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셋 신전을 무너뜨린 삼손 이야기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
(Does archaeology shed any light on the story of Samson pulling down a Philistine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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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기록된 삼손(Samson)의 이야기에 보면, 신전을 통째로 무너뜨렸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은 이런 설명에 관련된 어떤 정보를 밝혀낸 일이 있었는가? 이스라엘이 블레셋(Philistines, 팔레스타인)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승패를 가른 핵심적인 전환점은 삼손의 죽음이었다. 그는 들릴라(Delilah)의 속임수에 빠져 포로가 되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의 눈을 빼고, 그들의 주요 도시들 중의 하나인 가사(Gaza, 가자)로 그를 데려갔다.
거기에서 그들은 감옥 안에 있는 곡식을 찧는 맷돌을 돌리게 했다. 우리는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이런 형태의 감옥이 실제로는 ‘방앗간(grinding house)’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고대에 가장 많은 시간이 걸리는 일들 중의 하나는 곡식을 빻는 일이었다. 일반 가정에서 이 일은 가사를 맡은 여성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관료적 귀족정치는 특권층들에게 곡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방앗간을 세웠다. 이곳에서 노예와 죄수들은 노역을 하였다. 도구는 단순한 수동식 맷돌(hand grinding stones)들이었다. 삼손은 그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앞뒤로 비비는 수동식 절구로 곡식을 빻으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날 블레셋의 지도자(방백)들은 그들의 대적을 이긴 승리를 자축하기 위하여, 그들의 신 다곤에게 제사를 드리는 종교축제를 열었다. 그들은 삼손을 군중이 모여 있는 신전으로 데려왔다. 삼손은 그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었다. 신전 안에서 삼손은 자기를 군중들에게 데려가는 소년에게 집을 버틴 기둥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그는 기둥을 의지하고 기댈 수가 있었다.
”집을 버틴 두 가운데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삿 16:29,30).
단 한 번에 삼손은 모든 블레셋 지도자들을 전멸시켰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블레셋과의 분쟁에 있어서 하나의 주요한 역전이었고, 전환점이 되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블레셋에 대하여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까? 한 사람이 혼자의 힘으로 신전을 통째로 무너뜨릴 수가 있었을까? 고고학은 우리들에게 놀라운 해답을 제공해 준다.
.이스라엘의 텔 카실(Tel Qasile)에 있는 블레셋 신전의 두 기둥을 지지했던 돌 기초.
두 개의 블레셋 신전(Philistine temples)들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었다. 하나는 북부에 있는 텔 카실(Tel Qasile)에서, 다른 하나는 텔아비브 남부 21마일 지점의 고대 에글론(Ekron)이었던 텔 미크네(Tel Miqne)에서였다. 두 신전 모두 하나의 독특한 설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붕은 두 개의 중심 기둥으로 지지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기둥들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고, 돌로 된 기초들 위에 놓여져 있었다. 그 기둥들은 서로 1.8m(6피트) 간격이었고, 힘센 사람이 나무기둥을 돌 기초로부터 이탈시킨다면 지붕 전체를 내려앉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고고학적 발굴들은 성경의 이야기와 완벽하게 들어맞으며, 성경의 기록에 대한 신뢰성을 확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삼손은 비록 결점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신약성경에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했던 위인들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히 11:32-34).
For Further Reading
.Bryant G. Wood 1974, Samson and the House of Dagon, Bible and Spade, pp. 50-54. (available from the Associates for Biblical Research).
.Between the Pillars - Revisiting Samson & the House of Dagon. Biblearchaeology.org
.John Roskoski, Samson's Death Account and the Ancient Theology of Territorial Dominion. St. Peter’s College Omega Bible Institute and Seminary.
.Samson. CreationWiki.
*참조 : 성경 속 '삼손의 힘' 증명할 고대 봉인 발견 (2012. 8. 16. 문화저널21)
http://www.mhj21.com/sub_read.html?uid=59726§ion=section2§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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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왕 시삭에 대한 어떤 증거가 발견된 적이 있는가?
