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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연대문제

젊은 지구

젊은 지구(The Young Earth) 9장. 

암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


     * 젊은 지구(The Young Earth) 9장. 암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223 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신학 전선 (神學戰線; Theological Battlefront)


“생각이 결과를 결정한다.” “생각으로부터 능력이 나온다.”는 말은 참으로 적절한 말이다. 사고방식은 사회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진화론적인 사상들은 자아 가치와 자아 개념과 강하게 충돌한다. 인류가 원시 점액질(粘液質)의 진흙(slime)에서 일어난 우연한 사건에 의한 우연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믿는 사람과는 전혀 다른 식으로 결정하고 주위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각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을 지녔다면 그가 어떻게 그 형상을 해치고, 더럽히며, 파괴하는 짓을 할 수가 있겠는가?  

(주: 사람이 동물이라면 상대를 가리지 않는 성행위, 동성애, 인종차별, 배신, 낙태, 유아살해, 안락사, 폭력과 같은 것들을 모두 동물의 특성들로 이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젊은 지구 사상도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준다. 우리는 하나님을 먼 옛날에 계셨던 분으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바로 가까이 계셔서 우리의 삶과 지구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개입하시는 분으로 생각하는가?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는가?

 

하나님이 지구와 그 계(界)를 지으시는데 45억 년 이상이 걸렸다고 하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의 견해를 잠시 생각해보자. 이런 견해는 성경의 하나님과 전혀 다른 의미의 하나님을 만들어냄으로서 신학 이론 자체를 내적으로 모순 될 수밖에 없게 만들었음을 밝히겠다.

 

첫째,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심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분이 천지창조(天地創造)의 목적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아신다면, 함께 대화하고 사랑과 자비를 쏟아 부어 주시며, 사랑을 되돌려 받을 수 있는 대상인 피조물 안에 그분 자신의 형상을 (추가적인 조처로) 재창조하는데 그렇게 오래 걸릴 이유가 있는가? 수십억 년에 걸친 진화의 방향성 없는 진행과 중단에는 하나님의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을 받을만하고 하나님의 ‘형상’(形象; image)으로서 적절한 동물을 찾을 수 있을까하고 여러 동물들을 살펴보고 계셨을까? 사람이 창조되기 오래 전에 전멸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는 위풍당당한 공룡들은 어떤가?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가능성 있는 후보들로 고려되었지만 단지 탈락하고 만 것일까? 또 이 기나긴 수십억 년 이상 계속된 죽음과, 피 흘림과 폭력에는 무슨 이유가 있는가? 왜 하나님은 결국 사람을 택하게 되는 이상야릇한 시나리오를 만드셨을까? 하나님이 전지(全知)하다면 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몰랐던 것처럼 보이는지? 하나님이 전능(全能)하시다면 틀림없이 더 나은 방법으로 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진화론자나 지구가 오래되었다고 주장하는 창조론자가 생각하기로는 아담의 창조 전후의 세계는 오늘날과 본질적으로 같다. 다른 동물을 죽이는 동물들, 동식물들을 해치는 질병들. 독 담쟁이, 가시덤불, 기생충, 바이러스 등, 에덴동산의 아담 발 밑에는 수천 피트에 이르는 화석을 함유하는 암석층이 있었을 것이며, 지구가 오래되었다는 설의 지지자들은 그 화석들을 지구상에 있었던 기나긴 역사의 폭력의 결과로 해석하였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생명과 사랑의 영원한 원천이신 하나님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고도 하나님께서는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세기 1:31)고 하시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지금 세상을 “심히 좋다”고 하지 않으신다. 좋지 않게 여기시고, “뜨거운 불에 녹아”지고 나서 “의(義)의 거하는 바 새 땅”을 지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베드로 후서 3:13).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세기 1:31)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베드로후서 3:13)

오랜 지구를 지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사탄이 하늘에서 오래 전에 쫓겨 나와 계속 지상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모든 것이 “심히 좋았다”고 선포하셨을 때 사탄과 무수한 귀신들은 어디 있었단 말인가? 사탄은 나무 뒤에 숨어 하와를 유혹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가? 하나님의 창조를 왜곡하려고? 창조의 왜곡은 멸망과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 이미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것은 ‘심히 좋은’ 것이 전혀 아니다. 거룩하고 완전하신 성경의 하나님이 어떻게 이것을 심히 좋다고 선포하실 수 있단 말인가?


