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창조주 하나님
(The Creator God of the Bible)
Ivan Bowden
이 주제는 무궁무진한 내용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짧은 읽을 거리에 붙일 논설의 제목으로는 너무 무겁다. 그것은 마치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읽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기 때문에 이 논설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들 가운데 몇 가지만 집중적으로 논하려한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라는 말씀으로 시작되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요한계시록 21:1) 라는 말씀으로 끝을 맺는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베드로후서 3:13에서도 언급되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세상의 창조 이야기를 확실한 근거도 없이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는 옛날이야기, 또는 일종의 우화의 범주에 포함시키려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들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그런데 슬픈 사실은 우화의 선량한 인물들과는 달리, 그들은 ”이후 영영 행복하게 살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성경은 창세기를 우화는 고사하고 어떤 상징적인 이야기로도 지목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창세기의 기록을 글자 그대로 받아드린다고 말씀하셨기에 우리는 그의 생각을 전폭 수용할 것이다.
다시 베드로후서 3장과 요한계시록 21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왜 새 하늘과 새 땅이 필요한지 묻게 된다. 슬프게도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첫 번째 하늘과 땅은 뭔가 몹시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오로지 의로움만이 거할 것이라는 찬란한 생각을 하면 소망에 부푼 우리 기운은 하늘을 찌를 것 같다. 이 세상이 잘못된 것 중에서도 특히 나쁜 것은 불의가 도저히 걷잡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의로우신 하나님은 의를 괘념하시는 동안에도 사람은 전적으로 의에 무관심하였다.
하나님이 첫 번째 세상을 만드실 때 사람이 살기에 단순히 좋은 곳을 만들어 주신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뭔가를 일러두셨다.
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실 때 말씀하신 메시지를 고려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선 시편 95장을 읽어보는 것이 좋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그리고 그렇게 해야할 이유는 이렇다.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오 모든 신위에 크신 왕이시로다. 땅의 깊은 곳이 그 위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것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시편 104:1-7은 이렇게 읊고 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를 입으셨나이다.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세우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옷으로 덮음같이 땅을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
10절... 여호와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13절... 저가 그 누각에서 사에 물을 주시니, 주의 행사의 결과가 땅에 풍족하도다. 저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식물이 나게 하시고...
19절...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것을 알도다...
24절...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한 훌륭한 시편으로서, 그 시작을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며...!” 라고 읊으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실로 광대함을 찬양하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응답은 경배와 경외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대한 사람의 반응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전일성을 경배하는 마음이어야 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두 번째 반응은 두려움이다. 그런 마음의 메시지는 시편 33:6-8에 담겨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여기서 언급된 '경배 (worship)'의 개념을 고찰하여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설명해 보자. 교회에서의 주일날 아침예배는 '경배'의 예배라고 한다. 그런데 '경배'의 참 뜻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 인데 반하여, 예배 순서(Order of Service)에서는 많은 시간이 '얻는 것'에 소진되고 있다. 이에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권속들이 모두 모여 다 함께 하나님에게 자연발생적인 경모의 마음과 감사의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운 일이겠는가! 시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기에 크게 칭송받아 마땅하시다.” 그런데 하나님의 권속이라면 진정한 경배에서 당연히 하나님에게 드려야 할 하나님의 몫을 크리스천이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심각할 정도로 빼앗고 있지는 않았을까? 심지어 하나님과 독대하고 있을 때에서까지 너무도 쉽게 크리스천은 ”하나님 이렇게 저렇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제발 이런 걸 주옵소서! 저를 보전하여 주옵소서. 저를 지켜 주옵소서... 그리고 우리의 선교를 축복하여 주옵소서”라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스러운 이름에 마땅한 영광을 하나님에게 드리기 위하여 얼마큼 우리의 헌신적인 삶을 하나님에게 드렸는가를 자문하여야 할 것이다.
'경외' 라는 단어의 뜻은 새겨보아야 한다. 성경의 용어색인을 펼쳐들고 '경외' 라는 단어를 찾아보는 수련도 유용하리라─이 단어는 성경 안에서는 일반적으로 쓰인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시편 34:9).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잠언 9:10) 등등. 나는 20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나 두려움의 결여로 인하여 영적 이해의 분야에서 길 잃은 미아의 신세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에 '두렵다'. 오늘날 우리들 사이에는 하나님을 우리와 같은 수준에 있는 '친구' 급의 그 어떤 존재쯤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친숙함이 팽배하다. 때로는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너무도 격이 없어서 어쩌다 보면 하나님이 우리 이웃집 어느 양반보다도 못한 것 같은 인상을 받기 쉽다. 유인물 안에서 하나님을 호칭 할 때 '그대를 (Thee),' 또는 '그대는 (Thou)'이라는 용어를 쓰는 데 대한 찬반에 관한 말다툼이 아니고, 우리들보다 영원히 높으신 존재에 대한 숭배와 존경을 위한 강력한 논쟁이다. 히브리서는 ”우리의 하나님은 전소(全燒)하시는 불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그는 ”거룩, 거룩, 거룩하도다, 만군의 하나님이시요” 라는 목소리를 듣고 자신이 너무도 부정하다는 자격지심에 '내게 화 있을진저!' 하고 외쳤다.