(What evidence has been found of the Egyptian king, Shish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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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구체적 이름이 언급된 최초의 이집트 왕
약 BC 1010-970년까지 재위하던 이스라엘 제2대 왕 다윗(David)의 이름이 BC 9세기 경의 2개의 기록, 즉 텔 단 비문(Tel Dan Inscription)과 모압 비석(Moabite stone)에 나타나있다.[1]. 시삭(Shishak)은 성경에 이름이 언급되는 최초의 이집트(애굽) 왕이고, 우리가 성경 밖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 성경 안의 첫 번째 외국의 왕이다.
BC 10세기 이전의 이집트의 왕들에 대한 호칭은 ‘바로(Pharaoh)’ 라고 간단하게 언급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BC 10세기 이후에는 고유 이름이 직위에 포함되어 언급되었다(Bible and Spade, Autumn 1993, p.98). 이런 관행은 성경에서도 뒤따른다. 개인적인 이름이 확인된 첫 번째의 바로가 시삭인데, 그는 솔로몬과 그의 아들 르호보암(Rehoboam)의 통치 기간에 이집트를 통치했다. 우리는 열왕기상 11:40절에서 시삭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솔로몬 왕의 우상숭배 때문에, 하나님은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솔로몬에게서 10 지파를 빼앗아 솔로몬 궁정의 관리였던 여로보암(Jeroboam)에게 그 지파들을 주겠다고 선포하셨다.(왕상 11:26-39). 마침내 솔로몬은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했고, 그래서 여로보암은 애굽으로 도망했고, 거기서 시삭은 그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왕상 11:40).
솔로몬이 죽은 후, 여로보암은 귀환하여 분단된 북왕국의 왕이 되었고, 한편 르호보암은 남왕국 유다를 통치하였다.(왕상 12:1-17). 바로 그 후에, 애굽 왕 시삭은 그의 군대를 이끌고 와서 유다와 이스라엘을 침공하였다. 성경 기록은 다음과 같이 간단하다 :
”르호보암 왕 제 오년에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여호와의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모두 빼앗고 또 솔로몬의 만든 금 방패를 다 빼앗은지라” (왕상 14:25-26).
역대기 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함으로써 이 사건에 대하여 부연 설명을 하고 있다 :
”그에게 병거가 천이백 대요 마병이 육만 명이며 애굽에서 그와 함께 온 백성 곧 리비아와 숙과 구스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더라 시삭이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을 빼앗고 예루살렘에 이르니" (대하 12:3-4).
예루살렘은 유다의 지도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였음으로, 유일하게 파멸 당함을 면하였다.(대하 12:5-8). 이집트의 기록에서, 시삭의 이름의 철자는 ‘셰숑크(Sheshonq)’라고 되어있다. 나중에도 또 다른 셰숑크들이 있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성경의 시삭(Shishak/Sheshonq)은 셰숑크 1세(Sheshonq-I)로 알려지게 되었다.
시삭은 신왕국(New Kingdom)의 말기에 이집트에 정착했던 고대 리비아의 매쉬애쉬(Meshwesh) 부족의 족장 계열의 후손이었다. 그는 21대 왕조의 마지막 바로인 프수세네스 2세(Psusennes II) 휘하의 이집트 군대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시삭은 그의 아들 오소르콘(Osorkon)이 프수세네스 2세의 딸과 결혼함으로서 왕권과 연결되게 되었다. 프수세네스가 그의 자리를 이어받을 아들 없이 죽자, 시삭이 왕위에 올라 BC 약 945-924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했고, 230년 간의 리비아인의 통치(제 22대 왕조)가 시작되었다.
시삭의 통치 하에 이집트는 제2의 전성시대를 맞이했다. 그는 델타, 멤피스, 헤라크레오폴리스, 테베에서 주요한 건축물들을 건축하였다.
