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기야 왕을 하나님이 구원하셨을 때 - 2부
: 고고학은 히스기야의 예루살렘 방어 준비에 대한 성경 기록을 확증해주고 있다.
(When God rescued King Hezekiah, part 2
Archaeology confirms the biblical account—Hezekiah’s preparations in Jerusalem)
by Keaton Halley
이 시리즈 글의 1부에서는 고고학이 BC 701년 앗수르(아시리아)의 왕 산헤립(Sennacherib, 센나케립)이 유다 왕국을 침략한 사건(열왕기하 18~19장)에 대한 성경 기록을 뒷받침하는 풍부한 증거들을 살펴보았다. 특히 산헤립이 라기스(Lachish)를 비롯한 유다의 여러 도시들을 정복했다는 풍부한 물리적 증거들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제 유다왕 히스기야가 수도 예루살렘과 왕국을 보존하기 위해서 취했던 조치들을 살펴보겠다.
히스기야의 예루살렘 요새화
하나님의 은혜로 예루살렘(Jerusalem)은 라기스와 같은 운명을 겪지 않았고, 따라서 수도 예루살렘에서 파괴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발견들은 성경 기록의 다른 측면들을 뒷받침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산헤립의 공격 이전에 히스기야는 수도에 몇 가지 전략적인 건축학적 변화를 가했다. 역대기에 기록된 이 사건들에 대한 관련 기록에 따르면, 히스기야는 성벽을 수리하고, 새 성벽을 건설하여, 성벽을 강화했다.
“히스기야가 힘을 내어 무너진 모든 성벽을 보수하되 망대까지 높이 쌓고 또 외성을 쌓고 다윗 성의 밀로를 견고하게 하고 무기와 방패를 많이 만들고” (역대하 32:5)
이 구절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역대기 기자가 히스기야 시대보다 훨씬 후에 기록했고, 열왕기하의 초기 기록에는 이러한 구체적인 건축 활동이 언급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1] 그러나 일부 학자들이 역대기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함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은 고고학적 발굴 결과와 잘 부합된다. 필립 킹과 로렌스 스테이거(Philip King and Lawrence Stager)는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었다 :
역대기 기자는 자주 신명기 역사가(Deuteronomistic Historian(s))와 선지서와 같은 다른 성경 자료들에 의존했기 때문에, 역대기(Chronicle)는 신뢰할 만한 역사적 자료로서 종종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나흐만 아비가드(Nahman Avigad)가 '넓은 성벽(Broad Wall)'을 발견하고, 그 건축 연대를 BC 8세기 후반으로 추정하면서, 어느 정도 신뢰를 얻었다.”[2]
‘넓은 성벽(Broad Wall)’(그림 2.1)은 느헤미야서(3:8; 12:38)에 두 번 언급되고 있다. '넓다'는 말은 성벽의 건축가(아마도 히스기야)가 적의 공성추(battering rams, 충차)를 견딜 수 있도록 매우 넓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아비가드(Avigad)가 발견한 부분은 길이가 40m이고, 두께는 무려 7.5m였다. 이 성벽은 일부 사람들이 솔로몬의 것으로 생각하는 예루살렘 성벽의 다른 이전 부분만큼 단정하게 지어지지는 않았는데, 아마도 히스기야가 앗수르 군대의 침공을 예상했기 때문에, 다소 서둘러 지어졌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흥미롭게도 고고학자들은 이 성벽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 여러 채의 새집들이 철거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3] 이 특이한 발견은 다가오는 위협 때문에 성벽이 세워졌다는 사실과도 일치하며, 이사야 22:10절에서 “또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하게도 하며”라고 언급한 것과도 일치한다.

그림 2.1 : 두께 7.5m의 ‘넓은 성벽(Broad Wall)’의 단면. <Ian Scott, Wikimedia Commons CC BY-SA 2.0>
북쪽으로 90m도 채 되지 않는 곳에서 아비가드는 현재 '이스라엘 탑(Israelite Tower)'(그림 2.2)이라고 불리고 있는 탑(tower, 망대)을 발굴했는데, 그는 이것이 성문의 일부였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 탑의 발굴된 부분은 높이 8m까지 보존되어 있었다. 이 탑은 넓은 성벽과 같은 종류의 다듬지 않은 돌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어떤 이들은 다른 요새 체계의 일부였으며, 넓은 성벽보다 약간 후에 건설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4] 이 탑은 히스기야나 그의 아들 므낫세(Manasseh)가 건설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히스기야에 대한 성경 기록을 전반적으로 뒷받침하는 많은 고고학적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다.

그림 2.2 : 아비가드가 발견한 이스라엘 탑(Israelite Tower). <Zev Radovan / Bible Land Pictures>
히스기야의 것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성벽 구간이 1999년에 발견되었는데, 이곳은 다윗 성(City of David)이라고 불리는 능선 동쪽에 위치해 있다. 이 성벽은 히스기야가 기존 내벽에 증축한 외벽이었다. 내벽은 외벽이 건설된 곳의 서쪽, 언덕에서 약 36m 더 올라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 외벽은 이스라엘 탑처럼 넓은 성벽과 유사한 석조 구조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성벽의 나머지 부분에서 약 2m 정도 돌출된 직사각형 모양의 돌출부가 있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 성벽 역시 히스기야의 탑(망대) 중 하나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5]
더 많은 준비 - 예루살렘의 수로 건설
히스기야가 한 일은 도시를 요새화하여 강화하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성경은 그가 예루살렘의 물 공급(water supplies)을 어떻게 재편했는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산헤립의 영향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음 구절들이 이를 증명한다.[6]
“히스기야가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치러 온 것을 보고 그의 방백들과 용사들과 더불어 의논하고 성 밖의 모든 물 근원을 막고자 하매 그들이 돕더라 이에 백성이 많이 모여 모든 물 근원과 땅으로 흘러가는 시내를 막고 이르되 어찌 앗수르 왕들이 와서 많은 물을 얻게 하리요 하고” (역대하 32:2-4).
“이 히스기야가 또 기혼의 윗샘물을 막아 그 아래로부터 다윗 성 서쪽으로 곧게 끌어들였으니...” (역대하 32:30)
“히스기야의 남은 사적과 그의 모든 업적과 저수지와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열왕기하 20:20)

그림 2.3: 히스기야 터널(Hezekiah’s Tunnel). <Ian Scott, Wikimedia Commons CC BY-SA 2.0>.
