(beryl, 예로 에메랄드), 강옥(corundum, 예로 사파이어, 루비) 등은 면 사이가 120도의 육각형 결정으로 자주 발견된다. 각 타입의 결정들에 특징적인 면각(interfacial angles)에 관한 이 법칙은 스테노의 법칙(Steno's Law)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크기, 발생 장소에 관계없이, 그리고 자연적이든 인공적이든 관계없이 같은 물질의 어떤 두 결정들에 대해서 유효하다.[15]

그림 2 : 가장 단순한 결정 형체는 소금(salt, sodium chloride)과 같이 동일한 6개의 정사각형 면이 모두 수직으로 접해있는 입방체(cube)이다. 각 타입의 화학 결정과 광물 결정들은 그들 자신의 특징적인 각도를 가지고 있다. 석영(quartz)은 면들 사이가 120도의 육각형 결정들로 발견된다.


성경적 지질학자

층서학(stratigraphy)이 오늘날 진화론자들의 하나의 주요한 버팀목으로 사용되고 있지만[6], 층서학의 창시자인 스테노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에 의한 문자적, 역사적 창조와 전 지구적인 홍수를 확고히 믿었던 사람이었다. 이것은 다른 많은 과학 분야의 창시자들에게도 사실이다. 비록 그들 중 일부는 신학적으로 완전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현대 과학이 대략 6,000년 전의 6일 창조(six-day Creation)를 믿는 지적인 구조틀에서 꽃을 피웠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실제적 사실들과, 태초의 창조에 대한 믿음을 과학적 개념과 정반대되는 것으로 정의하며, 큰 소리로 떠들어대고 있는 반창조론자들의 확언들을 비교하여 보라.

그의 삶을 통하여, 스테노는 하나님의 창조의 경이로움을 조사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책임으로 생각하였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조사할 마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소홀히 여기는 죄를 짓는 것이다”[16] 그는 또한 하나님에 대한 의존과 인간의 죄 많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발아래 죄로 인해 더러워진 우리의 옷들을 내려놓자”[3]

스테노는 말년에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 살았다. 그리고 1686년 11월 26일에 슈베린(Schwerin)에서 죽었다. 그는 현대지질학을 창시한 아버지로서 널리 기억되고 있다.

스테노가 성경적 지질학자였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의 업적은 성경이 이 세계의 진실된 역사(지질학적 역사를 포함하여)를 기록하고 있다는 그의 믿음 위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References and notes

1. Press, F., and Siever, R., Earth, 4th ed., W.H. Freeman and Co., New York, p. 28, 1986.
2. Williams, T.I. (Ed.), A Biographical Dictionary of Scientists, 3rd ed., Adam & Charles Black, London, p. 493, 1982.
3. Graves, D., Scientists of Faith, Kregel Resources, Michigan, p. 73, 1996.
4. Ronan, C.A., The Cambridge Illustrated History of the World's Scien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p. 390, 1983.
5. Encyclopedia of World Biography, 2nd ed., Gale, Detroit, 14:425, 1998.
6. Morris, H.M., Men of Science, Men of God, Master Books, California, p. 18, 1988.
7. Asimov, I., Biographical Encyclopedia of Science and Technology: The Lives and Achievements of 1510 Great Scientists from Ancient Greece to the Space Age, 2nd revised ed., Doubleday & Co. Inc., New York, p. 105, 1982.
8. Hallam, A. (Ed.), Planet Earth: An Encyclopedia of Geology, Rigby, Sydney, pp. 307-308, 1977.
9. Ref. 4, p. 391.
10. Steno, N., The Earliest Geological Treatise—1667, translated by Axel Garboe, MacMillan & Co., London, p. 17, 1958.
11. E.g. the sending of the animals, the foreknowledge of the catastrophe, the closing of the door and possibly the initiation of the Flood.
12. Such laws are of course also God-ordained and our description of the way God usually upholds His creation (Col. 1:17) in a regular way, but a miracle is by definition a non-normative action of God; i.e. an addition to 'natural' law.
13. Ref. 5, p. 426.
14. Recent experimental studies show that when water is moving, some of Steno's principles need to be modified. See, for example, the video: Berthault, G., Experiments in Stratification, A Sarong (Jersey) Production, 1999.
15. Encyclopedia Britannica, 15th ed., 11:247, 1985.
16. Ref. 3, p. 72.

 

*참조 : Geological pioneer Nicolaus Steno was a biblical creationist
http://creation.com/geological-pioneer-nicolaus-steno-was-a-biblical-creationist

Geological answers for the 19th and 21st centuries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8_3/j18_3_52-57.pdf

British scriptural geologists in the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 part 12: George Young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8_3/j18_3_121-127.pdf

British scriptural geologists in the first half of the nineteenth century: part 11: John Murray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8_2/j18_2_74-82.pdf

The origin of old-earth geology and its ramifications for life in the 21st century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579/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3/i4/steno.asp

출처 - Creation 23(4):47–49, September 2001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377

참고 : 4198|4275|4235|4473|4490|4607|4610|6563|6566|6638|6645|6559|6558|6552|6549|6547|6545|6543|6535|6531|6508|6507|6551|6462|6417|6431|6524|6415|6413|6330|6255|6254|6240|6228|6225|6223|6222|6136|6170|6104|6076|6030|5556|5973|5468|5958|5957|5951|5898|5527|5841|5737|5721|5675|5429|5419|5400|5399|5286|5260|4805|4211|4217|4214|4132|3968|3948|3111|4363|3044|3278|2912|2050|1493|1464|1192|557|2104|512|3032

John C. Whitcomb, Ph.D
2006-05-18

'창세기 대홍수' 저서의 역사와 영향 

(The History and Impact of the Book, The Genesis Flood)


      ‘창세기 대홍수(The Genesis Flood)’ 라는 책이 1961년에 출간된 이후, 그 책은 그 저자들의 삶을 또한 변화시켰다. ‘창세기 대홍수’의 공동 저자이며, 나의 오래된 친구이자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었던 헨리 모리스(Henry M. Morris) 박사와 나는 550 페이지의 책을 출판하여 하나님을 높여드리기 위해서 연합되었다. ”창세기 대홍수의 출판은 나의 삶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공학을 하던 나의 삶이 창조론과 기독교적 증거들을 찾기 위해서 전적으로 집중하도록 변화되었던 것이다. 수많은 창조론 강연들을 하게 되었고, CRS(Creation Research Society, 1963)를 설립하게 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오늘날의 ICR(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1970)이 태어나게 하였고, 수많은 세미나, 회의, 토론 등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게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과학적 성서적 창조론(scientific Biblical creationism)의 회복이 일어나게 된 것이 ‘창세기 대홍수’의 촉매적 영향 때문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비하신 섭리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헨리 모리스를 1953년 9월에 ‘최근 창조와 전 지구적 홍수의 성서적 증거’ 라는 제목으로 미국과학자 연맹(American Scientific Affiliation) 모임에서 논문을 발표하기 위해서 (내가 구약학 교수로 있는) 그레이스 신학교(Grace Theological Seminary)로 보내셨다. 이것은 결국 기원에 대한 나의 전체적인 접근법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고, 하나님은 내가 ”창세기 대홍수: 지형학적 범위, 지질학적 영향, 그리고 연대기적 배경에 대한 조사”(Winona Lake, IN: Grace Theological Seminary, 1957) 라는 제목이 붙은 450쪽 분량의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데 4년 동안을 보내도록 자극하셨다. 곧 모리스는 ‘창세기 대홍수’의 공동 집필에 동의했다. 그와 나는 둘 다 신학적 및 과학적으로 엄청난 이슈를 다루는 그러한 규모의 프로젝트에는 신학자뿐만 아니라 과학자의 관점이 필요하다는데 동의했다.

이처럼 엄청나게 시간이 소모되는 과정 속에서, 21명의 과학자, 9명의 신학자, 그리고 2명의 문법 학자들에게 원고의 일부나 전체를 검토해줄 것을 요청했다. 회고해보니, 1959년은 또한 시카고에서 헉슬리(Julian Huxley) 경과 다른 무신론적 진화론자들이 다윈 100 주년을 기념하면서 ”창조론은 본질적으로 죽었다” 라고 발표한 해였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더욱 중요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 ‘창조론에 대한 장례식’은 미숙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창세기 대홍수’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들

우리의 책이 출판되고 약 25년 후인 1980년대 말, 두 개의 심각한 반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 운동은 둘 다 자연주의적 다윈주의(naturalistic Darwinism)에는 반대했으나, 동시에 성경적이고 과학적인 창조론(Biblical and scientific creationism)에도 반대했다. 성경적 관점으로부터, 이것은 슬프게도 예언되어 있던 일이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러한 말로 맞섰다.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서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환히 드러나려면, 여러분 가운데 파당(heresies)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19, 표준새번역). 한편으로 이것은 건전한 과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상대방이 얼마나 뛰어나거나 웅변적이든지 간에 단지 권위를 지닌 인물이라는 이유로, 아무 관점이나 수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 각자는 그러한 것들이 그런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날마다 성경을 상고"할 필요가 있다 (사도행전 17:11). 또 다른 한편으로, 많은 수의 크리스천들이 성경적 진리를 포기하도록 속임을 당해왔다.


