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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고고학에서는 석기시대→청동기 시대→철기시대?

미디어위원회
2004-07-26

고고학에서는 석기시대→청동기 시대→철기시대?

김희택, 박진호 


답: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계보에 의하면 인간의 역사는 단지 수천 년 정도가 아니라, 그 연대를 수백만 년까지 소급하여 올라간다. 그래서 400만 년 전에서 130만 년 사이에 가장 오래되었다는 인류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에서 4만 년 전에 출현한 현생인류의 직계조상이라는 크로마뇽인(Cro-Magnon man)까지 오랜 역사계보를 주장한다.


이 주장에 따른 원생인류(原生人類)들이 가지고 있었다는 석기문명(石器文明)에는 '올도완(Oldowan)' 석기문화의 호모 하빌리스(260만 년 전), 유럽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일부지역에 있었다는 구석기 문화전통인 '아슐리안(Acheulian)' 문화의 호모 에렉투스(150만 년~15만 년 전), 무스테리안(Mousterian) 문화의 네안데르탈인(20~10만 년) 등이다. 


그러나 진화역사를 믿는 현대의 인류학자(人類學者)들이 주장하는 이 연대를 자세히 살펴보면 인류의 역사가 최소한 수십만 년 이상이 된다는 주장에 의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위에 나온 네안데르탈인에게 10만 년을 할당한다고 한다면, 이보다 연대가 더 오래 매겨진 호모 에렉투스는 적게 잡아 5만 년 이상, 계속해서 올도완 문화를 일으켰던 호모 하빌리스에 대해서는 250만 년이라고 하는 엄청난 공백기간이 남는다. 이는 문서화(文書化) 되어 믿을 만하다는 인간 역사시대를 5000년 전으로 잡을 때, 인간 역사시대의 전 기간보다 각각 10배, 그리고 500배나 되는 엄청난 기간이 시간의 공백 속에 파묻히게 된다. 


이 시기에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진화론자들은 정확히 알고 있는가? 학자들이 어렴풋이 알고있는 사실은 단지 네안데르탈인의 거친 부싯돌이 단지 크로마뇽인들에게 와서는 약간 진보한 비교적 균형 잡힌 대칭적인 모양으로 개량되었다는 것이다. 끝부분이 약간 더 뾰족하고 섬세하게 다듬어졌고, 타격법이 좀더 계획적이고 세련되어 졌다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사실상은 거의 동일하다. 따라서 이렇게 오랜 공백의 기간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의구심이 당연히 생기게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진화론자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과연 오늘날 고고학, 인류학의 기초가 되는 연대기준이 과연 정확하고 확실한 기준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현대의 고고학자는 문명의 진화와 진보를 판단할 때 돌의 화살촉과 창의 끝날에 중점을 둔다. 그리고 신석기 시대의 것은 구석기 시대의 것과 비교하여 보면 정교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구석기 시대보다도 신석기 시대의 문명이 발달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이 곧 문명의 발달단계와 연결되는지는 의문이다. 그 반대의 예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모든 기술에서 다 뛰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것은 태고시절이나 현재나 변함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숙련공은 완전한 제품을 만들어 낼 수가 있으나, 견습공은 만족할 만한 것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구석기 시대의 인간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말하자면 견습공이었다. 그러나 그 만큼 미개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대재난(창조론적 입장에선 노아의 대홍수를 말함)으로 말미암아 가진 것을 다 잃고 벌거벗은 것이나 마찬가지 상태로 황량한 대자연속에 내동댕이쳤다고 하자. 도구 한 가지도 손에 가지지 않았다. 있는 것이라고는 다만 생각할 수 있는 머리와 움직일 수 있는 손발뿐이다. 불완전하고 서툰 솜씨로 우선 눈앞에 있는 재료로 도구를 만드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잘 만들 수 있을까?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의 6.25를 생각해보면,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난갔던 사람들은 살 곳을 마련하기 위하여 당장 손에 잡히는 잡풀과 짚가마니, 나뭇가지를 이용해 초막을 짓고 살았던 기억은 6.25 세대의 사람들은 한 번쯤은 경험해 봄직했던 일들이다. 또 [파리대왕]이라는 소설에 나와있는 이야기처럼 현대 문명인들이 타고 가던 비행기가 절해고도의 무인도에 불시착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들은 비록 도시문명의 환경에서 생활했다고는 하지만, 일단 현대 도시문명에서 누려왔던 모든 편리함과 문명의 여러 가지 이기(利器)들이 단절된 이상 원시시대의 삶과 별반 차이가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노아와 그의 7식구와 방주에 승선했던 모든 동물들은 그 광대무변하던 홍수 이전의 온난하고 쾌적한 날씨와 생물이 살기에 최고로 이상적인 기후와 토지를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홍수 이후 급격히 나빠진 환경 가운데서 식량을 찾기가 어려워 극도의 굶주림에 허덕이게 되었을 것이다. 자연환경은 아마 상당한 기간동안 농사를 허락지 아니하였을 것이고, 인간들은 막다른 곤경에 처하게 되었을 것이다. 대홍수 전에는 지구의 온실화로 식물이 풍성하고 인간과 동물은 채식을 하였으므로, 서로 잡아먹는 큰 비극은 일찍이 없었다. 그러므로 노아가 동물들을 방주 안에 모두 안전하게 승선시켰을 땐 동물들의 공격에 대비할 필요가 없었다. 노아는 대홍수 기간동안 지탱할 수 있는 물과 식량 그리고 동물 사육에 필요한 기구와 방주 보수용 장비 및 기계들을 적재하였을 것이다. 홍수 후 노아가 정결한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 번제(燔祭)를 드린 후 인간과 동물이 육식을 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지상에선 약육강식의 처절한 생존 경쟁이 전개되게 되었다. 