고고학도 이러한 성경 기록들을 뒷받침한다. 도시의 동쪽에 위치한 기혼 샘(Gihon Spring)은 예루살렘 물의 주요 공급원이었다. 히스기야는 이전에 여러 인공 터널과 수로들을 통해, 물이 분산되었던 여러 곳을 막고, 물을 도시의 서쪽으로 돌렸다.[7, 8] 오늘날 예루살렘에서는 바로 이 목적을 위해 다윗 성 아래에서 파낸 히스기야 터널(Hezekiah’s Tunnel)(그림 2.3)을 걸어서 통과할 수 있다. 터널은 단단한 바위를 통과하여 지하 533m를 구불구불하게 지나, 북동쪽의 기혼 샘과 언덕 남서쪽의 저수지를 연결하고 있다(그림 2.4). 놀랍게도 그 거리에 걸쳐 바닥의 경사는 단지 약 30cm만 낮아진다. 원래 저수지와 근처 성벽의 정확한 위치는 확실히 알려져있지 않지만, 일부 학자들은 연못이 두 성벽 사이에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히스기야는 산헤립으로부터 도시의 물 공급원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히 이 터널을 만들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빠르게 확장되고 있었던 도시의 서쪽으로 물을 다른 경로로 보내기 위해 만들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둘 다를 위해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림 2.4: 히스기야 시대의 예루살렘 지도 <Keaton Halley>
히스기야 터널 남쪽 끝 근처에서 터널의 구조를 설명하는 고대 비문(inscription)이 발견되었다. 고문서학적으로 히스기야 시대로 추정되는 이 실로암 비문(Siloam Inscription, 그림 2.5)에는 터널 굴착 작업이 양쪽 끝에서 시작되었고, 작업자들은 가운데에서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터널 작업자들이 도시 아래를 어떻게 뚫었는지를 고려하면 놀라운 업적이다. 그들이 어떻게 이러한 작업을 수행했는지, 그리고 왜 이런 방식으로 굴착했는지는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이다.
남쪽 출구에서 물은 실로암 못(Pool of Siloam)으로 흘러들었다. 수 세기에 걸쳐 이 못은 여러 차례 재건되었다. 예수님 시대의 실로암 못은 2004년에 발견되었지만, 고고학자들은 아직 그보다 앞서 건설된 히스기야가 건설한 실로암 못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스라엘 핀켈슈타인(Israel Finkelstein)은 이 못이 로마시대 못 바로 아래에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으며, 따라서 향후 발굴 작업을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날 가능성이 있다.[9]

그림 2.5 : 히스기야 터널의 건설 과정을 설명하는 실로암 비문(Siloam Inscription)의 복제품.
앗수르의 관리들
다음으로 고고학은 히스기야와 맞선 앗수르의 관리들에 대한 성경에 기록된 용어들이 타당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산헤립은 라기스에서 자신의 고위 관리와 군대장관을 예루살렘으로 파견했다. 그들은 히스기야에게 위협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다. 성경에 언급된 앗수르의 고위 관리 세 명은 "다르단, 랍사리스, 랍사게"였다.(열왕기하 18:17).
고고학은 히스기야와 맞섰던 앗수르 관리들을 지칭하는데 사용됐던 성경에 기록된 용어들이 타당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1800년대 초, 이러한 칭호는 성경 주석가들에게 모호하고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그 이후로 세 용어 모두 고대 앗수르 기록에서 발견되었다. 예를 들어 아시리아 에포님 명부(Assyrian Eponym List, 그림 2.6)에는 왕 다음가는 고위 군사 지휘관인 다르단(Tartan)이 언급되어 있다.[10] 또한 약간 낮은 계급인 랍사게(Rabshakeh)가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군주들의 우두머리'를 의미한다. 왕의 최측근 관리 중 한 명(아마도 환관장)인 랍사리스(Rab-saris)는 한 작은 계약 문서에 언급되어 있다.[11] 이러한 고위 관리들이 수행했던 정확한 임무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지만, 성경에 그들의 칭호가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역사적 기억에서 사라졌다가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성경의 세부 사항이 입증된 많은 사례들 중 하나가 되고 있다.

그림 2.6 : 다르단과 랍사게가 언급되어 있는 앗수르 에포님(칭호) 목록(Assyrian Eponym List). <British Museum 1882,0522.526, CC BY-NC-SA 4.0>
성경 기록에서 랍사게는 주요 대변인이었다. 그는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호소하면서, 히스기야는 물론이고, 심지어 하나님까지 비난하며 험담을 한다.
“랍사게가 드디어 일어서서 유다 말로 크게 소리 질러 불러 이르되 너희는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을 들으라 왕의 말씀이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그가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내지 못하리라 또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의뢰하라 함을 듣지 말라 그가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실지라 이 성읍이 앗수르 왕의 손에 함락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할지라도 너희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히스기야가 너희를 설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하여도 히스기야에게 듣지 말라 민족의 신들 중에 어느 한 신이 그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열왕기하 18:28~33)
그러나 주님은 예루살렘을 앗수르의 손에서 구원하셨다. 앗수르인들이 저지른 가장 큰 오산은 “그들이 예루살렘의 하나님을 비방하기를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세상 사람의 신들을 비방하듯 하였더라”(역대하 32:19)는 것이었다.
유다의 관리들
히스기야는 앗수르 고위 관리들과 직접 대화하기보다는 세 명의 중재자를 보내 협상을 벌였다.
“그들이 왕을 부르매 힐기야의 아들로서 왕궁의 책임자인 엘리야김(Eliakim)과 서기관 셉나(Shebnah)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Joah)가 그에게 나가니” (열왕기하 18:18 )
이 관리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물이 발견되었을까?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 첫째, 히스기야의 서기관 셉나(Shebnah)가 이사야 22장에서 징계를 받는 셉나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가서 그 국고를 맡고 왕궁 맡은 자 셉나를 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에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나 여호와가 너를 단단히 결박하고 장사 같이 세게 던지되” (이사야 22:15-17)
이사야서의 이 장은 히스기야가 예루살렘에서 재건 공사를 한 후(8~11절)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지만, 열왕기하 18장에서 앗수르의 관리들과 마주치기 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사야 22장이 언급하고 있는 당시에 셉나가 "국고를 맡고 왕궁 맡은 자 셉나"(15절)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 직책을 그에게서 빼앗아 엘리아김(Eliakim)에게 넘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이사야 22:19~21절). 이러한 직책의 이전은 랍사게와 왕이 만났을 때쯤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열왕기하 18:18절에서 엘리아김이 이제 "왕궁"의 책임자를 맡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 2.7 : 라기스에서 발견된 작은 병(Juglet). 이 병에는 많은 점토 인장 자국(bullae)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왕의 시종, 셉나(Shebna)"의 것이었다. <A.D. Riddle/BiblePlaces.com>
어쨌든 히스기야 시대의 셉나라는 고위 관리에 대한 언급이 있는 비문이 여러 개 발견되었다.[12] BC 8세기의 것으로 발견된 두 개의 봉인(bullae, 점토 인장 자국)은 "왕의 시종 셉나"의 것이었다. 첫 번째는 라기스에서 회수되었고(그림 2.7) 두 번째는 출처를 알 수 없었다. 또한 고고학자들은 기드론 계곡(Kidron Valley)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파여진 고대 무덤을 발견했는데, 입구 위의 상인방(lintel)에 비문이 있었다. 손상되었지만 텍스트는 거기에 묻힌 고위 관리의 이름의 끝부분을 기록하고 있었다(그림 2.8). 첫 번째 부분은 없었지만, 셉나(Shebna)라는 이름의 형태로 재구성될 수 있었으며, 구체적으로 그가 "집(왕궁)을 맡았다"고 말한다. 이사야 22:15 절에 따르면, 이는 셉나가 한때 맡았던 직위이다. 이 글은 대략 히스기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사야서에 언급된 무덤도 발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림 2.8 : 히스기야의 시종이었던 유다의 고위 관리, 아마도 셉나의 무덤에서 발견된 상인방 비문(lintel inscription). <Mustafaa,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셉나의 자리를 이어받은 힐기야(Hilkiah)의 아들 엘리아김(Eliakim)은 어떠했을까? 고고학자들은 엘리아김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찾지 못했지만, 히스기야의 신하 중 한 명이었던 그의 형제를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이 형제에 대한 증거는 그 출처가 현재 이스라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겉보기에는 진본인 봉인(bulla, 그림 2.9)에서 나왔다. 봉인에는 "히스기야의 신하, 힐기야의 아들 여호사라의 것(Belonging to Yehozarah, the son of Hilkiah, servant of Hezekiah)"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13] [2024년 1월 업데이트: 히스기야 시대의 두 인장(seals)이 라기스에서 발견되었는데, 인장에는 ‘여호사라(의 아들) 엘리아김(Eliakim (son of) Yehozarah)’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따라서 모든 증거들을 종합해 볼 때, 이 인장들은 성경 속 엘리아김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힐기야는 그의 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였을 것이다.]