더 곤란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의 세계와 같은 모양으로의 ‘회복’을 약속하셨다는 것이다. 오랜 지구론자는 아담이 45억 년 역사의 마지막 부분인 불과 몇천 년 전에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아담이 살던 세계는 현재의 세계와 다름이 없어야 한다. 그럼 이 세상이 회복되어 어떤 모양이 된단 말인가? 수십억 년간 있었던 멸망과 사망의 세월로 회복된단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성경은 말하기를 “그 때는 피 흘림과 잡아먹는 일이 없으며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누우며 거기서는 사자도 풀을 먹을 것이며 사람과 동물계는 서로 우호적이 될 것이라고 한다”(이사야 11:6-8).  오랜 지구론자로서는 그런 일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며, 그러니 어떻게 이 세상이 그런 상태로 회복될 수 있겠는가?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이사야 11 : 6-8).

 

저주 (詛呪; curse)


오랜 지구 사상에 기인하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는 창세기 3장에 묘사된 아담의 죄 때문에 모든 창조물에 임한 저주와 죄의 대가인 사망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관찰에 의해 모든 것이 죽어 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은 늙고 죽는다. 동물도 죽는다. 식물은 시들어 없어진다. 기계는 닳는다. 문명도 사라진다. 달의 궤도도 점점 작아진다. 별들도 사그러진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고”(로마서 8:22) 있으며, 아담이 범죄한 이래 계속 그래 왔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로마서 8:19-22)

위의 로마서 8:19-22은 오랜 지구론의 정곡을 찌른다. 여기 나온 단어들을 자세히 살펴보자. ‘creature’(피조물)(19, 20, 21절)과 ‘creation’(피조물)(22절)은 실은 같은 말이다 (역자주: 우리말 성경에는 피조물이라는 같은 단어로 번역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creature, creation의 두 가지 단어로 번역되어 있다. 영어 단어 creation과 creature를 우리 말로 옮기면 창조물이 올바르다. 창조물은 창조자의 입장에서 피조물은 지음을 받은 자의 입장에서 사용하는 단어이다). 정확한 번역은 모두 ‘creation’이다. ‘모든 피조물’(whole creation)(22절)이 ‘하나님의 자녀들’(21절)에게 영적 영역에서 이미 주신 것 같은 해방을 기다리면서 저주(詛呪; curse)의 굴레 아래서 탄식하고 있다. 동물, 식물, 지구 그 자체도 포함하여 인간이 아닌 모든 것이 이 ‘썩어짐의 굴레’ 아래 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도(23-26절) 육체가운데서 고통(苦痛)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우리 몸의 구속(救贖)’ (23절)을 경험할 것이다. 만물이 저주 아래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피조물은 지으심을 받은 ‘매우 선하신’ 목적 달성의 실패를 의미하는 상태인 ‘허무한데 굴복’(20절) 하게 되었다. 죄와 그로 인한 저주 때문에 하나님이 제정하신 질서를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굴복하는 것은’(20절)(역자주: 영어 성경에는 “was made subject”로 동사의 시제가 분명히 드러난다)에서 동사의 시제는 모든 피조물이 영향을 받아버린 과거에 완료된 사건을 말한다. 이런 사건으로 거론될만한 것으로는 창세기 1:1과 창세기 3:14-19의 두 가지밖에 없다. (휴즈 로스 박사와 다른 오랜 지구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창세기 1:1에 나오는 만물의 창조가 ‘허무한데 굴복’할 만물을 포함한다면 하나님은 수많은 아픔과 괴로움과 죽음을 지으신 것이 되며, 그 이유는 만물이 그러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피에 주린 동물, 독 있는 식물, 전염병, 기생충, 이런 것들을 지으셨단 말인가? 그러고서 “심히 좋다”고 하셨을까?  하나님이 서로에 대한 의리와 염려 같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지각 있는 동물을 만드시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아픔과 무서운 죽음을 겪도록 하셨단 말인가?