점진적 창조론

이 운동의 첫 번째는 특별히 크리스천 천문학자인 휴 로스(Hugh Ross) 박사에 의해 대표되는 ‘점진적 창조론(Progressive Creationism)’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는 창조가 소위 ‘빅뱅(Big Bang)’이라고 하는 사건으로 수십억 년 전에 시작되었고, 동물들은 초자연적으로 주기적으로 수백만 년에 걸쳐 (진화가 아니라)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아담의 반역이 동물계에 죽음을 야기하지 않았으며, 노아의 홍수는 지역적이었다고 믿는다. 그는 성경의 66권의 책은 전적으로 영감에 의한 것임을 믿지만, 67번째 책인 현대과학(modern science)이라는 관점에 의해서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고 믿고있다.

2003년 1월에, 미국창조과학회(ICR)는 ‘점진적 창조론’의 도전에 대해 심도있게 대응했다. 나는 휴 로스 박사의 관점에 대한 반박과 8명의 토론단에 참석하기 위해서 3명의 과학자와 1명의 신학자와 합류하도록 초청받았다 (After Eden: Understanding Creation, the Curse, and the Cross). 나는 특히 ‘점진적 창조론자들’이 인류의 창조 이전에 수억 수천만년 동안의 퇴적작용과 화석화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창세기 대홍수를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소규모 격변 정도로 축소하려는 헛된 노력에 놀랐다.


지적설계운동

두 번째 반운동은 보기에도 훨씬 더 놀랍다. 이것은 ‘지적설계운동(IDM, Intelligent Design Movement)’으로 불리는 것으로, 무신론적 자연주의와 신다윈주의적 진화론은 생명체의 '환원불가능한 복잡성(irreducible complexity, 한 요소도 제거불가능한 복잡성)'을 설명하는데 완전히 실패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지적설계 학자들은 성경이나 세계의 창조주이신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호소 없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논쟁에 의해서 진화론을 패배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모든 크리스천들은 궁극적 기원(origins)에 대한 연구의 건전성과 진실성을 회복하려는 합리적인 노력에 성원을 보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대부분 지적설계운동의 목표는 정확하다. 하지만 이 운동의 비극은 기원에 관해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인 성경을 고의적으로 경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상, 문자적 역사로서의 창세기는 진화론적 과학자들과 논쟁할 때에 짊어져야 할 당황스럽고 원치않는 불필요한 짐인 것처럼 보인다.

지적설계운동의 주된 대변인인 필립 존슨(Philip Johnson) 박사는 다음과 같이 조언하고 있다. ”논쟁에서 성경과 창세기는 빼라. 왜냐하면 소위 성경 대 과학이라는 이분법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속적 학회에서 들려질 수 있는 방식과 종교적 반대자들을 통합할 수 있는 방식으로 논쟁을 표현하라. 그것은 ”창조가 되는 데에 조물주가 필요한가, 아니면 자연이 스스로 그것을 할 수 있는가?” 라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다른 문제들로 벗어나는 것을 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노아의 홍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혹은 그러한 것과 같은 것들을 물어올 것이다. 그것들은 여러분을 길이 없는 불모지로 이끌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질문에 결코 곰곰이 생각하지 말라” ('Berkeley's Radical' in Touchstone 15:5 [June, 2002], p. 41).

사실상, 천지만물이 지적설계자의 산물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기원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필수적인 기초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완전한 창조 진리로 이끄는 사다리의 맨 밑단일 뿐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불충분하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고 이처럼 엄청나게 중요한 질문에 참된 관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창세기 1장과 2장 내의 기원에 관한 성령의 영감을 받은 기록과 창세기 6-9장의 전 세계적인 규모의 홍수에 대한 하나님의 기록도 또한 믿어야만 한다. 만물 즉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골로새서 1:16), 그리고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춰져 있는(골로새서 2:3), 그리고 모든 생명과 물질, 에너지, 공간, 시간의 궁극적 설계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지적설계’를 열렬하게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실제적으로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진정한 크리스천들은 크게 놀라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하여 기원에 대한 창세기의 기록을 믿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겸허히 강조한다. 이것은 명백히 생명체가 창조된 방식(성숙한 창조)과 물질이 창조된 순서, 그리고 창조사건의 기간(단지 수천 년 전에 하루 24시간의 6일 동안) 등을 포함한다. 우리의 주님은 지구를 창조하시고 수십억년 후에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이들을 ‘태초에(본래, at the beginning)’ 만드셨다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9:4). 따라서, 동물계 내의 죽음은 인류 창조 이전에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아담이 불순종한 결과로 일어나게된 일임을 믿는 것 또한 필수적이다 (창세기 1:31, 로마서 8:20-23에 의거한 로마서 5;12). 매우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 전 세계에 걸친 무수한 동식물 화석들은 단지 창세기 대홍수라는 전 지구적인 격변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오늘날 창조/진화 논쟁에서는 슬프게도 무시되어, 한 영혼의 영생을 잃어버리게 할 수도 있는 정말로 깜짝 놀랄만한 요소가 있다. 우리의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누가복음 9:26). 만약 우리가 창조/진화 토론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버린다면, 물질주의적 진화론의 어둠 속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진리로 인도할 수 있겠는가?

지적설계에 관한 토론과 논쟁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시적으로 믿지 않는 자의 마음을 끌어당길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단지 하나님의 살아있는 능력의 말씀을 받아들임(히브리서 4:12)과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완수된 사역과 죽은 자 가운데 육신이 부활하셨음에 대한 증거(참고. 로마서 10:9-10)로써만 나타날 수 있다. 사도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아테네의 철학자들에게 지적설계에 대해 강력히 설파한 후, 참되신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이 이제 모든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신다고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그의 연설을 끝낸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사도행전 17:16-31).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써 모든 이들에게 이것에 대한 확신을 주셨다 (30-31절). 바울은 그 연설에서 주 예수를 전파했기 때문에 몇몇 사람이 그에게 합류하였고 믿었다 (34절). 바울은 다른 경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로마서 1:16).

그렇다면, 현대의 지적설계 지지자들이 대답해야만 하는 화급을 요하는 질문이 있다. 사람들이 지적설계 메시지를 들은 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주로 믿고 그들의 마음과 생각이 충분히 새롭게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가?

우리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 구원을 이루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9,17). 이것이 진화론자들을 죄에 대한 무지함으로부터 분리하고, 그들을 세계의 창조주이자 인간의 유일한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지식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쐐기(wedge)’인 것이다.

휴 로스 박사와 그의 추종자들이 온 산들을 덮고 1 년간 지속되었던 노아 시대의 대홍수를 메소포타미아의 지역적 홍수로 축소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는 한편, 지적설계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공식적으로 대홍수에 대한 창세기의 기록뿐만 아니라 창세기 전체와 그 뒤의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65권의 책들도 또한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

참으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계의 기원(origin of the world)에 관하여 커다란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며, 결코 거짓말을 하시지 않는 분이시므로, 그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우리의 마음을 유한하며, 죄 많은, 항상 변하는,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인간들의 의견에 굴복해야할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한다. 그들은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생각들에 대해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예언의 말씀을 주셨다.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베드로후서 3:4-6)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 때가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확인해 주셨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태복음 24:38-39).

잠시 생각해 보자. 예수님은 홍수가 와서 모든 것들을 휩쓸어갔을 때, ‘방주’에 들어간 사람만이 ‘홍수’로부터 살아남았다고 말씀하셨다. 과연 이 홍수가 지역적인 홍수를 의미하는 것일까? 지역적인 홍수라면 노아가 살아남기 위해서 거대한 방주를 지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단지 일부 사람들만 죽었을 것이다. 아니면 일부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믿는 것처럼, 그 당시에 모든 인류는 한 지역에 모여 있어서 정말로 지역적 홍수로도 모든 사람들을 휩쓸어갔을 수 있었는가? 그러나 도무지 그럴 것 같지 않은 그러한 시나리오조차도, 방주는 정말로 필요했을 것 같지 않다. 지역적 홍수였다면, 경고를 받은 노아는 2달 정도면 그 지역을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새, 포유류, 파충류들이 한 번의 지역적 홍수로 죽게 될 수 있었을까?