그림 2.9 : 히스기야의 시종 여호사라(Yehozarah)의 봉인(bulla, 점토 인장 자국). <A.D. Riddle/BiblePlaces.com>
선지자 이사야
협상이 결렬된 후에, 히스기야는 세 명의 신하를 선지자 이사야에게 보내 기도를 요청했다(열왕기하 19:2~4). 성경은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앗수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여러 차례 안심시킨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사야는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가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가리켜 이르시기를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화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시라” (열왕기하 19:32-33)
2017년 고고학자 에일랏 마자르(Eilat Mazar, 1956–2021)는 선지자 이사야의 봉인(bulla)일 수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림 2.10).[14] 그녀의 팀은 2009년 예루살렘에서 히스기야의 봉인이 발견된 곳에서 불과 3m 떨어진 곳에서 그것을 발굴했다. 인장 자국에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이사야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으며, 그를 "선지자"라고 지칭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봉인의 가장자리가 마모되어 최종 히브리어 단어가 불확실하므로, 결론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사야와 히스기야는 개인적인 교류가 있었던 동시대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 봉인에 찍힌 인장이 이사야 선지자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 봉인은 확실히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 속하며, 글자들은 그것을 시사한다.

그림 2.10 : 이사야 선지자의 인장 자국으로 추정되는 봉인(bulla). <Biblical Archaeology Society>
이집트와 구스의 지원군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도움을 구하며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있을 때, 산헤립은 그에게 또 다른 위협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집트인들이 유다를 도울 수 없을 것이라는 그의 호안장담(열왕기하 18:21)은 다소 성급한 것이었다.
“앗수르 왕은 구스 왕 디르하가가 당신과 싸우고자 나왔다 함을 듣고...”(열왕기하 19:9).
구스(Cush)는 이집트 남쪽, 누비아(Nubia, 나일강 유역) 지역, 즉 오늘날 수단에 있던 민족이었다. 당시 구스족은 이집트를, 또는 적어도 일부를 장악하여 제25왕조의 파라오가 되었다. 결국 디르하가(Tirhakah, 티르하카)가 파라오가 되었다. 그의 스핑크스(그림 2.11)에서 볼 수 있듯이, 디르하가의 왕관에는 두 마리의 코브라가 있었는데, 이는 이집트와 구스라는 두 민족을 모두 다스렸던 그의 통치를 상징한다.

그림 2.11 : 이집트와 구스의 왕 디르하가(Tirhakah, 티르하카)의 스핑크스. <Jon Bodsworth, Wikimedia Commons>
산헤립은 그의 연대기에서 이 군사 작전(세 번째)에서 이집트와 구스의 연합군과 싸웠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는 히스기야와 동맹을 맺은, 블레셋 도시 에그론(Ekron)의 주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었다 :
…이집트의 왕과 궁수들, 전차들, 멜루하(Meluḫḫa, Cush, 구스) 땅의 말들과 연합하여 무수한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도우러왔다.
엘테케(Eltekeh, 엘드게) 성 평야에서 그들은 내 앞에 전열을 갖추며 무기를 갈았다. 나는 나의 주 아슈르(Aššur) 신의 도움으로 그들과 싸워 이겼다. 격전의 와중에 나는 이집트의 전차병들과 왕자들, 그리고 그 땅의 왕 멜루하의 전차병들을 사로잡았다.[15]
산헤립의 기록과 성경 기록 사이에 표면적으로 일치하는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들은 디르하가에 대한 성경의 언급을 비판하며, 그것이 여러 연대기적 문제를 야기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산헤립의 세 번째 원정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재구성은 그가 라기스를 공격한 후가 아니라, 유다를 침공하기 전에 엘테케에서 이집트와 구스 군대를 격파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또한 둘째, 일부 학자들은 디르하가가 산헤립 원정 당시 아직 왕이 아닌 장군에 불과했으며, 통치하던 파라오는 디르하가의 나이 많은 친척 샤바카(Shabaka)였다고 주장한다.[16] 셋째, 디르하가가 BC 701년에 불과 9살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군대를 지휘하기에는 너무 어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문제에 대해, 엘테케 전투가 라기스 전투보다 먼저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지만, 디르하가는 단순히 남은 병력을 모아 산헤립을 두 번째로 공격했을 가능성이 있다. 케네스 키친(Kenneth Kitchen)이 지적했듯이, 산헤립의 병력이 립나와 예루살렘으로 나뉘어지면서 새로운 취약점이 드러났다.[17]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몇 가지 가능한 해결책이 있다. 첫째, 성경은 디르하가가 묘사된 사건 당시 아직 왕이 아니었더라도, 그는 왕으로 불려질 수 있었다. 그가 나중에 왕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그가 왕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가능성은 제25왕조 시대에 흔히 있었던 것처럼, 이집트와 구스의 여러 지역을 동시에 통치하는 여러 왕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성경은 디르하가를 이집트의 왕 또는 파라오라고 부르지 않고, 오직 구스의 왕이라고만 부른다. 따라서 샤바카가 파라오로 통치하는 동안에도 그는 이미 구스의 왕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롭 앤드류 영(Robb Andrew Young)은 구스의 동시대 문서에서 디르하가가 그의 전임자보다 강조된다고 말한다. 샤바카는 "누비아 기록에는 거의 없지만, 에티오피아 왕 목록에는 중요한 문제의 해에 디르하가가 통치자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18]
세 번째 문제에 대해서, 디르하가가 당시 어린아이였다는 주장은 단순한 오류이다. 키친과 다른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그러한 주장은 카와 석비 4호(Kawa stela IV)를 잘못 해석한 데서 비롯되었다.[19] 당시 디르하가의 실제 나이는 20세에 가까웠으며, 이는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나이였다.[20]
해석상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에 이집트와 구스가 참전했다는 성경의 기록은 다른 고대 자료들의 증언과 일치한다.