인류까지 생각하면 상황은 더욱 나빠진다. 창조 직후의 세상은 오늘날의 세계와 똑같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질환(疾患)으로 시달렸을 것이다. 이런 세상이 ‘심히 좋은’가? 유산된 태아, 애통하는 과부, 나환자, 암 환자, 장애아나 장애인은 어떤가? 기근, 자연 재해, 가뭄은?  기형으로 태어난 사람과 비참한 돌연변이는? 대량학살, 인간 제물,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잔혹 행위를 포함한 인간의 행동 양식들을 하나하나 생각해보라. 인류학자들이(자기들의 견해대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으로 측정하여) 말하는 바로는 이것들은 성경이 말하는 아담의 때 보다 훨씬 전 수 백 만년 동안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세상은 ‘심히 좋지’ 않다. 우리들의 이 세상은 하나님이 지으신 ‘심히 좋은’ 세상과 같을 수 없다. 현재의 이 세상이 하나님이 지으신 ‘심히 좋은’ 세상이라면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을 책임지셔야 한다. 그분의 거룩하심은 이 모든 것 중 어디에 있는가? 그분의 공의는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피조물을 파멸시킨 사건이 창세기 3장에 기록된 그것이라면 말이 된다.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배반이 ‘썩어짐의 종노릇’ 즉 저주와 죽음을 불러들였다. 하나님이 경고하신 대로(창세기 2:17) 틀림없이 죄에 대한 벌을 선고하심으로서 하나님이 거룩하심과 공의를 뚜렷이 드러내시지만, 한편으로는 또 죄와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창세기 3:15) 그의 은혜 가운데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원히 살도록 지음 받았다. 그들은 동산에서 생명 나무에 갈 수 있었다. 그들과 동물들은 채식을 하도록 되어 있었고 동물을 잡아먹는 행위는 있을 수 없었다(창세기1:29-30).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세기 1 : 29-30)

그러나 죄가 모든 것을 일그러뜨렸다. 죄는 하나님이 지으신 본래의 ‘심히 좋은’ 피조물을 망가뜨렸다. 그들이 불순종하고 금지된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네가 정녕 죽으리라”(창세기 2:17), 혹은 문자 그대로는 “네가 서서히 죽는다”고 하나님이 경고하셨다. 그들은 영적으로 죽을 것이며 육체적으로도 죽어가는 과정이 시작될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세기 3:19). 만물이 이 저주를 받는다. 동물들(15절), 식물들(18절), 땅(17절), 아담과 하와(15-19절) 등-모든 것이 이제 ‘썩어짐의 종노릇’(로마서 8:21) 아래 있다. 


(주: 좀더 설명해 보기로 하자. 식물은 생물학적으로 살아있으나 ‘생기’(breath of life)가 없다(창세기 2:7). 더 나아가서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레위기 17:11).  식물은 의식도 없고, 호흡도 없고, 피도 없다. 그러므로 성경적 의미의 삶으로는 ‘살아 있는’게 아니다. 그것들은 ‘살아 있는’ 것들에게 영양을 주기 위해 지음 받았다. 그것들의 생물학적 ‘죽음’(동물이라고 분류되지만 ‘더 작은’ 형태의 여러 가지 생명도 아마 마찬가지겠지만)은 살아 있고, 숨쉬며, 피로 채워진 피조물의 죽음에 끼지 못한다).


첫 번째로 기록된 죽음은 죄를 깨닫고 괴로워하는 아담과 하와를 위해 옷을 마련해 주기 위한 짐승의 죽음이다(창세기 3:21). 구약의 도처에 죄 값에 대한 피의 희생이 명령되어 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브리서 9:22). 죄 때문에 죽음이 들어왔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지구가 젊어야 논리적으로 합당하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2)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린도전서15:20-22)

그러면 지구가 오래되었다면 어떤가? 그렇다면 화석은 아담이 죄를 범하기 전 수 억 만년 동안 생명을 가진 피조물의 죽음이 만연했다는 증거로 해석된다. 자연 선택의 과정을 통하여 더 적합한 자들은 살아남고 덜 적합한 자들은 멸종시키는 죽음이 역사를 지배해 왔다. 그럼 죽음이 정상이고, 죽음이 자연스러우며, 죽음이 바로 모든 것들의 존재 방법이다. 하나님이 이런 종류의 세상을 지으셨다면, 우리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인가? 그는 가학적이고, 변덕스럽고, 잔인하신가?