계시록의 기록을 보면, 늙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그리스도의 환영을 만났을 때, 그는 죽은 사람처럼 주님의 발끝에 엎드렸다. 밤새껏 허탕을 친 베드로가 기적적으로 만선을 채운 다음 바닷가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그는 ”오 주님이시어 저를 떠나옵소서! 저는 죄 많은 자이옵니다” 하고 부르짖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의 사랑이신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이시기에 하나님의 당연한 몫인 거룩한 외경과 존경, 그리고 숭배의 감정을 일으키게 하시는 대상이신 까닭에 그가 느낀 두려움은 결코 비참한 두려움일 순 없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은 저들을 만드신 창조주를 마땅히 경배하는 마음으로 맞아들여야 할 것이지만 그러지 않았다! 바울은 로마서 1:25절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하였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올바로 모시지 않고 제각각 뭔가를 경배하며 다른 것을 모시고 있다. 바울 사도가 사람들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한다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배도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로마서 3:18절은, ”저희는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그리고 로마서 1:32절은 이와 같은 두려움의 결여를 강조하면서,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20세기 보통의 인간상을 정확하게 그리고 있는가! 오늘날 사람들은 10계명을 자의로 위반한 후 입맛을 한 번 쩍 다시고는 그 죄를 다시 범한다. 그 뿐만 아니라 자기를 따라 죄를 범해보라고 다른 사람을 서슴없이 부추긴다.
오늘날 도덕적 가치에 대한 경박한 태도를 가져다준 책임의 일단이 텔레비전의 영향에 있다 할 것이다. 텔레비전은 천박한 비도덕적 기준을 마치 인간의 전형적인 행동양식인양 그리고 더할 나위없는 만족감과 쾌락을 가져다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묘사한다. 불행한 일이지만, 시청자는 TV 화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각본을 연출하는 배우들에 불과하고, 연극 이야기의 일부분으로서의 결과는 좀처럼 죄스러운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 특히 간음사건일수록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간음사건은 매혹적이며 재미있게 그려진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이 죄스러운 삶의 스타일이 행복과 만족으로 가는 길로 받아들이게끔 세뇌되고 있다. 그렇게 된 젊은이들은 인생의 안녕을 위한 하나님의 기준을 무시하고 자기네들과는 무관한 것으로 치부하고 영영 잊어버리고 만다. 그 정도가 심해지면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비웃다 못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배우지 못하고 만다.
창조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선언하는 것이다.
창조를 통하여 사람에게 주시는 또 다른 하나의 메시지는 로마서 1:20절에 이렇게 시작된다. 즉,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 찌니라”
이사야 45:18)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그리고 21절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진실한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이 경배해 마지않는 숲이나 돌의 신들과 다른 점은 바로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늘과 땅이 그가 하나님이심을 그리고 그의 신성하심을 증명하고 있다.
사람의 응답은 복종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신 사실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이사야 45:22절은 그것을 명료하게 밝힌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우리의 응답은 몸과 마음을 바쳐 복종하는 뜻으로 그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어느 크리스천 사역자가 골프 코스에서 친구에게 간증하는 중에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 하나님으로 자복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자, 그의 친구는 즐거운 듯이 이렇게 대답했다. 즉, ”나는 내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찾을 수 없어” 하자 그 크리스천 친구는, ”문제는 네가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든지 않든지 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야. 그는 우리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자네는 그에게 빚을 지고 있기에 그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는 것이야.” 라고 대답했다.
풍요로운 20세기 인간은 자족감에 탐닉하기 일쑤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는 하나님이다. 모든 이는 다 내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라고 하신다. 세속적인 제왕 (예컨대 헨리 7세)은 자기 백성 중의 누가 ”나는 그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면, 이를 순순히 봐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헨리 7세는, ”짐도 또한 너를 필요로 하지 않네... 이 자를 끌어내어 참수하라!” 라고 하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사람한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로마서 1:28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한 사람의 응답을 훌륭하게 기술하고 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진화론을 주장하는 주요 이유들 중 한 가지는 하나님이 진화론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인정한다는 암시이다. 그리고 만약에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는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기에 우리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수 없다. 우리는 그에게 무릎을 꿇고 그의 시키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교과서에서 진화론을 마치 사실처럼 가르치는 반면 하나님을 알리지도 않고 ”하나님에게 무릎을 꿇지도 말며 머리를 조아리지도 말라”고 가르치는 구실로 삼는다.
창조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언한다.
세 번째로, 천지 창조는 하나님을 다르게 말하고 있다. 앞서 시편 104절에서는 하나님의 역사를 거듭거듭 찬양하고 있음을 보았다. 하나님이 이루신 그 모든 경탄스러운 역사들을 일일이 열거한 다음 저자는 31절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라고, 다시 시편 97:6절에서는 ”하늘이 그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 영광을 보았도다” 라고 소리높이어 읊는다. 어두운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의 향연을 쳐다보고 섰노라면, 우리들은 불현듯 ”하나님은 어찌 그리 영광스러운지요! 참으로 찬란하시며, 정말 웅대하시다!”라고 감탄을 연발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응답은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는 일이어야 한다.
이 대목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시편 96:3-6절의 내용으로 대표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찌어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 성소에 있도다.”
같은 장 7절은,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라고 명령한다. 인간의 응답은 영광의 하나님이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일이어야 한다. 계시록 4:11절의 말씀,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그 이유인즉슨)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라고 읊으면 이 아니 좋은가!
사람은 자기를 지으신 자를 영광되게 하여야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장려함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그렇지 못하니 어찌 비극이 아닐까! 로마서 1장은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이러하여야 한다고 다시 일러주고 있다. 즉,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왜 그런가 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내려다보시기에 저들의 모습은 얼마나 비참할까!