결론
이용 가능한 증거들에는 항상 모호함이 존재하고, 학자들은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계속해서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히스기야의 통치와 앗수르와의 전쟁에 대한 성경적 배경을 뒷받침하는 많은 고고학적 퍼즐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집트와 구스가 결국 히스기야를 구하지 못했다면, 예루살렘은 어떻게 함락을 면할 수 있었을까? 고고학은 성경 기록의 나머지 부분도 마찬가지로 뒷받침할까? 이러한 질문은 3부에서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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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8세기 예루살렘의 성장
넓은 성벽(본문 참조)이 발견되기 전, 학자들은 제1성전 시대(First Temple period)의 예루살렘이 다윗 성과 성전산(Temple Mount, 모리아 산, Mt Moriah)만 있는 비교적 작은 지역이었는지, 아니면 서쪽 언덕(시온 산, Mt Zion)까지 뻗어 있는 더 큰 지역이었는지에 대해 논쟁을 벌여왔다. 넓은 성벽의 발견은 히스기야 시대 이후로 예루살렘 서쪽 지역에도 인구가 많았고, 요새가 튼튼했음을 보여줌으로써, 이러한 논쟁을 종식시켰다.
이것은 다른 증거들과 함께 많은 학자들에게 BC 8세기에 예루살렘의 인구가 극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을 시사했다. 이스라엘 핀켈슈타인(Israel Finkelstein)은 이것이 수십 년 만에 빠르게 일어났다는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 중 한 명이며, 그러한 성장은 경제적 번영과 일반적인 이주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21] 핀켈슈타인은 급속한 성장이 주로 BC 722년에 산헤립의 삼촌인 샬마네세르(살만에셀) 5세(Shalmaneser V)와 아버지인 사르곤 2세(Sargon II)가 북이스라엘을 정복한 후 북이스라엘에서 남유다로 이주한 수천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또한 핀켈슈타인은 산헤립의 침략이 또 하나의 요인이었으며, 다른 지역에서 쫓겨난 난민들이 예루살렘으로 두 번째 물결로 피난해왔다고 말한다.[22]
다른 학자들은 특히 나다브 나아만(Nadav Na’aman)은 BC 8세기에 예루살렘의 성장은 점진적이고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이었으며, 북이스라엘에서 난민이 홍수처럼 밀려온 것은 신화라고 믿고 있다.[23] 나아만은 북이스라엘 이민자들이 영구적으로 정착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인구가 갑자기 증가한 것처럼 나타나는 주된 이유는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산헤립을 피해온 유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유입됨으로 일시적으로 팽창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위협이 사라진 후 수십 년 동안 예루살렘은 어느 정도 축소되었다는 것이다. 나아만에 따르면, 이러한 일시적인 팽창은 예루살렘 바로 외곽의 농촌 인구가 보호를 위해 도시로 이동했고, 산헤립이 도시를 파괴하거나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긴 후, 유다 전역의 난민들이 피난처를 찾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학자들이 예루살렘 인구 증가의 원인과 속도에 대해 계속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두 위기, 즉 사르곤 2세의 북이스라엘 합병과 산헤립의 남유다 원정의 영향을 분명히 받았다. 또한, 이 논쟁의 양측 모두 산헤립의 침략이 일시적이든 영구적이든, 예루살렘 인구 폭발에 한몫을 했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따라서 BC 8세기에 예루살렘이 성장한 것은 히스기야 통치기간 동안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성경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는 또 하나의 퍼즐 조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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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CMI, 9 January 2020
References and notes
1. While not as specific, a possible reference to these same repairs does occur in Isaiah 22:9–10.
2. King, P.J., and Stager, L.E., Life in Biblical Israel, p. 219, Westminster John Knox Press, Louisville, KY, 2001.
3. Rosovsky, N., A Thousand Years of History in Jerusalem’s Jewish Quarter, Biblical Archaeology Review 18(3), May/June 1992.
4. Na’aman, N., Dismissing the Myth of a Flood of Israelite Refugees in the Late Eighth Century BCE, ZAW 126(1):12, 2014.
5. Shanks, H., 2,700-Year-Old Tower Found? Biblical Archaeology Review 26(5):39–41, September/October 2000.
6. See also Isaiah 22:9–11.
7. Shanks, H., Everything you ever knew about Jerusalem is wrong (well, almost), Biblical Archaeology Review 25(6):20–29, November/December 1999.
8. Although the 8th century date of the tunnel has recently been disputed by archaeologists Reich and Shukron, many scholars still reasonably attribute the tunnel to Hezekiah. See Shanks, H., Will King Hezekiah Be Dislodged from His Tunnel? Biblical Archaeology Review 39(5):52–61, September/October 2013.
9. Shanks, H., The Pool of Siloam Has Been Found, but Where Is the Pool of Siloam? Biblical Archaeology Review 43(1):50–55, January/February 2017.
10. Cheyne, T.K., and Black, J.S. (eds.), Encyclopaedia Biblica, p. 4903, Norwood Press, Norwood, MA, 1903.
11. Mitchell, T.C., The Bible in the British Museum, p. 77, Paulist Press, Mahwah, NJ, 2004.
12. Deutsch, R., Tracking Down Shebnayahu, Servant of the King, Biblical Archaeology Review 35(3):45–49, May/June 2009.
13. ‘Signature’ of King Hezekiah’s Servant Recovered, Biblical Archaeology Review 1(4):19, 32, December 1975.
14. Mazar, E., Is This the Prophet Isaiah’s Signature? Biblical Archaeology Review 44(2):64–73, 92, March 2018. See also Robinson, P., The prophet Isaiah’s signature? 26 April 2018, creation.com/isaiah-signature.
15. Royal Inscriptions of the Neo-Assyrian Period (RINAP) 3, Sennacherib Chicago/Taylor Prism, 2:78–3:6.
16. One example is Redford, D.B., Egypt, Canaan, and Israel in Ancient Times, pp. 258, 353, Princeton University Press, NJ, 1992.
17. Kitchen, K.A., On the Reliability of the Old Testament, p. 41, Wm. B. Eerdmans Publishing Co., Grand Rapids, MI, 2003. Alternatively, perhaps Taharqa was not truly advancing at all, and Sennacherib had received misinformation. The biblical text may be understood to mean that it was nothing more than a false “rumor” (2 Kings 19:7), which distracted Sennacherib from engaging Hezekiah.
18. Young, R.A., Hezekiah in History and Tradition, p. 75, Brill, Leiden, The Netherlands, 2012.
19. Kitchen, K.A., Ancient Orient and the Old Testament, pp. 83–84, InterVarsity Press, Downers Grove, IL, 1966.
20. Hoffmeier, J.K., Egypt’s role in the events of 701 BC in Jerusalem, in Vaughn, A.G., and Killebrew, A.E. (ed.), Jerusalem in Bible and Archaeology: The First Temple Period, pp. 230–232,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Boston, MA, 2003.
21. Finkelstein, I., Migration of Israelites into Judah after 720 BCE: An answer and an update, ZAW 127(2):197–204, 2015.
22. Finkelstein, I., The two kingdoms: Israel and Judah, in Finkelstein, I., and Mazar, A., The Quest for the Historical Israel, p. 154, Brill, Leiden, Netherlands, 2007.
23. Na’aman, N., When and How Did Jerusalem Become a Great City? The Rise of Jerusalem as Judah’s Premier City in the Eighth–Seventh Centuries B.C.E., BASOR 341:40,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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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CMI, 2020. 1. 9.