결론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홍수에 관한 정보에 신뢰할만한 근원이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속이실 리가 없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을 때 진지하셨다. ”그러나 그(모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요한복음 5:47).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분명히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돕기 위해서 우리의 책 ‘창세기 대홍수’를 사용하셨다. 홍수의 규모, 심도, 중요성에 관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에 성서신학, 성서해석학, 그리고 주해 등에 대한 커다란 기술이 요구되지 않는다. 성서적 격변설(Biblical catastrophism)은 유한하고 항상 변하는 인간의 이론이 아닌, 성경의 거룩한 계시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 Dr. Whitcomb is co-author of The Genesis Flood. This article is an adaptation of a message given at the Answers in Genesis Mega-Conference on July 18, 2005. 



번역 - 길소희

링크 - http://www.icr.org/index.php?module=articles&action=view&ID=2719

출처 - ICR, Impact No. 395, 2006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300

참고 :

Headlines
2006-04-01

미생물의 세계를 열었던 레벤후크 

(Antony van Leeuwenhoek, 1632-1723)


       과학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인이 과학에서 근본이 되는 발견과 과학의 새로운 분야를 시작하고, 인간 역사의 과정을 바꾸는 일은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또한 비전문가가 새로운 기준이 될 과학기술을 보여주는 것 역시 종종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안토니 반 레벤후크(Antony van Leeuwenhoek)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레벤후크는 매우 창의적이었고, 주의깊었으며, 정확하고, 그 당시의 잘못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으며, 채울수 없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호기심은 그가 40세부터 91세로 죽는 날까지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 호기심은 그가 로버트 후크(Robert Hooke)의 벌레, 코르크, 직물과 20-30배의 배율로 관찰된 다른 물질들의 그림을 포함한 새 삽화집인 ‘마이크로그라피아(Micrographia)’의 사본을 읽었을 때 시작되었다. 레벤후크는 자신의 렌즈를 연마하여 만들고, 그 자신만의 현미경을 만들었다. 기술상의 완벽함은 그 배율을 200배 이상으로 끌어올렸고, 그는 인류에게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세계인 미생물의 세계(world of microorganisms)를 열었던 것이다.

Antony van Leeuwenhoek, 1632-1723


네덜란드의 델프트(Delft)에서 태어난 안토니에게는 과학자가 될만한 어떠한 조건이나 기회가 전혀 없었다. 대신에 그는 어려움과 역경을 먼저 알게 되었다. 바구니 제조업자 였던 그의 아버지는 그가 대여섯살 때쯤 세상을 떠났다. 그의 어머니는 맥주 양조업자의 딸이었다. 그녀는 화가이자 지방행정관(bailiff)이었던 사람과 재혼했으나, 안토니의 새아버지는 그가 16살때 다시 세상을 떠났다. 삼촌이 그의 교육을 담당했고, 대학교육은 결코 받아본 적이 없었으며, 그 당시의 과학교육에 사용되던 언어인 라틴어 교육도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고, 그의 모국어인 네덜란드어가 그가 아는 유일한 언어였다. 레벤후크는 16살이 되던 해 직물상의 견습생 일을 시작해서, 22살이 되기 전 직물점의 상인이 되었다. 그는 그 당시 비단 상인의 딸이었던 바바라 드메이(Barbara de Mey)와 결혼했다. 그리고 5명의 아이를 가졌는데, 그 중에 네 명은 어릴때 죽었다.

안토니는 1660년도에 시종(chamberlain)이 되었는데, 나중에는 와인의 검사를 위한 조사관이자 검사관이 되었다. 그의 직책과 아마도 얼마의 유산을 통해 시간이 지나면서 나중에 그의 유명한 취미생활이 된 것을 추구할 만한 넉넉한 수입이 생겼다. 그의 아내는 1666년 그가 34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5년뒤 칼빈파의 성직자이자 다른 직물상이었던 사람의 딸인 코넬리아 스왈미우스(Cornelia Swalmius)와 결혼했다. 그녀는 어느 정도 안토니의 과학에 대한 탐구를 일깨워줬다고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 업적들이 그들의 결혼 2년 이내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두번째 결혼은 1694년 그녀가 세상을 떠날때까지 23년동안 지속되었다. 그 이후 안토니가 1723년도에 죽기까지, 그의 마지막 딸이 그를 돌보았고, 그래서 그가 두번째로 홀아비가 된 후 29년동안 그의 과학적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안토니가 현미경을 발명한 것은 아니었지만 (복합 확대 렌즈(compound magnifying lenses)는 그가 태어나기 40년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그는 그 현미경의 배율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아마도 그의 직물거래시 조사할 때 사용하던 확대경에 친숙했었을 것이다. 그가 다녀왔던 단 한 번의 런던 여행(두 번째 결혼 중간인 1668년도에)을 통해, 그는 로버트 후크(Robert Hooke)의 인기 있던 새 책 마이크로그라피아에서 소개된 확대경을 통해서 본 그 때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자연의 세계에 접하게 되었다. 이 사건이 단지 5년 뒤에 활짝 피어난 현미경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레벤후크에게 불러 일으켰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아마 그 책이 그러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일까? 그의 두번째 아내 혹은 그의 지적인 친구들이 그랬을까? 레벤후크 자신의 자연에 대한 관심이 그랬을까? 어떻든지 그는 스스로 확대경을 연마하고 완벽한 위치에 고정시킨 뒤 검사시료를 볼 수 있는 곳에 위치시켰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에는 서투른 것이었지만, 그 당시에 후크, 스왐메르담(Swammerdam), 말피기(Malphighi), 혹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었던 것들에 비하면 매우 뛰어나서, 19세기까지 그것을 능가할 만한 것이 없었다. (전자현미경은 그 후 250년이 지나서 나왔다.) 그 당시의 복합 현미경은 색수차(chromic aberration)때문에 고전하고 있었고, 20배 이상의 배율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레벤후크는 그의 현미경에 핀머리(pinhead)보다 많이 크지 않는 작은 렌즈를 사용했고, 그의 우수한 시력을 사용하여 270배의 배율과 1.4 micron의 해상도를 얻어냈다. 이제 그는 사람의 눈으로 본 적이 없는 세계를 들여다보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었다.

그 당시의 다른 과학자들은 나뭇잎이나 직물과 같이 잘 알려진 것들을 확대해서 보는데 만족하고 있었다. 레벤후크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기 원했다. 그의 현미경을 통해서 놀라운 것들을 발견하고 있었던 1673년에 한 친구가 그를 영국의 왕립학회(Royal Society)와 연결해 주었다. 안토니는 한 친구가 그렸던 벌(bee)의 침과 입, 이(louse), 곰팡이(fungus) 그림을 그곳에 보냈다. 저명한 영국의 과학자들은 처음엔 네덜란드어 밖에 말할 줄 모르는 훈련받지 못한 비전문가의 주장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1676년도에 그는 물에 사는 미생물들을 발견한 것을 묘사하면서, 이들은 너무도 작아서 ”만 개 정도의 이 살아있는 생명체들이 하나의 거친 모래 입자와 비슷할 것이다” 라고 기술했을 때, 왕립 학회는 그의 보고서가 진짜 관찰된 것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조사하기 위한 조사단을 파견했다. 그 이유는 특히 로버트 후크 자신이 (그때까지 높은 배율의 현미경을 가지고 있었던) 이 실험을 반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레벤후크의 관측이 사실이고 정확한 것으로 밝혀졌을 때 그의 명성은 높아졌고, 1680년에는 이 훈련받지 못한 비전문가가 왕립학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는 후에도 결코 다시 런던을 방문하거나 회의에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이 네덜란드의 옷감 상인은 50여년동안 영국의 과학자들과 샘플들을 첨부한 수백통의 편지를 보내며 활발한 교류를 했고, 그 중의 몇몇은 현재까지 왕립학회 도서관에 그가 직접 만든 현미경과 함께 보관되어 있다. (그가 만든 현미경은 수백대였으나,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단지 9대 이다.)