하나님께서 창조를 통하여 인간에게 보내신 메시지 (하나님의 광대하심, 신성하심, 영광되심)에 대한 응답으로 인간이 경배와 경외, 그리고 영광을 기쁘게 바치기를 기대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가 특히 로마서 1장을 통하여 보아온 바로는 하나님의 이러한 기대와는 정반대의 경우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로마서 1장은 우리 세상이 무엇이 잘못됐는가를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만약 인간사회에 죄가 없다면 인플레이션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할지 모를 정도로 많은 돈을 가지고 산다. 별 생각 없이 파손한 물건들을 수리하는 데만 쓰이는 돈이 매년 수백만 불이 넘는다. 생각 없이 긁어 상처를 낸 객차들이나 무심코 파손한 전화부나 공중전화 박스들로 해서 드는 비용이 매년 엄청나다. 뜻 있는 크리스천 경제학자한테는 우리나라에서 인간의 죄스러운 행위로 인해서 드는 비용에 관한 책을 저술해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응답을 하나님에 당연히 합당한 방법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오늘날처럼 절망적인 상태에 떨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로 인간에게 보낸 메시지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부적절하게 보시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로마서 1장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즉 18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니” 라고 한다. 사람의 반항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한 마디로 요약해서 '진노' 바로 그것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이 그의 창조의 역사에 드러난다. 그러나 별들을 바라보는 것만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의에 관한 마음을 나눌 수는 없다. 비록 경이롭지만, 창조의 메시지는 한정적이다. 따라서 사람은 계시의 메시지가 필요하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새길 줄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은 의로운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불의에 대한 의의 대응은 '진노' 라는 한마디 단어로 요약하고 있다. 진노의 마음은 하나님에게 부합하기에는 너무도 몰취미한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점잖은 양반' 정도로 간주하고 있으며 진노의 마음은 얼토당토않게 부적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경은 이 단어를 하나님의 속성에 적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임을 알아야 한다.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은 사악한 자들에게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한다. (시편 7:11). 그리고 에베소서 2:3에 우리는 모두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라고 쓰여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에 대하여 진노로 반응하신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도의 신경들 중의 하나에는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 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 인간들한테서 자주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발작적인 노기나 돌발적인 분노의 폭발 같은 감정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불의에 대한 피할 수 없는 그의 의로움의 반응이며, 인간의 죄에 쏟아 붓는 그의 거룩함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반응의 일단을 우리는 인간적인 경험을 통해서 볼 수도 느낄 수도 있다. A. H. Strong의 설명을 증폭하여 보자. 하나님이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 계시는 법정을 상상해보라. 재판관 앞에 선 범인한테 변론의 여지가 없는 살인의 증거가 제시되었다. 그 때 방청석에서 개기름이 번질거리는 얼굴을 한 어떤 남정네가 뛰쳐나와서 재판관 (하나님)의 어깨를 툭 치고는, '재판관님, 내 친구를 풀어주면 내가 10000불을 드리리다' 한다. 재판관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의로운 재판관이라는 그가, ”내일 아침 차 마시는 시간에 보세”라고 할까? 천만에,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경관! 당장 이 자를 체포하여 법정에서 끌어내라!” 하실 것이다. 또한 이런 경우도 상상해 보자. 어떤 불한당이 원칙적으로 사는 의로운 사람한테 다가와서 그의 순결하고 사랑스러운 누이동생에 대하여 은근한 제안을 비춘다면, 그는 크게 격분하여 누이동생에 대한 자기 애정을 내비칠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의로운 하나님인 이상, 불의에 거부감으로 반응할 것임은 너무나 당연하다. 성경에서는 그러한 반응을 '진노' 라는 단어로 나타낸다.
그런데 어쩌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참으로 비참한 모습니다. 로마서 3장은 사람마다 너나없이 로마서 1장에 열거된 행동을 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그를 경외하지도 않았다. 우리들은 그 앞에 자복하지도 않았다. 이와 같은 우리들의 모든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그의 '진노'다.
그렇지만 창조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해 반항적으로 응답하는 인간의 우울한 모습을 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진노하는 하나님의 응답은 즐겁고 고무적인 뉴스이다. 하나님은 의의 하나님인 이상, 인류는 반드시 두 가지 일을 기대하여야 할 것이다. 첫째, 하나님은 죄를 벌하신다는 것과, 둘째, 그는 의를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이 둘은 다 합리적인 기대다. 로마서 3:25절은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 죄는 구약성경을 믿는 자들의 죄로서 지나가 버린 것들이다.) 다윗이 간음과 살인을 범하였기에 율법에 따르면 당연히 투석으로 응징하여야 마땅한 그의 죄를 풀어주신 하나님은 진정 의로운 이신가? 하나님이 다윗을 풀어주신 것으로 보아 의롭지 않으신 이처럼 보인다고도 하겠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예수를 내가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웠으니...” 라는 말씀 속에 담겨있다. (그런데 그러한 말씀 가운데에는 '공공연히' 라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골고다의 사건을 예견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형틀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은 우리들의 죄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에 관한 무엇인가를 우리들에게 알려주시려고 그랬다. 그것은 하나님이 저 구약의 사람들이 저지른 죄들을 눈감아 주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의롭다 할 수 없을 것이기에 그들이 지은 그 모든 죄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속죄시키려 예견하셨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그의 독생자를 골고다의 제물로 세우기 위해 저들의 죄를 눈감아 주셨던 것이다. 즉, 예수께서 그 모든 형벌을 혼자 감당함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구약의 사람들이 지은 죄를 눈감아 주셨던 일에 대한 정당화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인간의 문제는 명백하다. 만약 의로운 하나님이 죄를 벌하여야만 하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 하였으니” (로마서 3:23),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피하려는 희망을 어느 누가 가질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오직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개념을 싫어하는 신학자들은 '위무(慰撫, propitiation)' 라는 단어 (어떤 번역에 있는 속죄(贖罪, expiation) 라는 단어와 대조하여)가 성경의 가르침 속에서 일관되게 사용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을 위무한다. 그런데 '위무' 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진노를 돌려놓는다는 생각을 내포한다. Apostolic Preaching of the Cross라는 책에서 리온 모리스 (Leon Morris)는 이렇게 지적하였다. 즉, 이것은 신들을 달래기 위해 닭을 죽여 하늘에 드리는 제례 과정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이 지은 죄에 내려질 징벌을 혼자서 감당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처리를 바꾸게 하였다. 하나님은 진노 대신에 이제는 긍휼로 반응하실 수 있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것은 그의 진노와 그의 율법 그리고 그의 의가 이제는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이로운 뉴스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즉,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위무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신앙을 가진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대신에 긍휼을 받을 것이다.