주소 : https://creation.com/hezekiah-archaeology-2
번역 : 미디어위원회
히스기야 왕을 하나님이 구원하셨을 때 - 2부
: 고고학은 히스기야의 예루살렘 방어 준비에 대한 성경 기록을 확증해주고 있다.
(When God rescued King Hezekiah, part 2
Archaeology confirms the biblical account—Hezekiah’s preparations in Jerusalem)
by Keaton Halley
이 시리즈 글의 1부에서는 고고학이 BC 701년 앗수르(아시리아)의 왕 산헤립(Sennacherib, 센나케립)이 유다 왕국을 침략한 사건(열왕기하 18~19장)에 대한 성경 기록을 뒷받침하는 풍부한 증거들을 살펴보았다. 특히 산헤립이 라기스(Lachish)를 비롯한 유다의 여러 도시들을 정복했다는 풍부한 물리적 증거들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제 유다왕 히스기야가 수도 예루살렘과 왕국을 보존하기 위해서 취했던 조치들을 살펴보겠다.
히스기야의 예루살렘 요새화
하나님의 은혜로 예루살렘(Jerusalem)은 라기스와 같은 운명을 겪지 않았고, 따라서 수도 예루살렘에서 파괴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발견들은 성경 기록의 다른 측면들을 뒷받침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산헤립의 공격 이전에 히스기야는 수도에 몇 가지 전략적인 건축학적 변화를 가했다. 역대기에 기록된 이 사건들에 대한 관련 기록에 따르면, 히스기야는 성벽을 수리하고, 새 성벽을 건설하여, 성벽을 강화했다.
“히스기야가 힘을 내어 무너진 모든 성벽을 보수하되 망대까지 높이 쌓고 또 외성을 쌓고 다윗 성의 밀로를 견고하게 하고 무기와 방패를 많이 만들고” (역대하 32:5)
이 구절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역대기 기자가 히스기야 시대보다 훨씬 후에 기록했고, 열왕기하의 초기 기록에는 이러한 구체적인 건축 활동이 언급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1] 그러나 일부 학자들이 역대기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함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은 고고학적 발굴 결과와 잘 부합된다. 필립 킹과 로렌스 스테이거(Philip King and Lawrence Stager)는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었다 :
역대기 기자는 자주 신명기 역사가(Deuteronomistic Historian(s))와 선지서와 같은 다른 성경 자료들에 의존했기 때문에, 역대기(Chronicle)는 신뢰할 만한 역사적 자료로서 종종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나흐만 아비가드(Nahman Avigad)가 '넓은 성벽(Broad Wall)'을 발견하고, 그 건축 연대를 BC 8세기 후반으로 추정하면서, 어느 정도 신뢰를 얻었다.”[2]
‘넓은 성벽(Broad Wall)’(그림 2.1)은 느헤미야서(3:8; 12:38)에 두 번 언급되고 있다. '넓다'는 말은 성벽의 건축가(아마도 히스기야)가 적의 공성추(battering rams, 충차)를 견딜 수 있도록 매우 넓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아비가드(Avigad)가 발견한 부분은 길이가 40m이고, 두께는 무려 7.5m였다. 이 성벽은 일부 사람들이 솔로몬의 것으로 생각하는 예루살렘 성벽의 다른 이전 부분만큼 단정하게 지어지지는 않았는데, 아마도 히스기야가 앗수르 군대의 침공을 예상했기 때문에, 다소 서둘러 지어졌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흥미롭게도 고고학자들은 이 성벽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 여러 채의 새집들이 철거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3] 이 특이한 발견은 다가오는 위협 때문에 성벽이 세워졌다는 사실과도 일치하며, 이사야 22:10절에서 “또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하게도 하며”라고 언급한 것과도 일치한다.
그림 2.1 : 두께 7.5m의 ‘넓은 성벽(Broad Wall)’의 단면. <Ian Scott, Wikimedia Commons CC BY-SA 2.0>
북쪽으로 90m도 채 되지 않는 곳에서 아비가드는 현재 '이스라엘 탑(Israelite Tower)'(그림 2.2)이라고 불리고 있는 탑(tower, 망대)을 발굴했는데, 그는 이것이 성문의 일부였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 탑의 발굴된 부분은 높이 8m까지 보존되어 있었다. 이 탑은 넓은 성벽과 같은 종류의 다듬지 않은 돌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어떤 이들은 다른 요새 체계의 일부였으며, 넓은 성벽보다 약간 후에 건설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4] 이 탑은 히스기야나 그의 아들 므낫세(Manasseh)가 건설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히스기야에 대한 성경 기록을 전반적으로 뒷받침하는 많은 고고학적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다.
그림 2.2 : 아비가드가 발견한 이스라엘 탑(Israelite Tower). <Zev Radovan / Bible Land Pictures>
히스기야의 것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성벽 구간이 1999년에 발견되었는데, 이곳은 다윗 성(City of David)이라고 불리는 능선 동쪽에 위치해 있다. 이 성벽은 히스기야가 기존 내벽에 증축한 외벽이었다. 내벽은 외벽이 건설된 곳의 서쪽, 언덕에서 약 36m 더 올라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 외벽은 이스라엘 탑처럼 넓은 성벽과 유사한 석조 구조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성벽의 나머지 부분에서 약 2m 정도 돌출된 직사각형 모양의 돌출부가 있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 성벽 역시 히스기야의 탑(망대) 중 하나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5]
더 많은 준비 - 예루살렘의 수로 건설
히스기야가 한 일은 도시를 요새화하여 강화하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성경은 그가 예루살렘의 물 공급(water supplies)을 어떻게 재편했는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산헤립의 영향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음 구절들이 이를 증명한다.[6]
“히스기야가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치러 온 것을 보고 그의 방백들과 용사들과 더불어 의논하고 성 밖의 모든 물 근원을 막고자 하매 그들이 돕더라 이에 백성이 많이 모여 모든 물 근원과 땅으로 흘러가는 시내를 막고 이르되 어찌 앗수르 왕들이 와서 많은 물을 얻게 하리요 하고” (역대하 32:2-4).
“이 히스기야가 또 기혼의 윗샘물을 막아 그 아래로부터 다윗 성 서쪽으로 곧게 끌어들였으니...” (역대하 32:30)
“히스기야의 남은 사적과 그의 모든 업적과 저수지와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열왕기하 20:20)
그림 2.3: 히스기야 터널(Hezekiah’s Tunnel). <Ian Scott, Wikimedia Commons CC BY-SA 2.0>.