레벤후크의 편지는 발견에 대한 흥분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한 방울의 물에서 발견된 생물체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물속에 있는 대부분의 생명체의 움직임은 아주 신속하고, 다양하며, 위, 아래, 원을 그리고 있으며 놀라지 않을 수 없음을 고백한다. 나는 몇몇 이 작은 생명체들이 치즈껍데기, 밀가루, 곰팡이, 그리고 비슷한 것에서 발견되는 가장 작은 것보다 수천배 이상으로 작다고 판단한다.... 이 중에서 몇몇은 매우 작아서 수백만 개가 하나의 물방울에 담겨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작은 크기를 비교할 만한 살아있는 생명체를 본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연이 이러한 엄청나게 작은 생명체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상상할 수 조차 없기에, 이 놀라운 광경에 대해 더욱 놀라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말은 그 당시 영국의 과학자들에게는 품위가 없는 것으로 보였음에 틀림없다. 그는 그의 이빨 사이에 끼어있던 치태(plaque)를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나는 수많은 작은 생물체들과, 아주 예쁜 움직이는 것들, 가장 큰 종류의 것들이 아주 강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을 가지고, 물고기가 물 속을 헤엄치듯이 물(침)속을 뚫고 지나가는 것을 놀라움으로 보게 된다.... 두번째 종류는 잡아늘인 실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현미경을 통해 보였던 것들에 대한 안토니의 강한 호기심과 놀라움은 거의 촛불 수준의 조명 하에서, 그의 5cm 가량의 작은 현미경을 계속 들여다볼 수 있게 했던 힘과 인내심을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일을 해낼 수 있었던) 동기에 대해서 그 자신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오랬동안 해 왔던 내 일은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찬사를 얻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고,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보게된 것들에 대한 알고자하는 열망을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레벤후크는 처음에 박테리아, 윤충류(rotifers), 그리고 종벌레(Vorticella)와 같은 원생생물(protists)들을 관찰했다. 그는 혈액속의 세포를 관찰했고, 처음으로 정자(sperm)의 물결치는 움직임을 본 사람이었다. 그는 실험 생물학의 분야에서 일하는 다른 사람의 모델이 되었을 기술적 기능들을 실험하면서, 현미경 렌즈에 가져다 댈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과 미지의 것들에 대해서 조사했다. 또한 그는 미신들을 타파하기 위해서도 일했다. 독립적으로 일하며, 그 당시 과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잘못된 인식들에 대해서 전혀 공유하지 않으면서, 그는 진실을 찾기 위한 좋은 실험적 방법들을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신비한 글씨가 불에 탄 종이처럼 보이는 물체에서 발견됐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하늘에서 온 메세지로 여겼었다. 안토니는 그것이 단지 말라 있는 조류(algae)의 층(sheet)이라는 것을 밝혔다. 그는 그러한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법의학적 모델(forensic analysis)을 사용했는데, 심지어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과정을 재현해 보이기도 하였다.

더 중요한 것은 레벤후크는 그 당시에 보급되어 있던 생명체가 무생물로부터(이슬에서 뱀장어가, 모래에서 조개가, 고기에서 구더기가, 그리고 밀가루에서 바구미가) 생겨난다는 자연발생설(spontaneous generation)의 원리를 비판했다. 그는 개미, 벼룩(fleas), 홍합(mussels), 뱀장어, 그리고 다양한 벌레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완전한 주기를 관찰했다. 잘못된 자연발생설 개념이 파스퇴르(Louis Pasteur)에 의해서 종말을 맞을 때까지 150여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진화론적 철학의 영향에 의해 ‘화학진화(chemical evolution)’라는 새로운 형태의 자연발생설이 또 다시 생겨나기는 했지만).

안토니 반 레벤후크(Antony van Leeuwenhoek)는 그의 말년에 어느 정도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 경이로운 작은 미생물들을 보기 위해서, 그의 작은 가게를 방문한 사람들 중에는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 러시아 황제), 영국 국왕 제임스 2세(King James II),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2세(Frederick II)가 있었다. 그는 왕립학회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 당시 주름잡던 과학자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그는 명성이나 위치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그가 너무 바쁘거나 약속 없이 찾아오면 왕족에게도 퇴짜를 놓기도 했다. 진실로 그의 정열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조사하도록 허락해 주신 자연의 경이로움(wonders of nature)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항해학, 천문학, 수학과 또 다른 자연과학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었다. 그는 ”사람은 어떤 것이든지 성취될 수 있다면 그 생각으로 항상 바쁠 것이다”라고 말했다.

레벤후크에 대한 전기들이 주로 그의 실험적 업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레벤후크의 기독교인으로서의 헌신된 자세에 대한 것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몇 가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는 성경의 권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확고한 하나님의 창조가 기초를 이루고 있는 네델란드 개혁 교회(Dutch Reformed tradition)에서 태어나 자랐고, 교회는 사람들이 연구를 통해 자연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솜씨를 조사하는 것을 이해하고 격려하였다. 그의 종교관에 대해서 인디애나 대학의 웨스트폴(Richard Westfall)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세례를 받고, 칼빈(Calvist) 교회에 묻혔으며, 그의 두번째 아내는 칼빈주의(Calvinist) 성직자의 딸이었다.” 또한 레벤후크는 분명히 자연발생설(spontaneous generation)과 같은 미신과 싸웠음이 분명하다. 아미테이즈(Mark Amitage)는 레벤후크가 다음과 같이 말한 구절을 찾아내었다. ”이러한 작은 동물들이 우연히 저절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정말 기적일 것이다.” 이것은 그가 이러한 미생물들이 원래 창조되었고, 창조주가 고안한 방법에 의해 증식되고 있음을 믿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레벤후크 시대에 왕립학회(Royal Society)는 주로 로버트 보일(Robert Boyle)의 전통 아래 주로 청교도(Puritans)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들이 서로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출판물들과 심지어 묘비에서도 언급하고 있을 정도로 자부심과 기쁨을 그들과의 관계에서 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레벤후크의 글들에서 그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경외함과 놀라움을 가지고 기쁘게 받아들였음을 느낄 수 있다. 믿음의 과학자들(Scientists of Faith, Kregel, 1996)에서 그레이브(Dan Graves)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생명체를 작고 위대하게 만드신 하나님의 설계에 대한 놀라움과 경외로움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그의 장점은 인내심, 간결함, 굽히지 않음에 있었다. 그는 모든 이론, 심지어 자신의 이론 위에 있는 진실을 사랑했다. 그에게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자신의 것을 증명했듯이, 그들의 요점을 증명할 것을 요구했다.” 

 따라서 구체적으로 그의 믿음을 나타내는 말들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만, 그의 작업이 강한 기독교적 헌신 이외의 것에 의해서 동기가 부여되었다고 하는 것은 찾을 수 없다. 어떤 경우라도 앞에서 이야기된 바와 같이, 레벤후크의 업적과 기독교적인 세계관 사이에 분명한 일치가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레벤후크는 그의 마지막 관찰 내용을 구술해서 왕립학회에 전달한 후 얼마 뒤에 세상을 떠났다. 분명히 그의 길고 충만한 삶은 과학적 의문에 대한 열정으로 꽉 차 있었다. 현미경은 그의 죽음 이후 많은 발전을 했다. 과학자들은 이제 수백 배가 더 높은 100,000 배율의 전자현미경을 사용해서 레벤후크가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DNA, 분자모터, 세포의 동력기관 등과 같은 세계를 조사하고 있다. 현미경 아래에 광대한 창조의 수평선이 아직도 미탐사 상태로 남아있다. 혹시 당신은 레벤후크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이 자연에 대한 과학적 조사(scientific investigation of nature)가 기쁨의 원천이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알게 되기를 원한다.

그레이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안토니 반 레벤후크의 삶은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있었는데, 그 중의 대부분은 아마도 우리에게 태양 아래 우리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있음을 보여줌에 의해서일 것이다”



*참조 : Antony van Leeuwenhoek

https://crev.info/?scientists=antony-van-leeuwenhoek

.Louis Pasteur’s Views on Creation, Evolution, and the Genesis of Germs.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rj/v1/n1/louis-pasteurs-views

.The World’s Greatest Creation Scientists from Y1K to Y2K.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creationsafaris.com/crev0304.htm 

출처 - CEH, 2004. 3.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212

참고 :

김무현
2006-03-14

헨리 모리스 박사를 추모하며


      2006년 2월 25일, 현대 창조과학운동의 아버지이며, 탁월한 성경변증학자 였던 헨리 모리스 박사께서 87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그는 죽는 날까지 저술에 몰두하였고 설교와 강의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의 60권이 넘는 주옥같은 창조과학 클래식을 유산으로 남겼다.