어쨌거나 의로운 하나님은 의를 요구하신다. 그는 진정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모던니스트들은 비록 동전의 한 쪽만을 보고 있다지만 옳은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영원히 그와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들 가운데 어느 누구 하나라도 멸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모두가 다 회개하기를 원하신다.” 그렇지만 그의 의는 의를 요구하신다. 그런데 어느 누구가 하나님께서 설정해놓으신 완벽한 기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다시 이런 질문이 우리를 찌른다. 즉, ”어떤 희망이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한 팔로는 우리를 영원히 함께 하자시며 사랑의 포용으로 우리를 감싸 안으시지만, 다른 한 팔로는 완벽한 순수성을 요구하는 그의 의로 인해서 우리를 밀어내며 곁을 안 주신다. 하나님의 애증의 양면성 속에 내재하는 이와 같은 갈등도 또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해결하신다. 로마서 3:26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용서를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선언한다. 정당화하는 역사는 (로마 가톨릭 교리가 가르치는 바처럼)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 관해서 발표하는 선언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 관해서 언급되는 그 무엇이다. 피진 신약성경(Pidgin New Testament)은 의롭다 하려 하시는 (justification) 행위를 ”하나님은 그가 옳다고 말씀하신다. (God say him all right.)” 로 번역하였다. 가히 정곡을 찌른 표현이 아닌가!
클로이든 성경학교(Cloydon Bible College)의 전임 학장, 차스 롤즈 박사 (Dr. Chas. Rolls)는 의롭게 하는 행위 (justification)에 대해서 아주 괄목할만한 해설을 한 적이 있었다. 겟세마네 정원에서의 사건(예수가 배신을 당하던 날 밤)이 벌어질 때, 용감한 베드로가 검을 휘둘러 말고(Malchus) 라는 사람의 귀를 잘라버렸다. 이 자는 바로 대제사장의 하인이었다. 예수님은 다정하게 당신의 손으로 그 떨어진 귀를 집어 들고 제 자리에 갖다 붙이셨다. 그런데 말고는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호의를 아직은 충분히 소화하지 못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하였다. 그래서 어쩌면 그는 돌아가 대제사장에게 이와 비슷하게 보고했을 것이다. 즉, ”저는 예수의 추종자들 중 한 사람에게 원한이 있습니다.” ”아, 그래! 무슨 짓을 하였던고?” 대제사장이 대꾸를 하자, 그는 ”그놈이 제 귀를 잘라내었습니다.” 했을 것이다. 그 대제사장은 그의 한 쪽 귀를 쳐다보고는 다른 귀도 살폈다. 그리고는 이 자가 혹시 세 번째 귀를 가지고 있었던가 하고 의아해 하였을 것이다. 그의 두 귀는 말짱하였을 테니까! 그러니 이제 베드로에게 어떤 죄목을 과하여야 하겠는가? 당연히 유죄 판결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증거가 없다. 그는 무죄판결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그 귀를 복원하셨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법은 그를 고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사람의 문제다. 만약에 의로운 하나님이신 하나님께서 천국에 들어갈 자격조건으로 의로움을 요구한다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다가가 본 적이 없는 우리로서는 어떻게 이 자격을 딸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에는 두 가지가 존재한다. 그 중 한 가지는 로마서 3:25-26절에서 말씀하신 의다. 즉, ”예수를 화목 제물로 받아드림으로 인해서 하나님 당신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의로우심이고, 다른 한 가지는(22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이고, ”선물로 받은 의롭게 됨”을 말한다. (로마서 5:17)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의롭다 여기신 의(로마서 4:3)가 그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제 힘으로는 도저히 이겨내기 어려운 문제의 해법을 하나님이 풀어주시는 경이로운 대답이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힘으로 얻은 의로움이 아니고, 골고다의 언덕에서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덕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의로움으로 인해서 천국 입국사증을 얻게 된 것이다.
주먹구구식 계산으로 따져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하나님 앞에 나선 우리들의 일차적 모습은 무한대의 마이너스였다... 천국 입국자격 심사에서는 아득히 먼데 있는 우리를 발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로 인한 죽음이다. 그러나 내가 믿음으로 나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그리고 구세주로 영접할 때면, 하나님은 예수의 그 죽음으로 얻는 이익을 내 계산서에 기재하시어 나의 죄를 하나님께서 온전히 용서하실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신다. 사실 그 결과로 내 죄의 기록은 영(零)이 되는 것이다. 더욱이 경이로운 일은 내가 의롭다 여기심을 받게 된 일에는 긍정적인 요소가 내포되어 있는데─그것은, 내 죄가 사함을 받을 수 있게 그리스도의 죽음이 내 계산서에 계상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이 내 계산서에 계상되어 나도 또한 사랑받는 하나님의 권속으로 받아드려진다는 일이다. 내가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은 나를 보다 선량한 사람으로 만들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안(聖眼)으로 보시기에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서 그가 정당하게 나를 의롭게 하신다는 뜻이다. 그럼으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당하지 못하게 아무한테나 천국입국사증을 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범인이 50만 불을 횡령하고 도주한 죄벌로 형기를 다 마쳤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그가 출감하였을 때에도 그 오명은 여전히 남아있어서 예전에 근무하던 은행에서 그를 받아드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받는 권속으로 받아드려진 이상 우리의 죄의 흔적은 말끔히 지워진다.
애미 카밍클 (Amy Carminchael)의 자서전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이 있다.
내가 살아온 삶이 아니고
내가 죽을 죽음이 아니고
또 다른 삶, 또 다른 죽음에
나는 나의 영원을 온전히 걸리라.