고고학도 이러한 성경 기록들을 뒷받침한다. 도시의 동쪽에 위치한 기혼 샘(Gihon Spring)은 예루살렘 물의 주요 공급원이었다. 히스기야는 이전에 여러 인공 터널과 수로들을 통해, 물이 분산되었던 여러 곳을 막고, 물을 도시의 서쪽으로 돌렸다.[7, 8] 오늘날 예루살렘에서는 바로 이 목적을 위해 다윗 성 아래에서 파낸 히스기야 터널(Hezekiah’s Tunnel)(그림 2.3)을 걸어서 통과할 수 있다. 터널은 단단한 바위를 통과하여 지하 533m를 구불구불하게 지나, 북동쪽의 기혼 샘과 언덕 남서쪽의 저수지를 연결하고 있다(그림 2.4). 놀랍게도 그 거리에 걸쳐 바닥의 경사는 단지 약 30cm만 낮아진다. 원래 저수지와 근처 성벽의 정확한 위치는 확실히 알려져있지 않지만, 일부 학자들은 연못이 두 성벽 사이에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히스기야는 산헤립으로부터 도시의 물 공급원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히 이 터널을 만들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빠르게 확장되고 있었던 도시의 서쪽으로 물을 다른 경로로 보내기 위해 만들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둘 다를 위해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림 2.4: 히스기야 시대의 예루살렘 지도 <Keaton Halley>
히스기야 터널 남쪽 끝 근처에서 터널의 구조를 설명하는 고대 비문(inscription)이 발견되었다. 고문서학적으로 히스기야 시대로 추정되는 이 실로암 비문(Siloam Inscription, 그림 2.5)에는 터널 굴착 작업이 양쪽 끝에서 시작되었고, 작업자들은 가운데에서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터널 작업자들이 도시 아래를 어떻게 뚫었는지를 고려하면 놀라운 업적이다. 그들이 어떻게 이러한 작업을 수행했는지, 그리고 왜 이런 방식으로 굴착했는지는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이다.
남쪽 출구에서 물은 실로암 못(Pool of Siloam)으로 흘러들었다. 수 세기에 걸쳐 이 못은 여러 차례 재건되었다. 예수님 시대의 실로암 못은 2004년에 발견되었지만, 고고학자들은 아직 그보다 앞서 건설된 히스기야가 건설한 실로암 못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스라엘 핀켈슈타인(Israel Finkelstein)은 이 못이 로마시대 못 바로 아래에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으며, 따라서 향후 발굴 작업을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날 가능성이 있다.[9]
그림 2.5 : 히스기야 터널의 건설 과정을 설명하는 실로암 비문(Siloam Inscription)의 복제품.
앗수르의 관리들
다음으로 고고학은 히스기야와 맞선 앗수르의 관리들에 대한 성경에 기록된 용어들이 타당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산헤립은 라기스에서 자신의 고위 관리와 군대장관을 예루살렘으로 파견했다. 그들은 히스기야에게 위협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다. 성경에 언급된 앗수르의 고위 관리 세 명은 "다르단, 랍사리스, 랍사게"였다.(열왕기하 18:17).
고고학은 히스기야와 맞섰던 앗수르 관리들을 지칭하는데 사용됐던 성경에 기록된 용어들이 타당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1800년대 초, 이러한 칭호는 성경 주석가들에게 모호하고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그 이후로 세 용어 모두 고대 앗수르 기록에서 발견되었다. 예를 들어 아시리아 에포님 명부(Assyrian Eponym List, 그림 2.6)에는 왕 다음가는 고위 군사 지휘관인 다르단(Tartan)이 언급되어 있다.[10] 또한 약간 낮은 계급인 랍사게(Rabshakeh)가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군주들의 우두머리'를 의미한다. 왕의 최측근 관리 중 한 명(아마도 환관장)인 랍사리스(Rab-saris)는 한 작은 계약 문서에 언급되어 있다.[11] 이러한 고위 관리들이 수행했던 정확한 임무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지만, 성경에 그들의 칭호가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역사적 기억에서 사라졌다가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성경의 세부 사항이 입증된 많은 사례들 중 하나가 되고 있다.
그림 2.6 : 다르단과 랍사게가 언급되어 있는 앗수르 에포님(칭호) 목록(Assyrian Eponym List). <British Museum 1882,0522.526, CC BY-NC-SA 4.0>
성경 기록에서 랍사게는 주요 대변인이었다. 그는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호소하면서, 히스기야는 물론이고, 심지어 하나님까지 비난하며 험담을 한다.
“랍사게가 드디어 일어서서 유다 말로 크게 소리 질러 불러 이르되 너희는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을 들으라 왕의 말씀이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그가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내지 못하리라 또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의뢰하라 함을 듣지 말라 그가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실지라 이 성읍이 앗수르 왕의 손에 함락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할지라도 너희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히스기야가 너희를 설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하여도 히스기야에게 듣지 말라 민족의 신들 중에 어느 한 신이 그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열왕기하 18:28~33)
그러나 주님은 예루살렘을 앗수르의 손에서 구원하셨다. 앗수르인들이 저지른 가장 큰 오산은 “그들이 예루살렘의 하나님을 비방하기를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세상 사람의 신들을 비방하듯 하였더라”(역대하 32:19)는 것이었다.
유다의 관리들
히스기야는 앗수르 고위 관리들과 직접 대화하기보다는 세 명의 중재자를 보내 협상을 벌였다.
“그들이 왕을 부르매 힐기야의 아들로서 왕궁의 책임자인 엘리야김(Eliakim)과 서기관 셉나(Shebnah)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Joah)가 그에게 나가니” (열왕기하 18:18 )
이 관리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물이 발견되었을까?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 첫째, 히스기야의 서기관 셉나(Shebnah)가 이사야 22장에서 징계를 받는 셉나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가서 그 국고를 맡고 왕궁 맡은 자 셉나를 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에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나 여호와가 너를 단단히 결박하고 장사 같이 세게 던지되” (이사야 22:15-17)
이사야서의 이 장은 히스기야가 예루살렘에서 재건 공사를 한 후(8~11절)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지만, 열왕기하 18장에서 앗수르의 관리들과 마주치기 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사야 22장이 언급하고 있는 당시에 셉나가 "국고를 맡고 왕궁 맡은 자 셉나"(15절)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 직책을 그에게서 빼앗아 엘리아김(Eliakim)에게 넘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이사야 22:19~21절). 이러한 직책의 이전은 랍사게와 왕이 만났을 때쯤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열왕기하 18:18절에서 엘리아김이 이제 "왕궁"의 책임자를 맡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 2.7 : 라기스에서 발견된 작은 병(Juglet). 이 병에는 많은 점토 인장 자국(bullae)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왕의 시종, 셉나(Shebna)"의 것이었다. <A.D. Riddle/BiblePlaces.com>
어쨌든 히스기야 시대의 셉나라는 고위 관리에 대한 언급이 있는 비문이 여러 개 발견되었다.[12] BC 8세기의 것으로 발견된 두 개의 봉인(bullae, 점토 인장 자국)은 "왕의 시종 셉나"의 것이었다. 첫 번째는 라기스에서 회수되었고(그림 2.7) 두 번째는 출처를 알 수 없었다. 또한 고고학자들은 기드론 계곡(Kidron Valley)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파여진 고대 무덤을 발견했는데, 입구 위의 상인방(lintel)에 비문이 있었다. 손상되었지만 텍스트는 거기에 묻힌 고위 관리의 이름의 끝부분을 기록하고 있었다(그림 2.8). 첫 번째 부분은 없었지만, 셉나(Shebna)라는 이름의 형태로 재구성될 수 있었으며, 구체적으로 그가 "집(왕궁)을 맡았다"고 말한다. 이사야 22:15 절에 따르면, 이는 셉나가 한때 맡았던 직위이다. 이 글은 대략 히스기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사야서에 언급된 무덤도 발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림 2.8 : 히스기야의 시종이었던 유다의 고위 관리, 아마도 셉나의 무덤에서 발견된 상인방 비문(lintel inscription). <Mustafaa,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셉나의 자리를 이어받은 힐기야(Hilkiah)의 아들 엘리아김(Eliakim)은 어떠했을까? 고고학자들은 엘리아김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찾지 못했지만, 히스기야의 신하 중 한 명이었던 그의 형제를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이 형제에 대한 증거는 그 출처가 현재 이스라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겉보기에는 진본인 봉인(bulla, 그림 2.9)에서 나왔다. 봉인에는 "히스기야의 신하, 힐기야의 아들 여호사라의 것(Belonging to Yehozarah, the son of Hilkiah, servant of Hezekiah)"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13] [2024년 1월 업데이트: 히스기야 시대의 두 인장(seals)이 라기스에서 발견되었는데, 인장에는 ‘여호사라(의 아들) 엘리아김(Eliakim (son of) Yehozarah)’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따라서 모든 증거들을 종합해 볼 때, 이 인장들은 성경 속 엘리아김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힐기야는 그의 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였을 것이다.]