하나님께서 마틴 루터를 들어 쓰셔서 타락으로 치닫던 중세 카톨릭 교회를 참 신앙과 말씀으로 돌이키셨듯이, 후대에 헨리 모리스 박사를 지명하여 부르셔서, 인본주의적 진화론과 성서비평학의 영향으로 자유주의로 떠내려 가던 미국의 기독교에, 다시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기록된 그대로 믿으려 하는 근본주의 및 보수 복음주의의 새 물결을 일으키셨다.

그 때, 이미 영국과 독일의 교회들은 인본주의, 진화론, 자유신학의 영향으로 날로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1925년 그 유명한 스콥스 재판(Scopes trial) 이후로는 진화론이 과학적 사실로 공인되어가고, 모세의 창세기를 포함한 오경은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신화정도로 취급되기 시작하였다. 그로 인해  그 당시 믿는 과학자들의 모임이었던 ASA(American Scientific Affiliation)마저도 진화론 일색의 칼라로 바뀌게 되었고, 신학자들은 진화론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간격이론(gap theory)및 날-시대 이론 (day-age theory)등 타협이론들을 정론으로 받아 들이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인본주의적 진화론과 자유주의 신학의 위세에 눌려 강한 압박을 받고 있었던 보수 복음주의에 숨통을 터 준 책이 바로 헨리 모리스 박사 (죤 휘트콤 박사 공저)의 '창세기 홍수 (The Genesis Flood, 1961)'이다. 이 명저를 기반으로 창조과학자들은 창세기의 기록과 같은 대격변의 패러다임 안에서 지각의 퇴적층과 화석들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자유주의 및 복음의 세속화에 의분을 느낀 헨리 모리스 박사는 계속해서, 1967년, 창세기와 노아홍수를 계시된 말씀 그대로 믿는 창조과학자들의 모임인  CRS(Creation Research Society)를 진수시키고, 1970년, 창조과학 연구 대학원인  ICR(Institute of Creation Research)을 설립하여 창조과학의 기반을 닦기 시작하였다.

헨리 모리스 박사는 토목공학자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ASCE (American Society of Civil Engineers) 최고 명예인 Fellow에 선출되었으며, ICR 설립 바로 전까지 명문대학인 VPI(Virginia Polytechnic Institute) 토목공학과의 Chair Professor로 재임했었다. 또한, 일반 수리학의 명교과서인 'Applied Hydraulics in Engineering'의 저자이기도 하다.

현재, 창조과학 변증 및 선교로 그 활동이 매우 활발한 AIG(Answers In Genesis)의 원장인 켄 햄은 그의 사역의 시발점이 바로 헨리 모리스 박사의 책 창세기 홍수라고  간증하고 있다. 필자가 창조과학 및 성경변증의 개인적 소명을 갖게 되는데, 결정적인 동기 부여를 한 책들도 바로 헨리 모리스 박사의 저서들이다.

헨리 모리스 박사는 이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창조주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 안식하고 있으리라. 그가 믿음의 거장으로서 유산으로 남긴 탁월한 저서들과 삶의 본들은 오늘날 이 땅에 남아 있는 우리 믿는자들에게 다시 한번 성경을 수호하는 전도자로서의 새로운 다짐과 각오를 하게 한다.


구분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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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Ann Lamont
2006-03-02

존 레이 (John Ray) 

: 생물학의 창시자이며 독실한 기독교인 (1627-1705)


     존 레이(John Ray, 1627-1705)는 로버트 보일(Robert Boyle)이 태어난 해, 그리고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 죽은 해인 1627 년에 태어났다. 보일은 현대 화학의 창시자이며, 베이컨은 실험과 이성적인 논의(rational argument)를 결합한 현대의 과학적 방법을 시작한 사람이다. 크로우더(J. G. Crowther)는 그의 책 ‘영국 과학의 설립자들(The Founders of British Science)’에서, 이들 세 명의 헌신적인 기독교인의 업적 사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현대의 보편 과학(universal science)을 창조하는 첫 번째 단계는 자연의 내용물(contents of nature)을 기록하고 분류하는 작업이라고 지적한 사람은 베이컨이며, 화학에서 그것을 시작한 사람은 보일이다. 생물학에서는 존 레이가 상당한 업적을 수행했다.”[1]

존 레이는 1690년에 출간된 영국의 식물에 관한 그의 책 서문에서, 고대 그리스 사고의 잔존물이었던 (실제 세계에서의 시작점 없이) 논리적인 논의만 주장하던 이전의 철학 대신에, 실험과 논리를 결합시킨 베이컨의 개념으로 대치된 시대에 그가 태어난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다.


초반의 삶

존 레이는 1627년 11월 29일에, 영국 에섹스(Essex)에 있는 블랙 노틀리(Black Notley)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마을 대장장이의 막내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풀을 모아서 약용으로 사용했으며, 그 지역에서는 그녀 자신의 치료용과 아픈 사람들을 위한 연민으로 그것을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식물에 대한 존의 흥미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풀을 채집할 때인 초기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존은 그의 고향 마을에서 약간의 기초 교육을 받았다. 지역의 교구목사는 그가 학문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브레인트리(Braintree) 근처의 중등학교(grammar school)에 다니도록 주선했다. 또 다시 그의 잠재력이 인정되어 16살에 캠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대학에 들어갔다.

대부분 부유한 신사의 자제였던 캠브리지 학생들과는 달리, 존 레이는 가난했으며 필요경비를 지불할 수 없었다. 그 후의 아이작 뉴턴과 마찬가지로, 레이는 트리니티 대학 교직원의 하인으로 활동함으로써 수업료를 면제받았다. 그는 1651년에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트리니티 대학의 강사로 남았다.


기독교 신앙

레이는 기독교 신앙에 깊게 헌신되어 있었으며, 온유하고 감성적인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는 자기 학생들의 생각이 물질주의로부터 하나님께로 돌려지기를 원했다. 크로우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레이는 학생들에게 게임이나 유흥에 전념하지 말고, 그가 자연의 절묘한 작업에서 예시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를 묵상함으로써 보다 더 큰 만족을 얻을 것을 제안했다.”[2]

비록 대학에서 식물학과 동물학이 아직 학과목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었지만, 레이는 그의 학생들이 그들의 개인 시간에 그 지역의 식물상(相)과 동물상을 조사하는 데에 그와 함께 참여할 것을 권했다. 레이는 식물학에 관한 그의 첫 번째 책인 ‘캠브리지 부근의 식물에 관한 목록(a catalogue of the plants around Cambridge)’을 1660년에 출판했다.

레이는 항상 안수 받은 목사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국가가 교회의 문제에 상당히 간섭하는 시대에 살았다. 왕정주의자들이 권력을 되찾았을 때, 그들은 교회의 최종 예배의식을 다시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레이는 "외적인 수행에 많은 의존을 하는 종교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내부의 영적인 제도(institution)와 양심의 정화(refinement)에 훨씬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3] 레이는 그의 믿음을 타협하려고 하지 않아서 1662년에 대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이제 레이는 자기 자신과 과부가 된 어머니를 부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레이의 이전 학생이었으며, 부자였던 프란시스 윌러비(Francis Willughby, 1635-1672)가 자신의 경비로 과학적인 연구를 공동으로 수행할 것을 제안했다. 레이의 면직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실질적인 전환점이 되어서, 그의 위대한 업적인 생물학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로마서 8:28절과 같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과학에 대한 레이의 기여

10년 동안 레이와 윌러비는 영국의 섬들과 그 밖의 유럽을 돌며, 관찰하고 시료들을 수집했다. 윌러비는 동물들에 초점을 맞춘 반면, 레이는 식물들에 집중했다. 그들의 목적은 살아있는 생물들을 상세히 기록하고, 그것들을 한정된 숫자의 강(綱, class)으로 분류하는 것이었다.