당신은 과연 어디에 당신의 영원을 쓰시려 하십니까?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쓰시렵니까? 이 글을 읽는 분들은 그 곳에서 ”행복하게 영원히 살게 될 것”을 이 사람은 확신한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3/i3/creator.asp
출처 - Creation 3(3):36–45, August 1980.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
(The Creator God of the Bible)
Ivan Bowden
이 주제는 무궁무진한 내용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짧은 읽을 거리에 붙일 논설의 제목으로는 너무 무겁다. 그것은 마치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읽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기 때문에 이 논설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들 가운데 몇 가지만 집중적으로 논하려한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라는 말씀으로 시작되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요한계시록 21:1) 라는 말씀으로 끝을 맺는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베드로후서 3:13에서도 언급되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세상의 창조 이야기를 확실한 근거도 없이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는 옛날이야기, 또는 일종의 우화의 범주에 포함시키려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들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그런데 슬픈 사실은 우화의 선량한 인물들과는 달리, 그들은 ”이후 영영 행복하게 살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성경은 창세기를 우화는 고사하고 어떤 상징적인 이야기로도 지목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창세기의 기록을 글자 그대로 받아드린다고 말씀하셨기에 우리는 그의 생각을 전폭 수용할 것이다.
다시 베드로후서 3장과 요한계시록 21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왜 새 하늘과 새 땅이 필요한지 묻게 된다. 슬프게도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첫 번째 하늘과 땅은 뭔가 몹시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오로지 의로움만이 거할 것이라는 찬란한 생각을 하면 소망에 부푼 우리 기운은 하늘을 찌를 것 같다. 이 세상이 잘못된 것 중에서도 특히 나쁜 것은 불의가 도저히 걷잡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의로우신 하나님은 의를 괘념하시는 동안에도 사람은 전적으로 의에 무관심하였다.
하나님이 첫 번째 세상을 만드실 때 사람이 살기에 단순히 좋은 곳을 만들어 주신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뭔가를 일러두셨다.
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실 때 말씀하신 메시지를 고려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선 시편 95장을 읽어보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할 이유는 이렇다.
시편 104:1-7은 이렇게 읊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한 훌륭한 시편으로서, 그 시작을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며...!” 라고 읊으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실로 광대함을 찬양하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응답은 경배와 경외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대한 사람의 반응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전일성을 경배하는 마음이어야 한다.
두 번째 반응은 두려움이다. 그런 마음의 메시지는 시편 33:6-8에 담겨있다.
여기서 언급된 '경배 (worship)'의 개념을 고찰하여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설명해 보자. 교회에서의 주일날 아침예배는 '경배'의 예배라고 한다. 그런데 '경배'의 참 뜻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 인데 반하여, 예배 순서(Order of Service)에서는 많은 시간이 '얻는 것'에 소진되고 있다. 이에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권속들이 모두 모여 다 함께 하나님에게 자연발생적인 경모의 마음과 감사의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운 일이겠는가! 시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기에 크게 칭송받아 마땅하시다.” 그런데 하나님의 권속이라면 진정한 경배에서 당연히 하나님에게 드려야 할 하나님의 몫을 크리스천이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심각할 정도로 빼앗고 있지는 않았을까? 심지어 하나님과 독대하고 있을 때에서까지 너무도 쉽게 크리스천은 ”하나님 이렇게 저렇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제발 이런 걸 주옵소서! 저를 보전하여 주옵소서. 저를 지켜 주옵소서... 그리고 우리의 선교를 축복하여 주옵소서”라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스러운 이름에 마땅한 영광을 하나님에게 드리기 위하여 얼마큼 우리의 헌신적인 삶을 하나님에게 드렸는가를 자문하여야 할 것이다.
'경외' 라는 단어의 뜻은 새겨보아야 한다. 성경의 용어색인을 펼쳐들고 '경외' 라는 단어를 찾아보는 수련도 유용하리라─이 단어는 성경 안에서는 일반적으로 쓰인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시편 34:9).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잠언 9:10) 등등. 나는 20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나 두려움의 결여로 인하여 영적 이해의 분야에서 길 잃은 미아의 신세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에 '두렵다'. 오늘날 우리들 사이에는 하나님을 우리와 같은 수준에 있는 '친구' 급의 그 어떤 존재쯤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친숙함이 팽배하다. 때로는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너무도 격이 없어서 어쩌다 보면 하나님이 우리 이웃집 어느 양반보다도 못한 것 같은 인상을 받기 쉽다. 유인물 안에서 하나님을 호칭 할 때 '그대를 (Thee),' 또는 '그대는 (Thou)'이라는 용어를 쓰는 데 대한 찬반에 관한 말다툼이 아니고, 우리들보다 영원히 높으신 존재에 대한 숭배와 존경을 위한 강력한 논쟁이다. 히브리서는 ”우리의 하나님은 전소(全燒)하시는 불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그는 ”거룩, 거룩, 거룩하도다, 만군의 하나님이시요” 라는 목소리를 듣고 자신이 너무도 부정하다는 자격지심에 '내게 화 있을진저!' 하고 외쳤다.