그림 2.9 : 히스기야의 시종 여호사라(Yehozarah)의 봉인(bulla, 점토 인장 자국). <A.D. Riddle/BiblePlaces.com>
선지자 이사야
협상이 결렬된 후에, 히스기야는 세 명의 신하를 선지자 이사야에게 보내 기도를 요청했다(열왕기하 19:2~4). 성경은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앗수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여러 차례 안심시킨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사야는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가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가리켜 이르시기를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화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시라” (열왕기하 19:32-33)
2017년 고고학자 에일랏 마자르(Eilat Mazar, 1956–2021)는 선지자 이사야의 봉인(bulla)일 수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림 2.10).[14] 그녀의 팀은 2009년 예루살렘에서 히스기야의 봉인이 발견된 곳에서 불과 3m 떨어진 곳에서 그것을 발굴했다. 인장 자국에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이사야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으며, 그를 "선지자"라고 지칭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봉인의 가장자리가 마모되어 최종 히브리어 단어가 불확실하므로, 결론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사야와 히스기야는 개인적인 교류가 있었던 동시대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 봉인에 찍힌 인장이 이사야 선지자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 봉인은 확실히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 속하며, 글자들은 그것을 시사한다.
그림 2.10 : 이사야 선지자의 인장 자국으로 추정되는 봉인(bulla). <Biblical Archaeology Society>
이집트와 구스의 지원군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도움을 구하며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있을 때, 산헤립은 그에게 또 다른 위협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집트인들이 유다를 도울 수 없을 것이라는 그의 호안장담(열왕기하 18:21)은 다소 성급한 것이었다.
“앗수르 왕은 구스 왕 디르하가가 당신과 싸우고자 나왔다 함을 듣고...”(열왕기하 19:9).
구스(Cush)는 이집트 남쪽, 누비아(Nubia, 나일강 유역) 지역, 즉 오늘날 수단에 있던 민족이었다. 당시 구스족은 이집트를, 또는 적어도 일부를 장악하여 제25왕조의 파라오가 되었다. 결국 디르하가(Tirhakah, 티르하카)가 파라오가 되었다. 그의 스핑크스(그림 2.11)에서 볼 수 있듯이, 디르하가의 왕관에는 두 마리의 코브라가 있었는데, 이는 이집트와 구스라는 두 민족을 모두 다스렸던 그의 통치를 상징한다.
그림 2.11 : 이집트와 구스의 왕 디르하가(Tirhakah, 티르하카)의 스핑크스. <Jon Bodsworth, Wikimedia Commons>
산헤립은 그의 연대기에서 이 군사 작전(세 번째)에서 이집트와 구스의 연합군과 싸웠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는 히스기야와 동맹을 맺은, 블레셋 도시 에그론(Ekron)의 주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었다 :
…이집트의 왕과 궁수들, 전차들, 멜루하(Meluḫḫa, Cush, 구스) 땅의 말들과 연합하여 무수한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도우러왔다.
엘테케(Eltekeh, 엘드게) 성 평야에서 그들은 내 앞에 전열을 갖추며 무기를 갈았다. 나는 나의 주 아슈르(Aššur) 신의 도움으로 그들과 싸워 이겼다. 격전의 와중에 나는 이집트의 전차병들과 왕자들, 그리고 그 땅의 왕 멜루하의 전차병들을 사로잡았다.[15]
산헤립의 기록과 성경 기록 사이에 표면적으로 일치하는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들은 디르하가에 대한 성경의 언급을 비판하며, 그것이 여러 연대기적 문제를 야기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산헤립의 세 번째 원정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재구성은 그가 라기스를 공격한 후가 아니라, 유다를 침공하기 전에 엘테케에서 이집트와 구스 군대를 격파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또한 둘째, 일부 학자들은 디르하가가 산헤립 원정 당시 아직 왕이 아닌 장군에 불과했으며, 통치하던 파라오는 디르하가의 나이 많은 친척 샤바카(Shabaka)였다고 주장한다.[16] 셋째, 디르하가가 BC 701년에 불과 9살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군대를 지휘하기에는 너무 어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문제에 대해, 엘테케 전투가 라기스 전투보다 먼저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지만, 디르하가는 단순히 남은 병력을 모아 산헤립을 두 번째로 공격했을 가능성이 있다. 케네스 키친(Kenneth Kitchen)이 지적했듯이, 산헤립의 병력이 립나와 예루살렘으로 나뉘어지면서 새로운 취약점이 드러났다.[17]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몇 가지 가능한 해결책이 있다. 첫째, 성경은 디르하가가 묘사된 사건 당시 아직 왕이 아니었더라도, 그는 왕으로 불려질 수 있었다. 그가 나중에 왕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그가 왕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가능성은 제25왕조 시대에 흔히 있었던 것처럼, 이집트와 구스의 여러 지역을 동시에 통치하는 여러 왕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성경은 디르하가를 이집트의 왕 또는 파라오라고 부르지 않고, 오직 구스의 왕이라고만 부른다. 따라서 샤바카가 파라오로 통치하는 동안에도 그는 이미 구스의 왕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롭 앤드류 영(Robb Andrew Young)은 구스의 동시대 문서에서 디르하가가 그의 전임자보다 강조된다고 말한다. 샤바카는 "누비아 기록에는 거의 없지만, 에티오피아 왕 목록에는 중요한 문제의 해에 디르하가가 통치자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18]
세 번째 문제에 대해서, 디르하가가 당시 어린아이였다는 주장은 단순한 오류이다. 키친과 다른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그러한 주장은 카와 석비 4호(Kawa stela IV)를 잘못 해석한 데서 비롯되었다.[19] 당시 디르하가의 실제 나이는 20세에 가까웠으며, 이는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나이였다.[20]
해석상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에 이집트와 구스가 참전했다는 성경의 기록은 다른 고대 자료들의 증언과 일치한다.
