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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기독교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

이은일 


서론

전쟁이 터진 것도 아니고, 살인사건이 급등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우리나라가 생명이 위협받고 있는 나라가 되었는가? 그것은 우리나라처럼 인간 생명이 경시되고 있는 나라가 세계적으로 없기 때문이다. 6.25의 참혹한 전쟁을 겪고, 급작스러운 경제발전을 이루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간 생명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를 잊고 있는 것 같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영생을 얻을 유일한 기회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 것도 이미 창세기를 통해 말씀하셨다. 이렇게 귀한 인간의 생명이 우리나라에서는 너무나 쉽게 취급되고 있다. 낙태를 통해 세상으로 나오기도 전에 살해당하는 것에 대하여 너무나도 무감각하게, 쉽게 이뤄지고 있으며, 스스로 자신의 삶을 죽이는 자살 행위가 미화되거나, 최소한 동정의 대상이 된다. 이에 대하여 우리나라 교회는 너무나 침묵하고 있어 안타깝다. 이 나라의 만연한 생명경시풍조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본론

1. 자살할 권리는 없습니다.

1) 우리나라의 높은 자살률

우리나라에서 2004년 한 해 동안 자살로 자신의 삶을 마감한 사람의 수는 1만1천5백2십3명이다. 하루에 30명 이상의 사람이 자살로 목숨을 잃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자살로 사망한 사람은 한 해동안 교통사고로 사망한 8천3백3십3명보다 3천1백9십 명이 더 많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것을 너무나 쉽게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높은 편이다. 일본의 경우 2001년 10만 명당 24.1명으로, 우리나라의 2004년 10만 명당 25.2명보다 약간 낮은 수준이고, 미국의 2000년 자살률은 10만 명당 10.4명, 독일은 13.5명(2001년), 핀란드 21.0명(2002년), 네덜란드 9.4명(2000년), 러시아는 38.7명(2002년)등으로,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비교적 자살률이 높다는 일본, 핀란드보다 높고, 러시아보다는 낮은 수준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예외적으로 높은 것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는 러시아를 제외하고 세계 최고의 자살률을 보이고 있는 나라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높은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가 급속하게 현대화되고, 선진국화 되면서 자신과 사회의 정체성에 혼란이 왔고, 기존의 가치관의 붕괴, 특히 가족 중심의 결속력과 이웃 및 친구와의 인간관계가 약해졌으며, 상대적 빈곤감이 커지는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살한 사람들에 대하여 동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전통적으로 사망한 사람과 가족들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은 아름다운 풍속이지만 지금처럼 자살률이 높은 상황에서 자살에 대한 동정적인 태도는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 2005년 2월 자살한 유명 여배우에 대한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움과 사랑을 보내고 있고, 죽음을 미화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자살 자체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또한 유명 배우의 자살이 많은 사람들, 특히 청소년들에게 얼마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하여는 깊은 고려가 없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오죽하면 자살했을까하는 동정론이 우세하고, 자살에 대하여 비난하는 것은 고인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되는 형편이다.

우리나라의 높은 자살률은 자신의 생명을 끊을 수 있는 권리가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사회 분위기뿐 아니라, 생을 마감한 이후에 또 다른 생이 있을 것이라는 불교적 가치관과도 무관하지 않다. 고등학생이 성적 때문에 비관해서 자살하고, 애인의 변심 때문에 자살하고, 생활이 어렵거나 괴롭다고 자살하는 일들이 하도 많다보니 특별한 자살이 아니면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많은 영화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자살하면서 한결같이 하는 말이 다음 세상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이렇게 괴로운 세상에서 생을 마감하도 다음 기회를 잡아보자는 것이다. 전생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거나, 다음 생이 있다고 믿는 것은 죽음이후에는 심판만이 있다는 성경적 가르침과는 너무나 틀리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이런 성경적 가르침보다는 다음에 더 나은 삶, 더 나은 만남, 더 나은 자신이 있길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불교를 믿어서가 아니라, 또 다른 기회가 있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간절히 바란다고 해서, 있지도 않은 다음의 삶은 존재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도 자살할 권리가 없다. 단지 살아야 할 의무만 있을 뿐이다. 자기 마음대로 태어난 것이 아닌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것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무조건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게 될 기회가 있는 것이다. 지금의 삶이 바로 그런 기회가 반복되는 삶이다. 고난, 어려움, 아픔, 고통, 괴로움이 아무리 많더라도 인생은 살아갈 가치가 충분하며, 그런 어려운 과정을 통과했을 때 인생은 더욱 빛나는 존재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어려움은 인생의 새로운 기회라고도 할 수 있다.  어려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글은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이 정당화될 수 있는 인생은 없다. 왜냐하면 생명은 자신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숨쉬고, 심장이 뛰고, 식사가 소화되는 것 등은 모두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되고 있다. 이것들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것으로 우리의 의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관리하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숨을 멈추게 할 때 이 땅에서의 수명이 다하는 것이다.