설상가상인 것은 진화론자에게는 죽음이 제일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다. 죽음은 진화 작용에 연료를 공급해준다. 죽음이 사람을 출현하게 했다. 예를 들면, 공룡의 멸종이 있은 후 포유동물이 출현했고, 그리고 결국은 사람이 출현했다. 우리 시대의 잘 알려진 진화론의 대변인격인 칼 사강(Carl Sagan)은 이렇게 말한다.

"진화의 비밀은 죽음과 시간에 있다. 즉 환경에 부적합한 수많은 생명체들의 죽음, 그리고 우연하고도 유익한 그리고 미미한 돌연변이들이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시간, 즉 유익한 돌연변이들이 천천히 축적되어 갈 수 있는 시간에 그 비밀이 있다." - 칼 세이건(Carl Sagan, Cosmos, 1980, p. 30)

찰스 다윈은 자연 도태에 의한 진화에서 죽음이 핵심적 역할은 한다고 인식했다. ‘종의 기원’의 클라이맥스인 마지막 단락이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수백 페이지에 걸쳐 자연 도태의 증거와 결과를 나열한 후 그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이리하여 만물의 투쟁에 의해, 기근과 죽음에 의해, 우리가 보기에 가장 우수한 개체, 즉, 더 고등한 동물들(예를 들면 사람)이 잇따라 출현한다’. 다른 말로 하면 죽음으로부터 인간이 출현한다.


실제로 찰스 다윈은 자연도태(自然淘汰; natural selection)에 주목하게 된 요인으로 질병과 고통, 죽음의 실재를 들고 있다. 그는 무신론적인 글을 쓰지 말아 달라는 호소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무신론적 글을 쓸 의도는 아니었으나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그리고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우리들의 모든 면에서 설계와 은혜의 증거를 볼 수 없었음을 인정한다. 나는 은혜로우시고 전능(全能)하신 하나님이 살아 있는 애벌레의 몸속에서 ‘이치누모니대’(기생충의 일종)가 양분을 빨아먹고 살도록 뚜렷한 의도를 가지고 계획하여 창조했거나 혹은 고양이가 생쥐를 잡아먹도록 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것을 믿지 않게 되면 눈이 특별하게 설계되었다고 믿을 필요도 없어진다 (1860년 5월 22일 찰스 다윈이 하버드 대학 교수인 아사 그레이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이렇게 진화론자에게 죽음은 사물의 자연스런 상태이며 죽음이 인간을 낳았다. 오랜 지구 창조론자들도 사람 이전부터 죽음이 있었으며(인간을 닮은 ‘동물들’의  죽음까지), 하나님은 죽음을 사용하여 사람이 출현할 길을 준비 하셨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죽음, 질병, 고통이 다스리는 세상이 사람 이전에, 분명 사람이 죄를 범하기 이전에 지구상에 있었다는 것이다.


저주의 결과


죽음은 또한 기독교 신앙의 중심 주제이기도 하다. 첫째 죽음은 죄에 대한 형벌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6:23), 죄가 우리와 거룩한 하나님 사이를 분리시켰다. 그러나 그렇게 끝나버리고 만 것은 아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에덴동산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하는가? 그날 저녁 하나님이 그들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 내려오셨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가? 그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들은 하나님을 피하여 숲 뒤에 숨었다. 죄가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저주스러운 큰 담을 만들어 버렸다. 죄가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죄가 죄 있는 사람과 죄 없으신 하나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장벽을 만들었다.


하나님이 죄에 대한 형벌을 선포하실 때는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한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의 값을 지불하라고 요구하신다. 하나님이 의로우시므로 형벌을 제정하셨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그 지으신 창조물을 다스릴 법과 법을 어긴데 대한 형벌을 제정하실 권세를 갖고 계시다. 아담과 하와는 거역하여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다.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죽음의 형벌을 요구하신다. 육체적 죽음뿐만 아니라 영적 죽음 즉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우심보다 더 큰 것이 활동하고 있었다. 나는 하나님이 은혜도 역시 보여주셨다고 확신한다.