인간들은 불을 무기화하고, 또 가지고 있던 철기들을 급히 변조하여 칼등의 무기들을 만들어 짐승과의 전투에 사용하였다. 그러나 식량은 절대 부족하였으므로 인간은 짐승의 공격에 대비할 뿐 아니라, 동물을 잡아 양식을 삼아야 했다. 그러나 동물을 잡아 사냥할만한 무기는 소량뿐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시날 평원으로 이동하는 동안에 노아의 자손들은 계속 증가되어 시날 평원에 이를 무렵에는 부족정도의 인구수로 불어났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생활해나가기 위해선 더 많은 무기와 연장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환경은 여전히 험악하였으므로, 지하자원을 개발하여 철기를 제작할 여건은 되지 못했다. 만일 노아의 후손들이 지상에 흩어져 있던 철광석을 발견할 수 있다면, 당장 그것을 제련하여 무기와 철기제품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홍수의 엄청난 퇴적으로 비중이 있는 철광석이 지표에서 보여지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사실상 노아의 가족들이 금속 제품의 공기구나 무기를 제작할 수 있으려면, 지하자원의 개발이 가능할 정도로 지각은 안정되어야 하며, 아울러 자연환경이 허락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조건은 여전히 불안정하였으므로, 지하자원개발을 엄두도 낼 수 없고, 단지 지표면에 산재한 암석조각들을 깨트리거나 다듬어서 무기나 생활에 필요한 각종 연장을 만들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시날 평지에서 처음 농사를 짓게 되었을 때에도, 처음에는 농사를 위하여 석기를 다듬거나 급하면 대충대충 깨뜨려 사용하였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추론이다. 


그리고 바벨탑의 파괴후 인류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었을 때, 흩어져 나간 사람들은 더욱 심각한 국면에 처하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민족 분산에 앞장 선 사람들은 홍수 후 출생한 2, 3, 4 세대들로서 홍수 이전 문명을 습득했었던 선조상(先祖上)들의 슬기로운 가르침이 중단되어 그들의 지식과 지혜가 현저히 낙후되었을 것이다. 노아의 경우에는 거의 모든 지식과 지혜가 한 사람에게 소장되어 있었으나, 이들의 경우에는 어떤 한 가지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의 지력이 한데 모아져야만 해결 가능했을 것이 분명하다. 더구나 이제 인간은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본유적(本有的)인 지식과 지혜를 상실했기 때문에, 경험과 학습을 통해서 상실된 분량만큼의 지식과 지혜를 터득해야만 했다. 게다가 메소포타미아 유역은 거대한 하천을 끼고 있어 다른 곳보다 빨리 인간의 거주와 생활에 맞도록 조성되었으나, 민족의 분산시 흩어져 나간 사람들은 새로운 하천을 발견하기까지는 예전에 노아의 가족이 이동하던 때와 같이 석기로 무기 및 공기구를 제조하면서, 현재 자기들 앞에 닥친 문제들을 처리해 나갔을 것이다. 


거룩한 족장 노아가 홍수이전에 당시로서는 가장 우수한 기술로 거대한 방주를 제작하며 채득했던 기술을 써먹을 수 있었던 홍수직후의 초기시대를 회상하면서, 어쩌면 노아의 후손들도 그와 비슷하게 석기의 무기 또는 공기구를 제조하면서 자기들의 살길을 모색해 갔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고고학자(考古學者)들에 의해서 발굴되어 지고있는 타제석기, 마제석기 등 갖가지 종류의 석기 유물들이 남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흩어져 나간 사람들이 각기 살만한 곳들을 찾아 그들이 문화를 건설하게 되었을 때, 지각의 안정과 더불어 지하자원의 개발이 가능하고, 기술과 능력 있는 소유한 사람이 여럿 있을 때, 이들의 문화건설은 좀 더 조직적이고 신속했을 것이며, 그렇지 못한 민족들은 침체에 머물게 되었을 것이 확실하다. 