계시록의 기록을 보면, 늙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그리스도의 환영을 만났을 때, 그는 죽은 사람처럼 주님의 발끝에 엎드렸다. 밤새껏 허탕을 친 베드로가 기적적으로 만선을 채운 다음 바닷가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그는 ”오 주님이시어 저를 떠나옵소서! 저는 죄 많은 자이옵니다” 하고 부르짖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의 사랑이신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이시기에 하나님의 당연한 몫인 거룩한 외경과 존경, 그리고 숭배의 감정을 일으키게 하시는 대상이신 까닭에 그가 느낀 두려움은 결코 비참한 두려움일 순 없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은 저들을 만드신 창조주를 마땅히 경배하는 마음으로 맞아들여야 할 것이지만 그러지 않았다! 바울은 로마서 1:25절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하였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올바로 모시지 않고 제각각 뭔가를 경배하며 다른 것을 모시고 있다. 바울 사도가 사람들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한다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배도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로마서 3:18절은, ”저희는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그리고 로마서 1:32절은 이와 같은 두려움의 결여를 강조하면서,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20세기 보통의 인간상을 정확하게 그리고 있는가! 오늘날 사람들은 10계명을 자의로 위반한 후 입맛을 한 번 쩍 다시고는 그 죄를 다시 범한다. 그 뿐만 아니라 자기를 따라 죄를 범해보라고 다른 사람을 서슴없이 부추긴다.
오늘날 도덕적 가치에 대한 경박한 태도를 가져다준 책임의 일단이 텔레비전의 영향에 있다 할 것이다. 텔레비전은 천박한 비도덕적 기준을 마치 인간의 전형적인 행동양식인양 그리고 더할 나위없는 만족감과 쾌락을 가져다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묘사한다. 불행한 일이지만, 시청자는 TV 화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각본을 연출하는 배우들에 불과하고, 연극 이야기의 일부분으로서의 결과는 좀처럼 죄스러운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 특히 간음사건일수록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간음사건은 매혹적이며 재미있게 그려진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이 죄스러운 삶의 스타일이 행복과 만족으로 가는 길로 받아들이게끔 세뇌되고 있다. 그렇게 된 젊은이들은 인생의 안녕을 위한 하나님의 기준을 무시하고 자기네들과는 무관한 것으로 치부하고 영영 잊어버리고 만다. 그 정도가 심해지면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비웃다 못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배우지 못하고 만다.
창조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선언하는 것이다.
창조를 통하여 사람에게 주시는 또 다른 하나의 메시지는 로마서 1:20절에 이렇게 시작된다. 즉,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 찌니라”
이사야 45:18)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그리고 21절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진실한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이 경배해 마지않는 숲이나 돌의 신들과 다른 점은 바로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늘과 땅이 그가 하나님이심을 그리고 그의 신성하심을 증명하고 있다.
사람의 응답은 복종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신 사실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이사야 45:22절은 그것을 명료하게 밝힌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우리의 응답은 몸과 마음을 바쳐 복종하는 뜻으로 그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어느 크리스천 사역자가 골프 코스에서 친구에게 간증하는 중에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 하나님으로 자복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자, 그의 친구는 즐거운 듯이 이렇게 대답했다. 즉, ”나는 내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찾을 수 없어” 하자 그 크리스천 친구는, ”문제는 네가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든지 않든지 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야. 그는 우리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자네는 그에게 빚을 지고 있기에 그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는 것이야.” 라고 대답했다.
풍요로운 20세기 인간은 자족감에 탐닉하기 일쑤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는 하나님이다. 모든 이는 다 내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라고 하신다. 세속적인 제왕 (예컨대 헨리 7세)은 자기 백성 중의 누가 ”나는 그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면, 이를 순순히 봐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헨리 7세는, ”짐도 또한 너를 필요로 하지 않네... 이 자를 끌어내어 참수하라!” 라고 하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사람한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로마서 1:28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한 사람의 응답을 훌륭하게 기술하고 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진화론을 주장하는 주요 이유들 중 한 가지는 하나님이 진화론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인정한다는 암시이다. 그리고 만약에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는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기에 우리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수 없다. 우리는 그에게 무릎을 꿇고 그의 시키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교과서에서 진화론을 마치 사실처럼 가르치는 반면 하나님을 알리지도 않고 ”하나님에게 무릎을 꿇지도 말며 머리를 조아리지도 말라”고 가르치는 구실로 삼는다.
창조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언한다.
세 번째로, 천지 창조는 하나님을 다르게 말하고 있다. 앞서 시편 104절에서는 하나님의 역사를 거듭거듭 찬양하고 있음을 보았다. 하나님이 이루신 그 모든 경탄스러운 역사들을 일일이 열거한 다음 저자는 31절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라고, 다시 시편 97:6절에서는 ”하늘이 그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 영광을 보았도다” 라고 소리높이어 읊는다. 어두운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의 향연을 쳐다보고 섰노라면, 우리들은 불현듯 ”하나님은 어찌 그리 영광스러운지요! 참으로 찬란하시며, 정말 웅대하시다!”라고 감탄을 연발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응답은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는 일이어야 한다.
이 대목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시편 96:3-6절의 내용으로 대표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장 7절은,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라고 명령한다. 인간의 응답은 영광의 하나님이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일이어야 한다. 계시록 4:11절의 말씀,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그 이유인즉슨)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라고 읊으면 이 아니 좋은가!
사람은 자기를 지으신 자를 영광되게 하여야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장려함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그렇지 못하니 어찌 비극이 아닐까! 로마서 1장은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이러하여야 한다고 다시 일러주고 있다. 즉,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왜 그런가 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내려다보시기에 저들의 모습은 얼마나 비참할까!