한번 생각해보자. 아담과 하와가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다. 그들은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들의 새롭게 창조된 육체는 유전적 결함이나 질병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영원히 살았을텐데, 숲 뒤에 숨게 되었으며 거룩하신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었다. 당신은 이보다 더 무서운 일을 상상할 수 있는가? 죄의 결과인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를 다른 말로 해보자. 성경은 이것을 ‘지옥’이라 부른다. 아담과 하와는 지옥이라 불리는 곳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상황은 근본적으로 비극적이고 희망이 없었다.


더욱이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면 아담과 하와가 어떠했을까를 생각해보자. 그들은 거역하고 회개하기를 거절하며 그들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기를 거절했을 것이다. 그들의 범죄는 일상적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사탄과 그들의 죄성으로 인하여 더 심한 방탕으로 빠져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수 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인간들은 그러한 것들을 생각해보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죄에 대한 사형 선고는 몇 가지 목적이 있다. 죄인이 살아 있을 수 있는 기간을 제한하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제한을 가한다. 


이것은 또한 그들의 반역에 의해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일그러진 것을 아담과 하와에게 생각나게 해주는 것이다. 한 동물이 다른 동물을 죽일 때마다 또는 그들의 장자가 동생을 죽였을 때 그들은 “아, 이런 끔찍한 일이!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거야?”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갔을 것이다. 


특히 죄 값으로 제정한 사망은 누군가 죄가 없는 사람에 의한 죄 값의 지불을 가능케 했다. 이제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이 창조하신 사람의 모양으로 죄 없으시고 죄 값으로부터 자유롭게 사시다가 저주받은 사람 대신 죽으실 수 있게 된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6:23),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으니”(고린도전서 15:4). 그가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죽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시어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셨다. 죽음이 죄로 찌든 영원한 삶으로부터의 도피처를 제공하고, 새로운 삶의 문을 열어주고,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를 주었는데, 이 모든 것이 창조주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 가능해졌다.


그러나 진화와 오랜 지구가 사실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아담 이전에 화석이 생성되었다면 어떻게 되는가? 죄가 창조물에 들어오기 전에 공룡이 전멸되었다면? 아담의 범죄 이전에 사망이 있었다면 창조는 이미 훼손된 것이며 죽음은 죄의 값이 아니다. 죽음이 죄의 값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두 개의 개념이 모순되지 않는가? 사망이 죄 이전에 있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무익하고 의미가 없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흔들리는 것이다. 오랜 지구 개념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교묘하게 훼손하는 것이다.


최근에 나는 회교도가 압도적으로 많은 국가인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2,500명이나 되는 공립학교 학생, 교사, 대학 교수들에게 강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나의 강연은 터키의 교육계가 창조론적인 세계관으로 돌아갈 것을 주창하는 준 정부기관이 후원하는 강연회의 일부였다.


열 네 번째 터키 여행이었다. 나머지 방문은 모두 노아의 방주를 조사하기 위한 답사와 관련된 것이었다.1) 터키에서의 사역을 위한 준비로 이슬람 사상을 몇 년에 걸쳐 연구해 왔는데 이번 여행 바로 전에 창조와 홍수에 대한 이슬람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연구했다.


이슬람 경전인 코란은 구약의 많은 부분을 다시 이야기하고 있다. 코란은 6일간의 창조, 아담과 하와, 에덴동산, 최초의 완전한 상태, 금지된 과일을 먹음, 동산으로부터의 추방, 홍수 전의 사악한 세상, 그리고 온 세계적 홍수를 가르친다. 다른 곳이 몇 군데 있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골자는 똑 같다.