시삭은 한 동안 북쪽에 있는 인접 국가를 주목하고 있었음에 분명했다. 여로보암에게 피난처를 제공함으로써, 이스라엘 분단의 원인을 제공했다. 분열이 일어났을 때, 그에게는 이제 2개의 국가로 약화된 왕국에 결정적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래서 그는 군사적 침공을 개시했다. 우선적인 이유는 그 지역을 합병하기 보다는, 북쪽에서 이스라엘의 상업적 독점권을 분쇄하고, 필요한 많은 전리품들을 획득하려 했던 것 같다.
시삭의 군사적 침공은 성경에는 물론 이집트의 기록에도 남아있다. 귀환 후에, 그는 이집트 남쪽의 테베에 있는 거대한 아문 대신전(great Temple of Amun) 앞에 축제 광장을 건설했다. 그 공사의 재정은 의심의 여지없이 유다와 이스라엘로부터의 약탈품으로 충당되었다. 시삭은 그 광장의 한쪽 벽면 위에 그의 팔레스타인 원정을 기념하는 양각 부조(relief)를 만들도록 했다. 불행하게도 후에 그것은 많은 손상을 입었다. 그러나 남아있는 것들은 그가 성경의 기록대로 유다뿐만 아니라, 북왕국 이스라엘까지도 침략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 장면은 시삭이 부조의 글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로 보이는 일단의 외국인들을 매질하는 모습이 오른쪽 측면에 그려져 있다. 시삭의 인물 모습은 거의 파괴되었다. 왼쪽 측면에는 포로로 잡힌 도시들을 밧줄로 끌고 가는 이집트의 주 신인 아문(Amun)이 묘사되어 있다.
각 도시는 위쪽이 묶인 죄수와 함께, 그 도시의 이름을 포함하는 타원형 테두리(oval cartouche)로 표현되어 있다. 그 목록은 유다 지역의 이름들이 있는 부분은 거의 완전히 지워진 채로, 주로 이스라엘 성읍들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성읍들 중의 하나는 므깃도(Megiddo)인데, 1926년 Oriental Institute의 발굴에 의해서 므깃도의 한 장소에서 시삭의 기념비가 발견되었다. 그의 이름은 선명하게 읽을 수 있었고, 그 석비는 의심할 여지없이 BC 925년의 정벌로 유래한 것이었다.
시삭의 손자인 셰숑크 2세의 견고한 은제 관. 이것은 1939년 피에르 몽테(Pierre Montet)에 의해서 이집트 삼각주의 타니스(Tanis)에서 발견되었다. 관을 만드는데 사용된 은은 아마도 BC 925년 시삭의 정벌의 전리품으로서 유다와 이스라엘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시삭의 군사침공 이야기에 대한 각주 : 시삭의 아들인 오소르콘 1세(Osorkon-I)가 왕위에 올랐을 때, 이집트의 신전들에 엄청난 양의 금과 은(386톤)을 나누어 주었다. 더더욱 그는 그의 아들 셰숑크 2세(Sheshonq-II)를 순 은으로 된 관 속에 넣어 매장했다. 이 모든 재물들은 어디에서 왔겠는가? 신빙성 있는 유일한 설명은 BC 925년 시삭의 군사침공 때 예루살렘의 성전과 왕궁, 그리고 유다와 이스라엘의 다른 도시들로부터 가져왔다는 것이다.(왕상 14:26)
Reference
These texts were discussed in the pages of Bible and Spade (Autumn 1993, pp. 119-121, and Summer 1995, pp. 91-92).
For further reading
.Further information on biblical archaeology [Go]
.Charles F. Aling, Shishak and the Wealth of Solomon, Institute for Biblical Archaeology Newsletter, Oct.-Dec. 1993, pp. 4-5.
.Kenneth A. Kitchen, Where Did Solomon's Wealth Go?, Bible and Spade, Autumn 1994, pp. 108-109, reprinted from Biblical Archaeology Review 15/3, May/June 1989, p. 30.
.Kenneth A. Kitchen, Shishak's Military Campaign in Israel Confirmed, Biblical Archaeology Review 15/3, May/June 1989, pp. 32-33.