2) 유일하고 독특한 나

교회는 자살을 죄악시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자살률을 보면서 교회는 그 이상의 역할, 즉 자살을 예방하는 역할까지도 감당해야 한다. 자신의 삶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교회보다 더 잘 가르칠 수 있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자살로 사망한 사람에게 법적인 도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없지만 영원한 세계에서는 영원한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그 책임은 이 세상에 유일한 자기 자신을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이 위대한 계획을 포기한 것에 대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독특하고, 위대하고, 유일한 존재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 각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다른 이유는 각 사람이 모두 독특하기 때문이고, 독특한 이유는 각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의 섭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 사람마다 자신만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어떤 삶의 목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찾은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지만, 그것을 찾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자신을 평가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평생 불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의 유일한 창조목적 이외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을 찾고자 하는 것은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을 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줄 뿐이다.  

병에 들었거나, 장애인으로 태어났더라도 그 사람의 삶은 위대하다. 아무도 그의 삶을 천하게 여길 수 없다. 우리가 모르는 창조주 하나님만의 위대한 섭리가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누가 감히 창조주의 걸작품인 다른 사람의 삶을 평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의미에서 사형제도에 대하여도 우리는 심각하게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죄를 지은 사람의 생명을 중단시킬 권리가 과연 인간에게 있는 것일까? 평생 다른 사람들과 격리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는 일면 수긍이 가는 측면이 있지만 사형을 시킨다는 것은 죄에 대한 처벌로서 인간이 내릴 수 있는 권리인지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한 번의 삶밖에 없는 인생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안락사도 정당화될 수 없다.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인간다운 삶을 계속 영위할 수 없다는 이유 등으로 편안한 죽음을 택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은 인간의 오만을 드러내는 것뿐이다. 인간 생명에 대한 존엄성보다는 인간의 가치관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절대적 가치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상대적 가치로만 생각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고와 하나님을 부정하고 인간이 주인인 척하는 인본주의적 사고가 결합된 결과이다. 이러한 인본주의적 사고에는 사람들 중에 더 나은 존재가 있고, 못난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며, 치열한 생존경쟁을 통해 더 나은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진화론적 세계관이 함께 자리를 잡고 있다. 자신만의 유일한 창조목적을 발견하는 삶은 다른 사람과의 경쟁도 아니고, 잘나고 못난 것도 있는 것이 아닌데, 거짓된 진화론적 세계관이 교육과 문화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물질이나 동물에 불과하다는 생각 때문에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하여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와 바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부한 인간들은 인간 자신의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따라서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우선 바로 서야하며, 이 일에 교회가 앞장 서야 할 때가 온 것이다.


2. 낙태시킬 권리는 없습니다

1) 생명을 죽이는 것을 정당화하는 사회

우리나라의 생명경시 풍조가 얼마나 심각한 가는 세계 1위의 낙태국이라는 명성(?)에서 잘 나타나있다. 2005년 9월 각 병원들을 직접 조사한 고려대학교 산부인과의 조사에 의하면 연간 3십5만5백9십 명의 낙태가 이뤄짐을 보고하였다. 이 보고 전에는 1년에 150만 명 이상의 아기가 낙태수술로 생명을 잃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따라서 실제로는 30만 명보다는 훨씬 더 많은 아기가 생명을 잃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얼마나 부끄러운 수치인지... 이런 보고가 신문지상서 보도되자 법정스님은 낙태수술로 살해되는 어린 생명이 이 사회의 잘못된 가치관 때문이라고 언급하였는데,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는 이 문제에 대하여 언급한 기사를 찾을 수는 없었다. 신문에 보도가 되지 않았을 뿐 많은 교회가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이런 심각한 상황을 외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 땅을 바라보시면 임신 중의 아기들이 하루에도 수천 명 이상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을 텐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교회가 이 문제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낙태를 적극 반대할 뿐 아니라, 인간배아 줄기세포실험도 생명을 죽이는 행위이기 때문에 적극 반대하였다. 단순한 반대만이 아니라 인간배아 줄기세포 실험의 대안이 되는, 윤리적 문제가 상대적으로 없는 인간 성체줄기세포연구에 100억원을 기부하는 결단을 보였다. 반면에 개신교회측은 낙태 문제에 대하여나, 인간배아 줄기세포 연구에 대하여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고, 일부 목사님과 교단은 인간배아줄기세포 연구도 좋은 것이라고 판단한다는 성명을 내기도 해서 가톨릭교회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에서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낙태문제에 대하여 개신교 교회는 좀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루에 수천 명의 아기들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잘 성장하고 있다, 갑자기 기계에 의해 조각나거나, 빨려나가 죽고 있다. 죽어가고 있는 생명들 한명 한명은 창세 이후 그 어느 누구도 갖고 있지 않은 유일한 유전정보, 독특한 창조목적을 갖고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성장하고 있었는데 빛도 보지 못하고 죽고만 것이다. 사람들은 생태계의 다양한 동식물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안타깝게 생각하여 이런 것들을 보호하기 위한 국제협약을 체결하고 있는데, 독특하고 위대한 인간이 수십만 명이 죽어가고 있는 현실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일부 목사님들과 성도들에 의해 낙태반대운동이 이뤄지고 있고, 생명윤리운동도 있지만 거대한 학살을 막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낙태의 58%가 기혼여성에 의해 이뤄지고, 42%가 미혼여성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낙태는 두 가지 종류이지만 낙태를 예방하기 위한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것은 인간 생명은 그 무엇보다도 우선 한다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교회가 보일 필요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낙태를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은 매우 완고하고 구시대적으로 보이는 인기 없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특수한 경우를 들어 예외적인 허용이 있어야 된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기독교관련 라디오 방송에서 낙태에 대한 내용이 다뤄졌을 때 시청자 한명이 전화를 했다. “어떤 이유에서도 낙태가 허용될 수 없다고 하는데, 당신 누이가 강간을 당해서 임신했는데도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느냐? 지금 내가 강간당해서 임신했는데, 어떻게 아기를 낳으라는 말이냐?”고 항의하는 전화가 왔다. 방송에 출연한 생명윤리전문가들은 확고한 답변을 할 수는 있겠지만, 이런 상처를 가진 사람에게 어떻게 위로를 전달하며 답변을 할 수 있을까 매우 고민이 되었다. 그때 다른 시청자가 전화를 하였다. 자신도 강간을 당해 임신을 했는데, 그 생명을 낙태시키지 않고 출산하였으며, 지금 그 아기가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비록 강간한 사람은 밉지만,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자신은 그 생명을 잘 키우고 있다는 감동적인 답변이 나왔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태도는 완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어려운 가정형편, 아기를 키울 수 없는 상황, 아기를 낳더라도 입양해야 하는 미혼모의 입장 등 여러 가지 상황에서 과연 아기를 낳는 것만이 최선의 길인가? 만약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는 차라리 낙태를 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 형체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우리를 알았고, 자궁 내에서 직접 만드셨으며, 하나님의 사명을 태어나기 전부터 주셨다. 어떤 사람도 환경과 부모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직접 책임지시고 키우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는 세상의 죄악과 가난, 기근, 전쟁, 목마름을 보면서 이런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는 바로 우리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교회가 낙태하는 생명에 대하여 중보하며, 그 생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믿고 따르는 우리의 역할인 것이다.