1670년에 레이는 영국 섬의 식물 목록을 출판했다. "거기에는 식물의 약용에 대한 긴 절을 담고 있었는데, 거기서 점성술, 연금술 및 마법을 고발하고 있었으며, 증거를 요구하는 데 있어서 냉혹하였다.”[4]

그때까지의 그의 업적을 인정받아서 레이는 영국의 이름난 위대한 과학자 그룹인 왕립학회의 회원이 되었다. 후에 왕립학회의 회장(secretary)이 되어달라고 요청 받았을 때, 레이는 생물학에 관한 그의 연구에 전념할 시간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윌러비는 1672년에 죽었지만, 윌러비의 뜻에 따라 이 목적을 위해 풍부하게 제공된 기금을 가지고 레이는 그들의 위대한 과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 레이는 자기 자신의 과업을 진행할 뿐 아니라, 윌러비가 동물에 관해서 수집해 놓은 방대한 양의 데이터들을 분석하고 분류하고 해석하는 업무도 수행했다. 레이는 1676년에 새(birds)에 관한 책을 출판했고, 1685년에 물고기(fish)에 대한 책을 출판했다. 새에 관한 그의 책은 "과학적인 조류학의 기초를 놓았다."[4]

그리고 나서 레이는 유럽과 그 외 지역의 식물에 대한 기록과 분류를 수행하여, 식물왕국에 대한 일반적인 목록을 만들었다. 그는 떡잎이 두 개냐 아니면 하나밖에 없느냐에 따라 꽃을 피는 식물을 분류했다. "이것은 쌍떡잎식물과 외떡잎식물로 구별한 것으로 이후의 모든 식물학자들이 채택한 구분이다."[4]

종(species)을 의미하는 것의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한 사람이 레이였다. 린네(Linnaeus, 또 다른 헌신된 기독교인)는 레이에 뒤이어 종을 그의 분류체계의 기본원칙으로 사용했는데, 관련된 종들을 모아서 속(genera)으로, 관련된 속들을 모아서 더 높은 범주 등등으로 정하였다. 따라서 레이의 식물에 관한 일반적인 목록이 "린네가 현대의 형태로 도입한 체계적인 분류의 기본 토대가 되었다."[5]

파충류(reptiles)와 포유류(mammals)에 관한 그의 1693년의 책에서 레이는 이빨과 발굽과 발가락에 따라 동물들을 분류했다. 동물에 대한 이와 같은 논리적인 분류는 이전의 체계에 대한 대단한 개선이었다.

레이의 통찰력은 다른 분야에서도 그의 시대를 앞서갔다. 아시모프(Asimov)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화석이란 멸종된 생물체의 석화된 잔존물이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100년 이후까지 생물학자들에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5]


진화론에 반대하다

레이는 그의 기독교 신앙과 자신의 과학적 작업 사이에서 모순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상 그는 과학적 연구란 "인간 재능의 적절한 실행이며 기독교인 탐구의 합법적인 영역"이라고 믿었다.[4]

레이는 만물(하늘들, 땅, 그리고 살아있는 생명체들)은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고 확고하게 믿었다. 그는 살아있는 생명체의 구조와 기능에 있어서 무한히 정교한 부분들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분명한 증거라고 믿었다. 그는 이것을 널리 읽히는 두 권의 책에 표현하였다. 두 번째 책인 ‘창조의 작업에 드러난 하나님의 지혜(The Wisdom of God Manifested in the Works of the Creation)’는 고전이 되었다. 그는 ‘거룩한 삶의 추구(Persuasive to a Holy Life)’라는 제목의 신학책도 썼다.

레이는 왕립학회에, 생명이 무생물로부터 자연적으로 저절로 생겨날 수 있다는 개념인 자연발생설에 완전히 반대되는 논문을 썼다.[6] 레이는 자연발생설과 상치되는 프란체스코 레디(Francesco Redi)의 실험을 인용했다. 레이는 "내가 관측하고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런 것은 자연에 없다는 것이다” 라고 말하며[7], 자연발생설을 '인류와 다른 동물들의 첫 번째 출현에 대한 무신론자들의 허구적이고 터무니없는 설명” 이라고 간주했다.[7]

레이는 식물과 동물이 하나님에 의해 종류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지만, 한때는 하나의 종에서 다른 종으로 변화할 수 있는지 의심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식물과 동물에 대해 광범위한 과학적 연구를 수행한 후에 종들은 구별성을 유지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식물과 동물은 "처음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작품이며, 그 분에 의해 처음에 만들어진 것과 동일한 상태와 조건으로 오늘날까지 보존되었다"고 결론지었다.[8] 불행스럽게도, 이 설명은 ‘종의 불변성(fixity of species)’으로 이해되어서 진화론자들의 손에 넘어갔다. 다윈은 갈라파고스 군도에서 다양한 ‘종’의 핀치새들을 관찰한 후에, 그들이 군도에 도착한 적은 숫자의 핀치새들로부터 계통되어져 나왔다는 합리적인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종들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며, 창조론자들이 틀렸다고 주장되었다. 그러나, 레이는 아마도 다윈의 핀치새들은 진화론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라, 개(dogs) 안에서의 다양성과 같이 창조된 종류(kind) 내에서의 다양성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의 노년

존 레이는 44세에 결혼했다. 그의 어머니가 1679년에 죽었을 때, 그와 그의 아내는 그가 어머니를 위해 지어주었던 블랙 노틀리의 집으로 이사했다. 그의 노년에 어린 네 딸들은 표본들을 수집하고 번식시키는 데에 훌륭한 조수들이 되었다.

그의 성공과 명성에도 불구하고 레이는 겸손을 유지했으며, 부자나 가난한 자들과 쉽게 교제했다. 그는 1705년 1월 17일에 죽을 때까지 블랙 노틀리에서 살며 일했다.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친구가 레이에 대해 이렇게 썼다. "거래에 있어서는 누구도 그보다 확실할 수 없었으며, 대화에 있어서는 누구도 그보다 겸손하거나, 정중하거나, 상냥할 수 없었으며, 하나님에 대해서는 누구도 그보다 신실할 수 없었으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에 대해서는 누구도 그보다 동정적이거나 자비로울 수가 없었다.”[9]

그의 길고도 열매가 많은 생애 동안에, 레이는 식물학과 동물학의 기초를 놓았을 뿐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것과 그것을 따르는 삶과 행동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간증하고 있는 것이다.

 


References and notes

1. J.G. Crowther, Founders of British Science: John Wilkins, Robert Boyle, John Ray, Christopher Wren, Robert Hooke, Isaac Newton, Cresset Press, London, p. 94, 1960.
2. Ref. 1, p. 105.
3. Ref. 1, pp. 107-8.
4. McGraw-Hill Encyclopedia of World Biography, 9:118, McGraw-Hill, New York, USA, 1973.
5. I. Asimov, Biographical Encyclopedia of Science and Technology: The Lives and Achievements of More Then 1000 Great Scientists from Ancient Greece to the Space Age, 3rd edition, Doubleday & Co. Inc., Garden City, New York, USA, p. 137, 1982.
6. The evolutionary ideas of spontaneous generation and of species being able to change from one to another were not originated by Charles Darwin. These ideas had been around since the time of the ancient Greeks. Darwin merely put various existing ideas together into his theory of evolution and popularized them.
7. J. Ray quoted in Ref. 1, p. 126.
8. J. Ray, quoted in: H.M. Morris, Men of Science, Men of God, Master Books, El Cajon, CA., USA, p. 18, 1982.
9. W. Derham, quoted in Ref. 1, p. 129.


*Ann Lamont, B.Sc., M.Ed.St., was for many years a teacher of mathematics and science, and a researcher in education. She is the author of 21 Great Scientists who Believed the Bible (CSF, October 1995).


*참조 : John Ray

https://crev.info/?scientists=john-ray

위대한 창조과학자들 (List of great Creation Scientists)
http://crev.info/?scientists=index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1/i1/ray.asp 

출처 - Creation 21(1):51–53, December 1998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156

참고 :

한국창조과학회
2006-02-28

헨리 모리스 박사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다. 

(Dr. Henry Morris has died)


       ICR (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의 명예 회장이고, 현대 창조과학 운동(특별히 1960년대 초에 쓴 ‘창세기 대홍수’를 통해)의 아버지인 헨리 모리스(Henry Morris) 박사가 최근 일련의 작은 뇌졸중으로 쇠약한 상태에 있다가 2006년 2월 25일 토요일 저녁, 그의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갔다.

87세의 헨리 모리스 박사는 그동안 샌디에고에 있는 요양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왔었다. 그의 아들인 헨리 모리스 3세(Henry Morris III, ICR 부회장) 박사의 말에 의하면, “아버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설득력과 조심성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나의 동생 존(ICR 회장)과 누이인 메리(Mary)와 레베카(Rebecca)가 주님 품으로 떠나실 때까지 함께 있었습니다.” 

지난 토요일 밤 ICR 회원들과 가족, 친구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모리스 3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아버님은 주님의 많은 축복을 받으셨고 온전한 삶을 주님께 드렸다고 생각됩니다. 이제는 당신의 주님 앞에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는 칭찬을 받으며 기뻐하고 계실 것입니다.” 