.Where Did The Treasure Of King Solomon Go? biblereadingarcheology.com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christiananswers.net/q-abr/abr-a017.html
출처 - ChristianAnswers.net
바벨탑
(The Tower of Babel)
Pam Sheppard
당신은 바벨탑(Tower of Babel)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생각할 때, 반역, 심판, 대혼란, 흩어짐, 분리 중에서 어떤 단어들이 떠오르는가? 이 단어들은 정확히 이 사건의 다른 국면들을 기술하고 있지만, 각각의 단어들은 역사를 바꾼 이 사건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값진 교훈들을 내포하고 있다.
Answers magazine의 2008년 4~6월 호 ”바벨 탑” 특집 편은 창세기 11장에 기록된 것과 같은 바벨에 관한 몇 가지 매혹적인 면들을 다루고 있다. 당신이 여기서 보게 될 몇몇 기사들을 소개한다.
► ”반역의 세계(The World in Revolt)” - Answers magazine의 편집장인 마이크 매튜(Mike Matthews)는 창 11장 1절부터 9절까지의 한 절 한 절에서 여러 통찰력 있는 점들을 밝혀낸다. 인간의 반역하는 마음은 바벨탑 사건 이후 지난 4,000년 동안 정말로 변했을까?
► ”바벨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What Did the Tower Look Like?)” - 우리는 그 탑의 크기와 형태에 대하여 실제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이 짧은 논문은 이러한 많은 제기된 질문들을 논한다.
► ”애굽(이집트)과 바벨 : 어느 것이 먼저였나?(Egypt or Babel: Which Came First?)” -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하여 당신이 성경 연대기의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다. 그리고 피라미드들에 대해서는 어떤가? 그들은 언제 축조되었는가? 당신은 이들 질문들과 그 이상에 대해서 답을 찾게 될 것이다.
► ”고대 문화의 아버지(‘Pop’ Cultures of Antiquity)” - 바벨탑 이후 얼마나 빨리 문명들이 형성되었을까? 문명들이 갑자기 발흥하였는가, 아니면 수만 년 동안에 걸쳐서 서서히 나타났는가? AiG의 새 역사 커리큘럼인 고대문명들(Ancient Civilizations)의 저자 다이아나 와링(Diana Waring)은 고고학적 기록에서의 발견들을 제시함으로써 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우르는 바벨을 오늘날과 연결시키고 있다(Ur Connects Babel to Today)” - Associates for Biblical Research의 설립자요, 전 책임자였던 데이비드 리빙스톤(David Livingston) 박사는 아브라함(Abraham)의 출생지인 우르 시에서의 삶이 어떻게 바벨탑에 관한 단서를 제공하는지를 논한다.
바벨과 오늘날 우리 세계와의 연관성
바벨에서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영향이 오늘날까지도 감지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 시기는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국가, 언어, 인간 집단들, 그리고 더 많은 것들을 설명하고 있다.
다음 기사들은 바벨이 오늘날 우리 세계와의 연관성들을 보여주고 있다 :
► ”하나님 위에 군림했던 한 국가(One Nation over God)” - Vision Forum Ministries의 설립자 겸 회장인 도우 필립(Doug Phillips)은 바벨이 현대 정부의 역할을 어떻게 설명하는가를 보여준다.
► ”다양한 어족들의 기원(More Than PIE)” - 언어 전문가인 존 올러(John Oller, Jr.) 박사는 원시-인도-유럽어(Proto-Indo-European, PIE) 계통을 포함하여, 왜 그렇게 많은 어족(語族)들이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바벨탑이 어떻게 설명해 주는지를 보여준다.
► ”언어들의 혼잡에 관한 이야기(Tongue-Twisting Tales)” - 전 세계적으로 홍수 설화가 있는 것처럼, 전 세계적으로 언어에 관한 설화가 있는가? 먼 곳에 있는 이 이야기들에서 재미있는 것을 찾아보라.