특히 상호교류 없이 어느 지역에 고립된 민족들은 예전보다 더 못한 상태로 퇴보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파푸아뉴기니섬의 국경에 접해있는 이리안자야(Irian Djaja)섬의 알리족, 라니족, 다니족들은 그들의 조상부터 후대인 20세기에 들어와서조차 아직 석기시대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진화론에서는 240여 만년 전, 지상에 출현한 인류는 오랜 진화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의 현대인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문명진화에 진화를 거듭한 끝에 현재 20세기 현대 산업문명을 이루게 되었다고 말해 왔었다. 그러나 이리안자야섬의 이들 원주민처럼 현대 도시인과 같은 인간의 모습은 갖추었지만, 아직까지도 원시의 생활모습을 이어가는 '현대문명과 공존하는 살아있는 원시종족' 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종족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지역을 지켜온 신석기 시대의 원시 종족들로서, 이들이 신석기시대의 원시종족이라는 사실은 돌도끼나 돌칼로 만든 도구를 사용하고, 지금으로부터 50만 년 전에 출현했다는 베이징인(Sinanthropus erectus)처럼 아주 컴컴한 어둠 속에서 나무의 마찰에 의해 간단한 불을 지피는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이렇게 인근지역과 상호교류없이 고립되어 살았던 이리안자야 종족들은 1960년대 후반 철기가 그들에게 소개될 때까지 여전히 돌과 부싯돌만을 사용하는 후진성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여하간에 사방으로 흩어져 나간 모든 족속들은 노아와 더불어 지내던 자기들(노아의 후손들을 말함)의 본래의 사회상태를 회상하며, 또 그것을 회복해 가면서 인적자원과 천연자원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자기들의 문화를 개발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 격변하는 시기에, 지하자원 개발이 불가능한 자연환경 가운데서 처음에는 동물의 공격을 막거나,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 또 농사 및 생활용품을 위하여 부족한 철기대신 어쩌면 민족과 민족 간의 전쟁을 위하여 석기무기를 제작하였을 과도기적 문화건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 세계에 흩어져 나간 사람들은 퇴화를 겪으면서 황무지의 벌판 위에서 비록 처음에는 석기를 사용하여 문명건설에 착수하였을지라도, 천연자원을 개발하여 각기 특성 있는 고유한 문화를 건설해 나가는데는 긴 세월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엄청난 문화적 퇴보에도 불구하고 구비전승(具備傳承)된 얼마간의 지식과 지혜와 능력을 소유하였고, 무엇보다도 인간 본연의 타고난 독창적이고 창조성(創造性)을 개발시키는 능력이 있으며, 아울러 이를 더욱더 개발시키고 전수하며 협동해 나가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석기시대'에 해당하는 유물들이 세계 도처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대홍수와 민족의 분산이라는 대변동의 증거로써 인류역사상 가장 열악한 환경 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짜냈던 인간의 지혜를 보여주는 동시에, 고대문명의 발상까지 과도기적 현상이었음을 웅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류 역사상 대홍수로 인한 최악의 변동의 시대에 지극히 슬기로운 석기문화가 존재했던 것이다. 진실로 이것은 무지한 인간 진화의 흔적이나 문명도의 낮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홍수이전의 문명, 다시 말해 그 당시로는 최첨단 문화적 힘을 바탕으로 방주를 건조할 만한 능력까지도 소유한 고도의 문명이 대홍수를 겪고 난 후, 일부 야만화하여 가는 모습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도 하겠다. 이는 앞서 도시의 문명인들이 6.25 전쟁이나 비행기 사고로 인하여 퇴보될 수밖에 없었던 두 가지 예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빠를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고고학자나 인류학자들은 이와 같은 홍수로 인한 인류 역사의 주요 단면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태까지 발견된 석기들을 진화론적인 사고에 입각하여, 그때 그때마다 발견된 석기들을 진화론적인 철학에 갖다 맞추어서 그 편년을 수십에서 수백만 년 정도로 단정짓게 되었다. 


진화론이 입증된 생물학적인 자료는 하나도 없으면서도, 오늘날 생물학 등 자연과학 사고의 중심틀을 차지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석기시대론 역시 입증된 사적(史的), 유물적(遺物的) 자료가 미비한데도 불구하고 고고학적, 인류학적 인간의 계보 역사를 점령하고 있으나, 그 근거라는 것은 오직 진화되었다는 빈약한 믿음뿐인 것이다.

 

 

 *참조 : What about the ‘Stone Age’?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799/

A Better Model for the Stone Age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227

A Better Model for the Stone Age Part 2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225

The Stone ‘Age’—a figment of the imaginatio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689/


출처 - 창조지, 제 84호 [199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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