하나님께서 창조를 통하여 인간에게 보내신 메시지 (하나님의 광대하심, 신성하심, 영광되심)에 대한 응답으로 인간이 경배와 경외, 그리고 영광을 기쁘게 바치기를 기대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가 특히 로마서 1장을 통하여 보아온 바로는 하나님의 이러한 기대와는 정반대의 경우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로마서 1장은 우리 세상이 무엇이 잘못됐는가를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만약 인간사회에 죄가 없다면 인플레이션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할지 모를 정도로 많은 돈을 가지고 산다. 별 생각 없이 파손한 물건들을 수리하는 데만 쓰이는 돈이 매년 수백만 불이 넘는다. 생각 없이 긁어 상처를 낸 객차들이나 무심코 파손한 전화부나 공중전화 박스들로 해서 드는 비용이 매년 엄청나다. 뜻 있는 크리스천 경제학자한테는 우리나라에서 인간의 죄스러운 행위로 인해서 드는 비용에 관한 책을 저술해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응답을 하나님에 당연히 합당한 방법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오늘날처럼 절망적인 상태에 떨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로 인간에게 보낸 메시지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부적절하게 보시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로마서 1장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즉 18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니” 라고 한다. 사람의 반항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한 마디로 요약해서 '진노' 바로 그것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이 그의 창조의 역사에 드러난다. 그러나 별들을 바라보는 것만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의에 관한 마음을 나눌 수는 없다. 비록 경이롭지만, 창조의 메시지는 한정적이다. 따라서 사람은 계시의 메시지가 필요하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새길 줄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은 의로운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불의에 대한 의의 대응은 '진노' 라는 한마디 단어로 요약하고 있다. 진노의 마음은 하나님에게 부합하기에는 너무도 몰취미한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점잖은 양반' 정도로 간주하고 있으며 진노의 마음은 얼토당토않게 부적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경은 이 단어를 하나님의 속성에 적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임을 알아야 한다.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은 사악한 자들에게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한다. (시편 7:11). 그리고 에베소서 2:3에 우리는 모두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라고 쓰여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에 대하여 진노로 반응하신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도의 신경들 중의 하나에는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 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 인간들한테서 자주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발작적인 노기나 돌발적인 분노의 폭발 같은 감정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불의에 대한 피할 수 없는 그의 의로움의 반응이며, 인간의 죄에 쏟아 붓는 그의 거룩함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반응의 일단을 우리는 인간적인 경험을 통해서 볼 수도 느낄 수도 있다. A. H. Strong의 설명을 증폭하여 보자. 하나님이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 계시는 법정을 상상해보라. 재판관 앞에 선 범인한테 변론의 여지가 없는 살인의 증거가 제시되었다. 그 때 방청석에서 개기름이 번질거리는 얼굴을 한 어떤 남정네가 뛰쳐나와서 재판관 (하나님)의 어깨를 툭 치고는, '재판관님, 내 친구를 풀어주면 내가 10000불을 드리리다' 한다. 재판관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의로운 재판관이라는 그가, ”내일 아침 차 마시는 시간에 보세”라고 할까? 천만에,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경관! 당장 이 자를 체포하여 법정에서 끌어내라!” 하실 것이다. 또한 이런 경우도 상상해 보자. 어떤 불한당이 원칙적으로 사는 의로운 사람한테 다가와서 그의 순결하고 사랑스러운 누이동생에 대하여 은근한 제안을 비춘다면, 그는 크게 격분하여 누이동생에 대한 자기 애정을 내비칠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의로운 하나님인 이상, 불의에 거부감으로 반응할 것임은 너무나 당연하다. 성경에서는 그러한 반응을 '진노' 라는 단어로 나타낸다.
그런데 어쩌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참으로 비참한 모습니다. 로마서 3장은 사람마다 너나없이 로마서 1장에 열거된 행동을 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그를 경외하지도 않았다. 우리들은 그 앞에 자복하지도 않았다. 이와 같은 우리들의 모든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그의 '진노'다.
그렇지만 창조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해 반항적으로 응답하는 인간의 우울한 모습을 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진노하는 하나님의 응답은 즐겁고 고무적인 뉴스이다. 하나님은 의의 하나님인 이상, 인류는 반드시 두 가지 일을 기대하여야 할 것이다. 첫째, 하나님은 죄를 벌하신다는 것과, 둘째, 그는 의를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이 둘은 다 합리적인 기대다. 로마서 3:25절은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 죄는 구약성경을 믿는 자들의 죄로서 지나가 버린 것들이다.) 다윗이 간음과 살인을 범하였기에 율법에 따르면 당연히 투석으로 응징하여야 마땅한 그의 죄를 풀어주신 하나님은 진정 의로운 이신가? 하나님이 다윗을 풀어주신 것으로 보아 의롭지 않으신 이처럼 보인다고도 하겠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예수를 내가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웠으니...” 라는 말씀 속에 담겨있다. (그런데 그러한 말씀 가운데에는 '공공연히' 라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골고다의 사건을 예견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형틀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은 우리들의 죄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에 관한 무엇인가를 우리들에게 알려주시려고 그랬다. 그것은 하나님이 저 구약의 사람들이 저지른 죄들을 눈감아 주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의롭다 할 수 없을 것이기에 그들이 지은 그 모든 죄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속죄시키려 예견하셨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그의 독생자를 골고다의 제물로 세우기 위해 저들의 죄를 눈감아 주셨던 것이다. 즉, 예수께서 그 모든 형벌을 혼자 감당함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구약의 사람들이 지은 죄를 눈감아 주셨던 일에 대한 정당화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인간의 문제는 명백하다. 만약 의로운 하나님이 죄를 벌하여야만 하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 하였으니” (로마서 3:23),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피하려는 희망을 어느 누가 가질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오직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개념을 싫어하는 신학자들은 '위무(慰撫, propitiation)' 라는 단어 (어떤 번역에 있는 속죄(贖罪, expiation) 라는 단어와 대조하여)가 성경의 가르침 속에서 일관되게 사용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을 위무한다. 그런데 '위무' 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진노를 돌려놓는다는 생각을 내포한다. Apostolic Preaching of the Cross라는 책에서 리온 모리스 (Leon Morris)는 이렇게 지적하였다. 즉, 이것은 신들을 달래기 위해 닭을 죽여 하늘에 드리는 제례 과정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이 지은 죄에 내려질 징벌을 혼자서 감당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처리를 바꾸게 하였다. 하나님은 진노 대신에 이제는 긍휼로 반응하실 수 있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것은 그의 진노와 그의 율법 그리고 그의 의가 이제는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이로운 뉴스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즉,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위무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신앙을 가진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대신에 긍휼을 받을 것이다.