► ”흑인과 백인은 어떻게? (It’s Not Just Black and White)” - 켄 햄(Ken Ham)은 민족의 발생이 어떻게 바벨탑까지 추적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한 혈통”이라면, '흑인”과 '백인” 쌍둥이와 같은 것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가? 이 흥미로운 글에서 그것을 찾아보라.
바벨탑 이외의 기사들
화석들, 유전학, 지질학, 그리고 제왕나비와 같은 다른 매혹적인 논제들을 더 깊이 살펴본다.
► ”루시는 최초로 묻혔는가?(Lucy Was Buried First?)” - 쿠르트 와이즈(Kurt Wise) 박사는 인간들 이전의 화석 층에서 왜 원숭이들이 발견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한다.
► ”네 명의 여자, 한 척의 배, 그리고 많은 아이들(Four Women, a Boat, and Lots of Kids)” - 미토콘드리아 이브를 기억하는가? 토드 우드(Todd Wood) 박사는 우리가 어디서 유래했는지에 관해 DNA가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에 관한 새로운 면을 보여준다. 우리의 먼 조상들은 아프리카에서 왔는가, 아니면 바벨에서 왔는가?
► ”세상은 하나의 묘지이다(The World’s a Graveyard)” - 스넬링(Snelling) 박사는 창세기 홍수에 관한 6가지의 주된 지질학적 증거들에 관한 세 번째 글로서, 전 세계적으로 존재하는 화석무덤들에 관한 심층적인 자료들을 제시한다.
► ”제왕나비의 경이로움(The Marvels of the Monarch)” - 야생 생물학자였던 오다니엘(Donna O’Daniel)은 제왕나비의 생애와 가을 동안에 먼 남쪽으로 이주하는 믿을 수 없는 그들의 장거리 여행 능력을 소개한다.
► ”공룡 - 바벨 이후 살아있었는가? (Dinosaurs—Alive After Babel?)”
► ”성경의 권위는 당신의 매일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는가? (How Does ‘Biblical Authority’ Affect Your Everyday Life?)”
► ”피라미드를 지을만한 충분한 사람들이 있었는가? (Were There Enough People to Build the Pyramids?)”
► ”바벨은 우리의 차이점을 설명해 준다. (Babel Explains Our Differences)”
아이들을 위한 대답들과 그림
아이들은 화려한 색깔의 접힌 포스터에 아름다운 나비와 털이 많은 쐐기벌레(송충이 등)들을 조합시키는 것을 좋아할 것이다. 그들은 또한 제왕나비의 생애와 몇 가지 다른 흥미로운 사실들에 대해서도 배울 것이다. 그림 도표는 부모님들과 선생님들에게 바벨탑 사건이 우리의 차이점(흑인 백인 등)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좋은 참고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 쟁점들을 다루고 있는 여러 페이지들을 넘겨가며, 당신이 보는 바와 같이 바벨탑에서 일어났던 사건은 역사적으로 하나의 단순한 교훈을 넘어선다. 이 페이지들에는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하고 삶에 적용해야하는 교훈들이 담겨져 있다. 당신은 이 지식을 누구와 나누려는가?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8/03/11/tower-of-babel-am
출처 - AiG, March 11, 2008.
성경에 언급된 건축물들이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발굴된 적이 있는가?
(Have any man-made structures mentioned in the Bible been unearthed by archaeolog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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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성경에 언급된 많은 건축물들이 발굴되어져왔다. 가장 흥미로운 것들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 에글론(모압 왕)이 에훗(사사기 3:15-30)에 의하여 암살당했던 여리고에 있던 궁전(사사기 3:15-30).
▶ 가알과 스불이 성읍으로 접근하던 아비멜렉의 군대를 보았던 세겜의 동쪽 문(east gate of Shechem) (사사기 9:34-38).
▶ 세겜에 있던 바알/엘브릿 신당(Temple of Baal/El-Berith). 그곳의 자금은 아비멜렉의 왕권을 위해 조달되어졌고, 아비멜렉이 성읍을 공격하였을 때, 세겜의 백성들은 그곳을 피난처로 택했다. (사사기 9:4, 46-49).