말하자면 저주를 제외하고는 같은데, 언뜻 보면 그 차이는 사소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 사소하게 보이는 차이에 의해 그들 나름의 구원에 대한 기본적인 틀이 만들어진다. 그들의 사상은 우리가 지면을 할애하여 논의해 볼 만한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코란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열매를 먹었을 때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했다. 회교도들은 죄의 형벌이 사망이며 아담과 하와가 동산으로부터 쫓겨나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더욱이 그들은 인류의 한 사람 한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매우 비슷한 것 같지만, 회교도들은 인간의 죄가 단지 창조물의 균형을 잃게 했으며 창조물들이 더 이상 최초의 완전성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창조물에 임한 성경적 저주에 대한 이해가 없으며, 또한 아담의 죄가 아담의 자손들에게 유전되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죄에 대해 각 사람이 받는 형벌은 자신의 개인적 죄 때문이며 그러므로 알라에게 복종하면 알라의 은혜를 다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유일한 구원의 방법이다. 이슬람 체제에서 복종은 메카를 향해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고 가난한 자에게 베풀고 라마단 기간에 금식에 참여하고 메카를 순례하고 회교신경(回敎信經; Moslem creed)을 암송하는 것 등이다(회교의 다섯 가지 계율). 일상적인 죄를 회개하여야 하지만 용서를 받거나 받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알라에게 달려있다. 알라로부터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객관적인 방법이 없다.  


회교(回敎)도들이 저주를 가볍게 다루고,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절망적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개인적인 죄와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죄 때문이며, 오늘날 그들이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죄와 벌은 전적으로 자신의 개인적 행위의 결과로 본다. 그러므로 개인적 행위가 그들을 구원해 준다고 보는 것이다. 그들은 구속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와 죄성에 대한 값을 갚기 위하여,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하기 위해 오셨다. 아담의 반역으로 인한 모든 창조물에 내린 저주에 대한 치료 방법이 단 하나 있는데 그것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진노한 창조주 자신의 죽음이다. 이러한 개념을 가르치는 것이 이슬람 복음화의 열쇠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창세기 1-3장의 기본 개념을 부인하는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오늘날의 복음주의 신학교는 우리 각 사람에 내재하는 죄성을 인정하지만 역사적 인물로서의 아담을 부인하며 최초 창조물의 선함을 부인하며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아담의 죄를 부인하며 아담의 반역의 결과로서 모든 창조물(동물, 식물, 지구, 모든 인류)에게 유전된 저주를 부인한다. 


당신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역사적 사실인 아담의 범죄와 그 결과로서의 저주를 부인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정통 기독교 교리를 뿌리째 흔드는 것이며, 오랜 지구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회교적인 그리고 이교나 주요 종교의 공통적인 교리인 행위에 의한 구원으로부터 교묘하게 한발짝 살짝 옆에 놓게 해준다. 죄에 대한 한 단계 낮은 견해는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구세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현재 그러한 견지를 주창하는 사람들은 주님과의 동행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그들의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겠는가? 비논리적인 토대의 세계관과 오류로 가득 찬 계시는 오래 견디지 못한다.


저주에 대한 가르침이 회교권 선교에 대한 열쇠인 것처럼 성경적 저주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이 기독교 신앙을 진정한 성경적 세계관으로 되돌리는 열쇠를 제공한다.


이러한 논의와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되는 문제들, 즉 죄 이전의 죽음, 질병의 문제, 만물의 쇠퇴 등의 문제가 창조과학 연구소(미국) 사역의 주요 영역을 차지한다. 이러한 논의 외에 잘못 가르침을 받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효과적으로 주목하게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일단의 기독교인들 사이에 창조에 대한 관심이 현재와 같이 부활하게 된 것은 이러한 논의의 전파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진화론자 동료들이 그리스도인 형제자매 보다 이러한 문제를 더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무신론자로 자처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자.

"기독교는 진화론에 대항해서 필사적으로 과학[‘자연주의’를 말한다]과 싸웠으며 아직도 싸우고 있고 앞으로도 싸울 것이다. 왜냐하면 진화론은 예수의 이 세상에서의 삶이 필요한 이유를 완전히 허물어 버리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와 원죄를 파기해버려라, 그러면 잡석 속에 버려진 신의 아들의 불쌍한 유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의 죽음의 의미를 거절하라. 만일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 죽은 구속자가 아니라면-이것이 진화가 의미하는 것인데-기독교 신앙은 허구이다." - 어메리컨 에이씨어스트 지 1978년 2월호 19, 30쪽, 리처드 보자르스 저 ‘진화의 의미’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양쪽에 발을 걸치고,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면서도 진화를 받아들이고 오랜 지구를 받아들이기도 한다. 의심할 여지없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면서 화석이 범죄 이전에 있었다고 믿을 수 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젊은 지구 창조론자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오랜 지구 사상과 기독교 둘 다 옳을 수는 없다. 진화가 사실이라면 기독교 신앙이 틀린 것이다. 지구가 오래 되었다면 기독교 신앙이 그른 것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서로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로 반대된다. 그들은 서로 배타적이다. 위의 인용문에 밝힌 바와 같이 진화는 예수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은 구속자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개인적 전선