어쨌거나 의로운 하나님은 의를 요구하신다. 그는 진정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모던니스트들은 비록 동전의 한 쪽만을 보고 있다지만 옳은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영원히 그와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들 가운데 어느 누구 하나라도 멸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모두가 다 회개하기를 원하신다.” 그렇지만 그의 의는 의를 요구하신다. 그런데 어느 누구가 하나님께서 설정해놓으신 완벽한 기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다시 이런 질문이 우리를 찌른다. 즉, ”어떤 희망이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한 팔로는 우리를 영원히 함께 하자시며 사랑의 포용으로 우리를 감싸 안으시지만, 다른 한 팔로는 완벽한 순수성을 요구하는 그의 의로 인해서 우리를 밀어내며 곁을 안 주신다. 하나님의 애증의 양면성 속에 내재하는 이와 같은 갈등도 또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해결하신다. 로마서 3:26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용서를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선언한다. 정당화하는 역사는 (로마 가톨릭 교리가 가르치는 바처럼)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 관해서 발표하는 선언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 관해서 언급되는 그 무엇이다. 피진 신약성경(Pidgin New Testament)은 의롭다 하려 하시는 (justification) 행위를 ”하나님은 그가 옳다고 말씀하신다. (God say him all right.)” 로 번역하였다. 가히 정곡을 찌른 표현이 아닌가!
클로이든 성경학교(Cloydon Bible College)의 전임 학장, 차스 롤즈 박사 (Dr. Chas. Rolls)는 의롭게 하는 행위 (justification)에 대해서 아주 괄목할만한 해설을 한 적이 있었다. 겟세마네 정원에서의 사건(예수가 배신을 당하던 날 밤)이 벌어질 때, 용감한 베드로가 검을 휘둘러 말고(Malchus) 라는 사람의 귀를 잘라버렸다. 이 자는 바로 대제사장의 하인이었다. 예수님은 다정하게 당신의 손으로 그 떨어진 귀를 집어 들고 제 자리에 갖다 붙이셨다. 그런데 말고는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호의를 아직은 충분히 소화하지 못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하였다. 그래서 어쩌면 그는 돌아가 대제사장에게 이와 비슷하게 보고했을 것이다. 즉, ”저는 예수의 추종자들 중 한 사람에게 원한이 있습니다.” ”아, 그래! 무슨 짓을 하였던고?” 대제사장이 대꾸를 하자, 그는 ”그놈이 제 귀를 잘라내었습니다.” 했을 것이다. 그 대제사장은 그의 한 쪽 귀를 쳐다보고는 다른 귀도 살폈다. 그리고는 이 자가 혹시 세 번째 귀를 가지고 있었던가 하고 의아해 하였을 것이다. 그의 두 귀는 말짱하였을 테니까! 그러니 이제 베드로에게 어떤 죄목을 과하여야 하겠는가? 당연히 유죄 판결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증거가 없다. 그는 무죄판결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그 귀를 복원하셨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법은 그를 고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사람의 문제다. 만약에 의로운 하나님이신 하나님께서 천국에 들어갈 자격조건으로 의로움을 요구한다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다가가 본 적이 없는 우리로서는 어떻게 이 자격을 딸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에는 두 가지가 존재한다. 그 중 한 가지는 로마서 3:25-26절에서 말씀하신 의다. 즉, ”예수를 화목 제물로 받아드림으로 인해서 하나님 당신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의로우심이고, 다른 한 가지는(22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이고, ”선물로 받은 의롭게 됨”을 말한다. (로마서 5:17)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의롭다 여기신 의(로마서 4:3)가 그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제 힘으로는 도저히 이겨내기 어려운 문제의 해법을 하나님이 풀어주시는 경이로운 대답이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힘으로 얻은 의로움이 아니고, 골고다의 언덕에서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덕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의로움으로 인해서 천국 입국사증을 얻게 된 것이다.
주먹구구식 계산으로 따져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하나님 앞에 나선 우리들의 일차적 모습은 무한대의 마이너스였다... 천국 입국자격 심사에서는 아득히 먼데 있는 우리를 발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로 인한 죽음이다. 그러나 내가 믿음으로 나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그리고 구세주로 영접할 때면, 하나님은 예수의 그 죽음으로 얻는 이익을 내 계산서에 기재하시어 나의 죄를 하나님께서 온전히 용서하실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신다. 사실 그 결과로 내 죄의 기록은 영(零)이 되는 것이다. 더욱이 경이로운 일은 내가 의롭다 여기심을 받게 된 일에는 긍정적인 요소가 내포되어 있는데─그것은, 내 죄가 사함을 받을 수 있게 그리스도의 죽음이 내 계산서에 계상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이 내 계산서에 계상되어 나도 또한 사랑받는 하나님의 권속으로 받아드려진다는 일이다. 내가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은 나를 보다 선량한 사람으로 만들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안(聖眼)으로 보시기에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서 그가 정당하게 나를 의롭게 하신다는 뜻이다. 그럼으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당하지 못하게 아무한테나 천국입국사증을 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범인이 50만 불을 횡령하고 도주한 죄벌로 형기를 다 마쳤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그가 출감하였을 때에도 그 오명은 여전히 남아있어서 예전에 근무하던 은행에서 그를 받아드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받는 권속으로 받아드려진 이상 우리의 죄의 흔적은 말끔히 지워진다.
애미 카밍클 (Amy Carminchael)의 자서전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이 있다.
당신은 과연 어디에 당신의 영원을 쓰시려 하십니까?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쓰시렵니까? 이 글을 읽는 분들은 그 곳에서 ”행복하게 영원히 살게 될 것”을 이 사람은 확신한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3/i3/creator.asp
출처 - Creation 3(3):36–45, August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