AIG–USA의 회장이고, AIG-Australia의 공동창설자인 켄 햄(Ken Ham)은 AiG 리더쉽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모리스 박사님은 나의 믿음의 영웅들 중 한 분이십니다. 그는 현대 창조과학 운동의 아버지로서 주님을 높여 드렸던 사람입니다. 모리스 박사님과 휘트콤 박사님이 공저로 쓰신 저 유명한 책 ‘창세기 대홍수(The Genesis Flood)‘는 전 세계에 현대 창조과학 운동의 불꽃을 일으킨 주님의 책이었습니다. 그 책은 내가 읽었던 최초의 주요한 창조과학 책이었고, 그래서 호주에서 창조과학 운동의 불을 지피게 하였습니다. 가족들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가족들과 ICR의 스탭진들을 위해서, 그리고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그의 생애 동안에 저술했던 많은 책들과 글들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되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도록 기도를 부탁드린다.

  

헨리 모리스 박사님이 주님의 품에 안기다
(Dr. Henry Morris is home with the Lord)

Feb 27, 2006, ICR News
http://www.icr.org/index.php?module=news&action=view&ID=59


     최근 몇 주 동안 일련의 작은 뇌졸중 후에, ICR의 설립자였고 회장이셨던 헨리 모리스(Henry Morris) 박사님께서 2006년 2월 25일 오후 6시 30분, 향년 87세의 나이로 그의 창조주이시며,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스리스도의 품안으로 평화롭게 안기셨다.

헨리 모리스 박사는 현대 창조과학 운동의 아버지로서 여겨지고 있다. 그는 성경적 창조론, 과학적 창조론, 성경 주석 등에 관한 60여편의 책을 저술하였다. 그의 가장 최근의 작업은 젊은 지구 창조론(young-earth creationism)을 지지하는 수천의 주석을 포함하는 'the New Defenders Study Bible' (지난 달에 출판됨) 이었다.

모리스 박사는 전 세계적으로 현대 창조과학 운동을 시작하고 확립하기 위해서 많은 놀라운 방법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사용되어졌던 뛰어난 과학자요 신학자였다. 그는 온유하고 겸손하고 신실했던, 그리고 그 앞에 당한 경주를 인내로써 경주하며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달려갈 길을 마친 하나님의 종이었다. (히 12:1-2)

추도 예배가 이번 주 화요일(2006. 3. 2)에 Shadow Mountain Community Church에서 있을 예정이다. 모리스의 가족과 ICR의 전체 스탭들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드린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answersingenesis.org/docs2006/0225morris.asp ,

출처 -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153

참고 :

Ann Lamont
2005-08-17

요하네스 케플러 (Johannes Kepler, 1571-1630) 

: 저명한 과학자이며 동시에 헌신적인 기독교인


      ”자연의 세계, 인간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 - 이들은 서로 잘 들어맞는다.” - 케플러


  요하네스 케플러는 독일의 바일데어슈타트(Weil der Stadt) 라는 마을에서 1571년12월 27일에 태어났다. 어릴 적에 요하네스는 매우 작았으며 자주 병을 앓았다. 세 살 때 그는 천연두에 걸려서 죽기 직전의 상태로 수개월을 지냈다. 그의 소년시절도 불안정했고 불행했다. 그의 아버지는 용병이었기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 집을 떠났으며, 어떤 때는 한 번에 수년씩 걸렸다.

요하네스의 어머니가 그의 남편과 지내기 위해 집을 떠났을 때 요하네스는 할머니와 함께 남았다. 그의 부모와 떨어진다는 것이 요하네스에게는 애처로운 일이었지만, 그 기간 동안에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주셨다. 헌신적인 기독교인이었던 그의 할아버지는 어린 요하네스의 믿음이 자라도록 그를 격려하였다. 요하네스의 할아버지는 비록 가난하기는 하였지만, 교육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그를 학교에 보냈다. 그의 선생은 그 소년의 학습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요하네스의 부모가 몇 년 만에 돌아왔을 때, 그의 아버지인 하인리히(Heinrich)는 여관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하인리히는 그의 아들을 학교에 보내는 데 드는 돈을 지불할 생각이 없었다. 대신에 그는 요하네스를 여관에서 써먹을 수 있는 싼 노동력으로 보았다. 따라서 하인리히는 그의 아들이 학교를 그만두게 했다. 그러나 후에 여관 사업이 기울어서 실제로 요하네스의 도움이 필요 없어졌다. 그의 예전 선생의 도움으로, 요하네스는 뷔르템베르크(Wurttemberg) 공작으로부터 장학금을 얻는 데 성공하여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요하네스의 주정뱅이 아버지는 마지못해 그를 학교로 돌려보냈다.


교육

공작의 지속적인 배려로, 요하네스 케플러는 1587년에 튀빙겐 대학(University of Tubingen)에서 학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라틴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성경, 수학, 천문학을 배웠다. 케플러에게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친 미가엘 마스트린(Michael Mastlin)은, 그 당시 극소수인 천문학 교수로서, 지구를 포함한 행성이 태양의 주위를 공전한다는 코페르니쿠스의 개념을 받아들였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전히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이라고 믿고 있었다.

케플러는 1588년에 학사 학위를 받았고, 1591년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튀빙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케플러는 젊은 시절 동안에 헌신적인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하였다. 그가 죽기 바로 전에 말했던 것처럼 그는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서, 그 안에 모든 피난처와 위로가 있다” 라고 믿었다.[1] 케플러는 대학을 마친 후에 루터교의 목사로서 하나님께 봉사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독특한 재능을 가진 이 젊은 사람에게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1594년에, 케플러는 오스트리아의 그라즈(Graz)에 있는 루터파 고등학교에, 방금 죽은 수학 선생을 대신하여 와줄 것을 요청 받았다. 신학 수업을 마칠 때가 거의 다 되었지만, 케플러는 가르치는 지위를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천문학과 점성술

케플러는 그라즈에서 수학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교구의 수학자가 되었다. 이 지위는 땅을 측량하고, 상업에 사용하는 무게와 치수의 정확성에 관한 논쟁을 조정하며, 달력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날짜를 나열하는 이외에, 오늘날의 달력에는 공휴일과 학교의 휴일, (보름달과 초승달 등의) 달의 위상 등에 관한 정보를 종종 담는다. 심지어 어떤 달력에는 운동 경기 날짜와 공공 서비스 요금의 지불일 같은 것도 싣는다. 마찬가지로, 케플러의 시기에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유용한 정보를 실어줄 것을 기대했다. 즉, 농부들에게 농작물을 심고 거두는 시기를 알려 주기도 하고, 군사작전의 지휘자에게 도움을 주는 내용과 연애 사업에 도움을 주는 정보 등을 포함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태양과 달과 행성들의 상대적 위치와 지축의 기울기가 연관되어 사계절 및 달의 위상, 조류, 일식과 월식 등이 결정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농사와 낚시, 군사 계획, 그리고 다른 여러 일들과 과학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현대에 있어서도, 어떤 군사적 공격은 계절과 달빛에 적합하도록 시간을 조절한다).

그에 관한 오늘날의 지식으로는, 천문학이라는 과학에 근거한 이치에 맞는 결론과 점성술에 근거한 사실 무근의 주장을 분별할 수 있다. 그러나 케플러의 시대에는 천문학과 점성술의 차이점에 관하여, 일반 사회나 대학 모두에서 상당한 혼란이 있었다. 천체의 운동에 관하여 제한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지구상의 어떤 사건이 하늘에서 일어난 사건에 영향을 받았으며 어떤 사건이 영향을 받지 않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케플러는 계속하여 달력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치에 맞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기 위하여, 그의 예측의 정확도를 계속하여 검사하기로 했다. 이 과정의 일부로서, 케플러는 1601년에 ”별들이 인간의 삶을 지시한다는 미신적인 견해를 부인하는” 책을 출판했다.[2] 케플러는 점차적으로 점성술의 다른 관점들도 부정했다. 케플러의 자서전을 쓴 티너(J. H. Tiner)는, ”요하네스는 점성술의 장기적인 정확도를 조사한 첫 번째 과학자이었다. 그의 기록을 보면, 점성술을 믿는 것은 위험한 사업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라고 지적했다.[3]


행성의 운동

케플러는, ”자연의 세계와 사람의 세계와 하나님의 세계 - 이 세 가지는 서로 잘 들어맞는다”고 강하게 믿었다.[4] 특히 케플러는, 지능이 뛰어난 창조주가 우주를 설계했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논리적인 전형(pattern)에 따라서 작동해야 한다고 추론했다. 그가 볼 때, 혼돈된 우주의 개념은 하나님의 지혜와 상응하지 않는다. 그와 대조적으로, 다른 많은 과학자들은 간단한 논리적 전형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제자(사진의 사람)로부터 천문학을 배웠다. 행성 운동에 관한 케플러의 제1법칙 : 모든 행성은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의 궤도를 그리며 운동한다. 태양은 타원의 두 초점 중 하나에 위치한다.