결론
이용 가능한 증거들에는 항상 모호함이 존재하고, 학자들은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계속해서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히스기야의 통치와 앗수르와의 전쟁에 대한 성경적 배경을 뒷받침하는 많은 고고학적 퍼즐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집트와 구스가 결국 히스기야를 구하지 못했다면, 예루살렘은 어떻게 함락을 면할 수 있었을까? 고고학은 성경 기록의 나머지 부분도 마찬가지로 뒷받침할까? 이러한 질문은 3부에서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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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8세기 예루살렘의 성장
넓은 성벽(본문 참조)이 발견되기 전, 학자들은 제1성전 시대(First Temple period)의 예루살렘이 다윗 성과 성전산(Temple Mount, 모리아 산, Mt Moriah)만 있는 비교적 작은 지역이었는지, 아니면 서쪽 언덕(시온 산, Mt Zion)까지 뻗어 있는 더 큰 지역이었는지에 대해 논쟁을 벌여왔다. 넓은 성벽의 발견은 히스기야 시대 이후로 예루살렘 서쪽 지역에도 인구가 많았고, 요새가 튼튼했음을 보여줌으로써, 이러한 논쟁을 종식시켰다.
이것은 다른 증거들과 함께 많은 학자들에게 BC 8세기에 예루살렘의 인구가 극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을 시사했다. 이스라엘 핀켈슈타인(Israel Finkelstein)은 이것이 수십 년 만에 빠르게 일어났다는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 중 한 명이며, 그러한 성장은 경제적 번영과 일반적인 이주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21] 핀켈슈타인은 급속한 성장이 주로 BC 722년에 산헤립의 삼촌인 샬마네세르(살만에셀) 5세(Shalmaneser V)와 아버지인 사르곤 2세(Sargon II)가 북이스라엘을 정복한 후 북이스라엘에서 남유다로 이주한 수천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또한 핀켈슈타인은 산헤립의 침략이 또 하나의 요인이었으며, 다른 지역에서 쫓겨난 난민들이 예루살렘으로 두 번째 물결로 피난해왔다고 말한다.[22]
다른 학자들은 특히 나다브 나아만(Nadav Na’aman)은 BC 8세기에 예루살렘의 성장은 점진적이고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이었으며, 북이스라엘에서 난민이 홍수처럼 밀려온 것은 신화라고 믿고 있다.[23] 나아만은 북이스라엘 이민자들이 영구적으로 정착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인구가 갑자기 증가한 것처럼 나타나는 주된 이유는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산헤립을 피해온 유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유입됨으로 일시적으로 팽창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위협이 사라진 후 수십 년 동안 예루살렘은 어느 정도 축소되었다는 것이다. 나아만에 따르면, 이러한 일시적인 팽창은 예루살렘 바로 외곽의 농촌 인구가 보호를 위해 도시로 이동했고, 산헤립이 도시를 파괴하거나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긴 후, 유다 전역의 난민들이 피난처를 찾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학자들이 예루살렘 인구 증가의 원인과 속도에 대해 계속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두 위기, 즉 사르곤 2세의 북이스라엘 합병과 산헤립의 남유다 원정의 영향을 분명히 받았다. 또한, 이 논쟁의 양측 모두 산헤립의 침략이 일시적이든 영구적이든, 예루살렘 인구 폭발에 한몫을 했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따라서 BC 8세기에 예루살렘이 성장한 것은 히스기야 통치기간 동안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성경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는 또 하나의 퍼즐 조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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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CMI, 9 January 2020
References and notes
1. While not as specific, a possible reference to these same repairs does occur in Isaiah 22:9–10.
2. King, P.J., and Stager, L.E., Life in Biblical Israel, p. 219, Westminster John Knox Press, Louisville, KY, 2001.
3. Rosovsky, N., A Thousand Years of History in Jerusalem’s Jewish Quarter, Biblical Archaeology Review 18(3), May/June 1992.
4. Na’aman, N., Dismissing the Myth of a Flood of Israelite Refugees in the Late Eighth Century BCE, ZAW 126(1):12, 2014.
5. Shanks, H., 2,700-Year-Old Tower Found? Biblical Archaeology Review 26(5):39–41, September/October 2000.
6. See also Isaiah 22:9–11.
7. Shanks, H., Everything you ever knew about Jerusalem is wrong (well, almost), Biblical Archaeology Review 25(6):20–29, November/December 1999.
8. Although the 8th century date of the tunnel has recently been disputed by archaeologists Reich and Shukron, many scholars still reasonably attribute the tunnel to Hezekiah. See Shanks, H., Will King Hezekiah Be Dislodged from His Tunnel? Biblical Archaeology Review 39(5):52–61, September/October 2013.
9. Shanks, H., The Pool of Siloam Has Been Found, but Where Is the Pool of Siloam? Biblical Archaeology Review 43(1):50–55, January/February 2017.
10. Cheyne, T.K., and Black, J.S. (eds.), Encyclopaedia Biblica, p. 4903, Norwood Press, Norwood, MA, 1903.
11. Mitchell, T.C., The Bible in the British Museum, p. 77, Paulist Press, Mahwah, NJ, 2004.
12. Deutsch, R., Tracking Down Shebnayahu, Servant of the King, Biblical Archaeology Review 35(3):45–49, May/June 2009.
13. ‘Signature’ of King Hezekiah’s Servant Recovered, Biblical Archaeology Review 1(4):19, 32, December 1975.
14. Mazar, E., Is This the Prophet Isaiah’s Signature? Biblical Archaeology Review 44(2):64–73, 92, March 2018. See also Robinson, P., The prophet Isaiah’s signature? 26 April 2018, creation.com/isaiah-signature.
15. Royal Inscriptions of the Neo-Assyrian Period (RINAP) 3, Sennacherib Chicago/Taylor Prism, 2:78–3:6.
16. One example is Redford, D.B., Egypt, Canaan, and Israel in Ancient Times, pp. 258, 353, Princeton University Press, NJ, 1992.
17. Kitchen, K.A., On the Reliability of the Old Testament, p. 41, Wm. B. Eerdmans Publishing Co., Grand Rapids, MI, 2003. Alternatively, perhaps Taharqa was not truly advancing at all, and Sennacherib had received misinformation. The biblical text may be understood to mean that it was nothing more than a false “rumor” (2 Kings 19:7), which distracted Sennacherib from engaging Hezekiah.
18. Young, R.A., Hezekiah in History and Tradition, p. 75, Brill, Leiden, The Netherlands, 2012.
19. Kitchen, K.A., Ancient Orient and the Old Testament, pp. 83–84, InterVarsity Press, Downers Grove, IL, 1966.
20. Hoffmeier, J.K., Egypt’s role in the events of 701 BC in Jerusalem, in Vaughn, A.G., and Killebrew, A.E. (ed.), Jerusalem in Bible and Archaeology: The First Temple Period, pp. 230–232,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Boston, MA, 2003.
21. Finkelstein, I., Migration of Israelites into Judah after 720 BCE: An answer and an update, ZAW 127(2):197–204, 2015.
22. Finkelstein, I., The two kingdoms: Israel and Judah, in Finkelstein, I., and Mazar, A., The Quest for the Historical Israel, p. 154, Brill, Leiden, Netherlands, 2007.
23. Na’aman, N., When and How Did Jerusalem Become a Great City? The Rise of Jerusalem as Judah’s Premier City in the Eighth–Seventh Centuries B.C.E., BASOR 341:40,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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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미디어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