지금까지 알아본 바와 같이 암석과 화석이 진화와 오랜 지구의 증거로 사용되지만 분명한 것은 아니다. 젊은 지구에 훨씬 더 잘 어울리는 많은 증거를 나열할 수 있다. 증거라고 하는 것들은-과거에 대한 서로 다른 두 주장을 과학적 의미로 증명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는데-젊은 지구와 더 잘 어울린다. 그리고 물론 성경은 분명히 젊은 지구를 가르친다. 만약 지구가 오래되었다면 실질적으로 기독교 신앙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하나님은 속이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사상을 증명하기 위해 온 세상을 암석과 화석으로 가득 채우시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역사와 젊은 지구가 정확한 것이라면 암석의 증거도 일치해야 한다.


증거에 대한 해석 중 진화와 오랜 지구에 부합하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최선의 해석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역사를 사실로서 채택함으로써만 암석에 대한 해석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암석들은 기나긴 세월을 말하기보다는 죽음과 파괴를 말한다. 오늘날의 것을 작아 보이게 하는 속도와 규모와 강도의 격변적 물의 작용에 의해 퇴적된 퇴적물이 암석이 되었다. 화석들은 죽은 것들인데, 지각 격변(어떤 것은 홍수에 뒤이은 정도가 좀 약한 것도 있다)시 죽은 것들이다. 이러한 물에 의한 대격변은 노아의 홍수 외에는 없다.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홍수는 죄에 대한 심판이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며 노아 시대의 문명을 전적으로 사악한 것으로 보았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6:5-7)

‘죄 값’은 항상 죽음이다. 이것은 노아 시대에 있어서 분명한 진리였으며, 하나님이 죄에 대한 벌로서 홍수를 내리셨다. 죄가 아주 좋은 하나님의 창조물을 왜곡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들을 전멸시키고 다시 시작하기로 작정하셨다. 암석들이 죄 값과 사악한 홍수 이전의 세계를 우리에게 희미하게나마 생각나게 해준다. 그리고 암석들은 우리로 하여금 오늘날의 세상이, 하나님이 홍수 전의 세상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도록 한 것과 똑같은 도덕적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누가복음 17: 26, 27, 30)

우리가 사는 오늘날의 세상에 대한 적절한 묘사가 위의 성경 구절과 창세기 6장에 있으며, 다가올 심판이 멀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암석과 화석들도 영원하지는 않으며 역시 소멸될 것이다.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버리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이 불살라 없어질 것이다”(흠정역 베드로후서 3:10). 그러나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베드로후서 3:13). 새 땅에는 죽음과 죄를 생각나게 하는 화석이 없을 것이다.


경건한 노아가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구원의 은혜를 받은 것같이  우리도 임박한 심판을 피할 수 있다. 오늘날의 구원의 방주는 나무로 만든 배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십자가 상의 죽음을 통해 우리 죄 값을 갚으셨으며, 우리는 그를 통해서 우리의 죄 값인 죽음과 심판을 피할 수 있으며 그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로마서 6:23).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죄를 지었으며 거룩한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마서 3:23). 각 사람의 죄는 죽음의 벌과 선하고 거룩한 모든 것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어 마땅하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은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모든 일을 이미 완료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디도서 3:5).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린고후서 5:21).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그러나 예수님은 죄와 사망을 이기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시어 믿는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한복음 11:25).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아버지께 가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기의 죄에 적용시켜, 죄 값을 이미 지불했으므로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에게 요구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용서와 깨끗케 함과 죄에 대한 승리와 죄의 습관을 깰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죽음만이 있었던 우리에게 생명-영생-을 주신다. 수 백 만년의 죽음과 고통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자와 함께 영원한 시간을 보낼 것이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루셨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 2:7).



번역 - 한국창조과학회 광주지부

출처 - 창조 139호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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