행성 운동에 관한 케플러의 제2법칙 : 태양과 행성을 연결하는 직선은 같은 시간 동안에 같은 면적을 휩쓸고 지나간다. (이것은 행성이 태양에 가까울 때 더 빨리 지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에 케플러는, 어느 기간 동안 행성의 위치에 관한 정확한 자료를 입수하지 않고,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수학에 근거하여 행성 운동의 배후에 깔려 있는 전형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그는 1595년에 쓴 ‘우주의 신비(Cosmic Mystery)’라는 책에서 그의 생각을 제안하였다. (과학의 경우에 있어서 종종 그렇듯이) 그의 개념 중 많은 것들이 훗날에 옳지 않다고 밝혀지기는 하였지만, 그 책의 출간으로 인하여 케플러는 저명한 덴마크 천문학자인 티코 브라헤(Tycho Brahe)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티코 브라헤는 케플러의 수학적 능력과, 수학을 천문학에 적용하려는 열정에 감명을 받아서 그의 천문학자 팀에 참여하도록 초청하였다. 그들 천문학자들은 하늘을 지나는 행성들의 경로에 관하여 수년 동안 도표를 만들었지만, 그들이 본 복잡한 경로의 이치를 맞출 수 없었다. 케플러는 1600년에, 프라그(Prague)에 있는 티코 브라헤의 천문대에서 그와 합류하였다. 케플러에게는 화성의 궤도를 조사하라는 임무가 부여되었다. 마침내 그는 행성의 운동에 관한 문제를 실제로 과학적으로 공략하는 데 필요했던 자료를 입수했다.

행성 운동에 관한 케플러의 제3법칙 : 임의의 두 행성의 회전 주기(P)의 제곱비(ratio)는 태양으로부터의 평균 거리의 세제곱비와 같다. 즉, r13/r23=P12/P22


케플러의 시대에는, 행성의 경로가 원이거나 원의 결합이어야 한다는 개념이 거의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케플러는, 원을 복잡하게 결합하더라도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아냈다. 보편적인 사고에서 돌아서서, 케플러는 ”원이 아닌 경로를 시도하다가 마침내 올바른 답을 발견했다 : 화성은 타원 궤도로 공전하며 태양은 그 초점 중의 하나를 점유하고 있다.”[5]

더 나아가 케플러는 과거에 생각하던 것처럼 행성은 같은 시간 동안에 같은 거리를 이동(즉, 속도가 일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대신에 그는, 태양과 행성을 연결하는 가상의 선이 같은 시간 동안에 타원의 같은 면적을 쓸고 지나간다는 것을 밝힐 수 있었다. 이것은, 행성이 태양에 가까울 때 빨리 지나가며, 태양으로부터 멀어질 때 늦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케플러는 1609년에, 이들 두 개의 행성 운동 법칙을 ‘새로운 천문학(The New Astronomy)’이라는 책에서 발표하였다.

10년 후에 케플러는, 행성이 태양의 궤도를 일주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태양으로부터 그 행성까지의 평균 거리를 수학적으로 관련짓는, 세 번째 행성 운동 법칙을 수립했다. 이 법칙은 1619년에 ‘세상의 조화(Harmony of the Worlds)’ 라는 책에서 발표했다. 케플러는 그 책에서도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했다. "우리 주 하나님은 위대하시도다, 그의 권능은 위대하시며 그의 지혜는 끝이 없으시도다.” [6]

케플러의 기독교 신앙은 결국, 다른 많은 과학자들이 포기했던 행성 운동에 관한 수수께끼를 풀 수 있도록 그의 사고방식을 인도했다. 케플러는 행성의 운동에 관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반영할 수 있는 간단한 논리적 전형을 찾고자 했고, 발견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마치 건축가처럼, 질서와 법칙에 따라서 세상의 기초를 놓으시고, 그런 방식으로 모든 것을 측정하셨음을 알게 된다.” [7]

 

다른 발견들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은 그가 과학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었다. 이들 법칙은 과학적 사고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으며, 만유인력에 관한 아이작 뉴턴 경의 후기 연구에 토대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케플러는 과학의 기타 다른 분야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그는 새로운 별(초신성)을 발견했고, 인간의 눈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분석했으며, 망원경을 개선시키는 등 광학의 분야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는 별과 행성의 위치에 관한 정확한 자료를 출간하였는데, 그것은 항해자들에게 막대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계산을 빨리 할 수 있는 방법 등을 포함하여 수학에 많은 기여를 했으며, 여러 가지 고체의 체적을 연구했다.

케플러는 현대 과학의 창시자들 중의 하나로 인정을 받는다. 그가 쓴 세 권의 책, ‘우주의 신비(Cosmic Mystery)‘, ’새로운 천문학(New Astronomy)‘, ’세상의 조화(Harmony of the Worlds)‘에서 그는 궁극적으로 미신을 이성으로 대치하게 된 작업을 시작했다.’[8]

또한 케플러는 예수님의 탄생을 포함하여, 성경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의 연대를 연구하는 데에 시간을 투자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꿈(The Dream)’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이는 최초의 현대 공상과학 소설이라고 인정받는다.


비극적 인생

요하네스 케플러는 1630년 11월 15일에, 독일의 레겐스버그(Regensberg)에서 58세의 나이에 심한 질병으로 죽었다. 케플러의 인생은 비극으로 가득 찼었다. 그의 어린 시절의 불행과 질병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를 따라다녔다. 즉, 그의 여섯 자녀 중 세 명이 어린 시절에 죽었으며, 첫 번째 부인이 죽었고, 종교적 박해가 반복되었다. 케플러는 대부분의 통치자가, 그의 백성들이 통치자의 종교적 믿음을 그대로 따라 주기를 기대하던 시기에 살았다. 그러나 그는 통치자의 믿음의 변화에 따라서 그의 믿음을 바꾸기를 거부했다. 케플러는 성경의 사람이었으며, 성경에 모순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인간의 법칙은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자세는 그로 하여금 여러 가지 경우에 있어서 큰 박해를 받게 했다.

케플러의 생애에 있어서 또 다른 외형적 사건은, 미신에 사로잡힌 그의 어머니가 마녀라고 기소 당한 사건이다. 그녀의 유죄가 인정된다면, 고문을 당하고 나무 더미 위에서 화형에 처하게 된다. 그의 어머니가 살아난 것은 전적으로 그의 기술적인 변호 때문이었다.

그 재판의 모든 과정 동안 케플러는 하나님에 대한 변하지 않는 믿음을 지켰다. 그는 ”나는 기독교인이다” 라고 간단하게 말함으로써 그의 신앙을 요약했다.[9] 그의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겸손했다. 그의 열망은 이런 것이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높아진다면 나의 이름은 쇠하게 하소서.”[10] 그는 하나님을 ”무(無)로부터 자연을 나오게 하신 친절한 창조주”로 인식했다.[11] 케플러는 그 자신의 생을 위해 세운 계획들을 멀리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인도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말년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신학자가 되려고 했었다. … 그러나 지금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을 볼 때 천문학을 통하여도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2]



References

1. Johannes Kepler, quoted in: J. H. Tiner, Johannes Kepler-Giant of Faith and Science, Mott Media, Milford, Michigan (USA), 1977, p. 193.
2. Encyclopaedia Britannica, 15th ed., 1985, vol. 22, p. 506.
3. Tiner, p. 69.
4. Kepler quoted in Tiner, p. 172.
5. Encyclopaedia Britannica, vol. 22, p. 507.
6. Kepler quoted in Tiner p. 178.
7. Ibid., (inside front cover).
8. Tiner, pp. 195-196.
9. Kepler quoted in Tiner p. 197.
10. Ibid.
11. Ibid. (inside front cover).
12. Ibid.

*Ann Lamont, B.Sc., M.Ed.St. was for many years a teacher of mathematics and science, and a researcher in education. She has a strong interest in researching the lives of early creation scientists.


*참조 : Johannes Kepler

https://crev.info/?scientists=johannes-kepler

위대한 창조과학자들 (List of great Creation Scientists)
 http://crev.info/?scientists=index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15/i1/kepler.asp 

출처 - Creation 15(1):40~43, December 1992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835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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