2) 가정과 사회를 파괴하는 음란함

죄가 확대될 때 반드시 성적인 죄가 함께 확대된다. 성적인 죄는 가정을 파괴하고, 성도의 몸을 더럽히며, 결국 사회 전체를 파멸시킨다. 낙태의 42%가 미혼여성에 의해 이뤄지고 있고, 기혼 여성들도 남편이 아닌 남성과의 성관계가 증가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남성들은 음란한 문화에 쉽게 물들고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풍조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문화가 여성들에게까지 확대되고 있다. 낙태 문제에 해결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략은 바로 우리나라 사회에 만연한 음란함을 회개하고 가정을 회복하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적인 문란함이 마치 선진 문화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이런 음란함은 고대 로마가 멸망하기 전의 문화이고, 어느 문명이든 음란한 문화가 창궐하면 그 문명의 몰락을 나타내는 것뿐이다. 음란한 문화는 선진 문화가 아니라 고대부터 증명되고 있는 사회의 타락을 나타내는 것뿐이다. 기혼 남녀들의 성적 문란함은 사실상 혼전부터 시작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혼전 성관계가 당연한 문화로 정착되고 있다. 혼전 성관계가 젊은이들 사이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결혼이 더 이상 존중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다. 결혼 해봐야 많은 사람들이 이혼으로 끝을 맺는 것을 관찰한 젊은 세대는 결혼은 매우 위험스러운 선택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은 하지 않고 동거를 우선 해보고 결혼은 나중에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런 문화를 수 십년 간 이미 경험한 선진국에서 내린 결론은 이혼으로 상처를 받나, 동거가 깨져서 상처를 받나 상처를 받기는 동일한 것이고, 도리어 결혼이라는 제도로 보호를 받는 것이 여성들에게 유리하고, 남녀 관계를 지속시키기에도 더 낫다는 결론이 나왔다. 자유로운 성관계는 일시적인 쾌락을 줄 수는 있겠지만, 결국 여성들에게 인생의 큰 좌절과 상처만을 남기게 된다는 결론을 얻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어리석음 때문이거나 일시적 쾌락을 즐기겠다는 인간의 죄성 때문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교회 내에서도 이런 음란한 죄는 적지 않은 것 같다. 청년들 사이에서, 성도들 사이에서, 심지어 교회 지도자들에서도 이런 죄들이 발견되고 있다. 교회 내에서 이런 죄들이 발견되는 상황에서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전에 먼저 교회가 회개하고 깨끗하게 하는 일이 선행되어야한다.
 

결론

교회는 예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을 이 세상에서 한시적으로 살고 있는 인간에게 전하는 사명을 갖고 있다. 예수님이 모든 인간을 위해 죽으신 것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임신한 순간부터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존재이며,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룰 사명을 갖고 태어난 위대한 존재이다. 교회는 이 생명을 사랑하고 구원하시는 주님의 동역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로 죽어가는 영혼, 낙태로 살해당하는 영혼들에 대하여 침묵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만연된 생명경시풍조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교회에 있기 때문이다.  

 

출처 - 월간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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