▶ 다윗과 이스보셋의 군대가 이스라엘의 왕권을 놓고 다투는 동안 싸웠던 기브온의 못(pool of Gibeon). (사무엘하 2:12-32).
▶ 술람미 여인의 눈 같았던 헤스본의 못(Pool of Heshbon). (아가 7:4).
▶ 이스라엘 왕들이 살았던 사마리아에 있던 왕궁. (열왕기상 20:43, 21:1,2, 22:39, 열왕기하 1:2, 15:25)
▶ 아합 왕이 죽은 후에 그의 병거에서 흘린 피를 씻어내었던 사마리아의 못(Pool of Samaria). (열왕기상 22:29-38)▶ 앗수르의 포위공격 동안에 물의 공급을 위해 히스기야 왕에 의해서 파여진 예루살렘 아래에 수로 터널. (열왕기하 20:20, 역대하 32:30)
▶ 벨사살 왕이 연회를 배설하고, 손가락이 나타나서 벽에 쓰여진 글자를 다니엘이 해석했던 바벨론에 있던 왕궁. (다니엘 5장)
▶ 에스더가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Xerxes) 왕의 왕비였을 때 수산(Susa)에 있던 왕궁. (에스더 1:2, 2:3,5,9,16).
▶ 에스더의 사촌인 모르드개가 앉아있었던 수산에 있던 대궐 문. (에스더 2:19,21, 3:2,3, 4:2, 5:9,13, 6:10,12).
▶ 모르드개가 하닥(아하수에로 왕의 내시)을 만났던 수산에 있던 대궐 문 앞 광장. (에스더 4:6).
▶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사람을 치료하셨던(마가복음 1:21-28), 그리고 생명의 떡에 관한 설교를 하셨던(요한복음 6:25-59) 가버나움에 있던 회당 터.
▶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와 다른 많은 사람들을 고쳤던 가버나움에 있던 베드로의 집. (마태복음 8:14-16).
▶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던 야곱의 우물(Jacob's well). (요한복음 4장)
▶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던 예루살렘의 베데스다 못(Pool of Bethesda). (요한복음 5:1-14)
▶ 예수님께서 장님의 눈을 고치셨던 예루살렘의 실로암 못(Pool of Siloam). (요한복음 9:1-4).▶ 바울이 재판을 받았던 고린도에 있던 법정. (사도행전 18:12-17).
▶ 은장색들의 폭동이 일어났었던 터키의 에베소에 있던 극장. (사도행전 19:29).
▶ 바울이 갇혀있던 가이사랴에 있던 헤롯 궁. (사도행전 23:33-35).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christiananswers.net/q-abr/abr-a005.html
출처 - ChristianAnswers.net
에덴동산은 발견된 적이 있는가?
(Has the Garden of Eden ever been f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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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에덴동산의 장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세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네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 2:10-14)
이 강들 중에 둘은 힛데겔과 유브라데로 불렸다. (창세기 2:10-14을 보라)
이것이 많은 크리스천들이 에덴동산을 오늘날 티그리스(Tigris) 강과 유프라테스(Euphrates) 강이 흐르고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오늘날 이라크 주변) 어딘가에 위치하였다고 가정하였던 이유이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 십 수세기 후에 전 세계를 황폐화시킨 전 지구적 홍수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 대륙은 엄청난 홍수 물로 뒤덮였고, 홍수 이전의 대륙들은 분리되어 떨어져 나갔으며, 퇴적지층들은 어떤 곳에서는 수 km 두께로 퇴적되면서, 홍수 이전 세계를 완전히 파묻어 버렸다.
홍수 이후에, 생존자들은(노아의 가족과 후손들) 시날(Shinar, Sumeria/Babylonia) 평지로 이동하였다. 그곳은 오늘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로 불려지는 강들이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분명히 이 강들은 성경에 기록된 강들과 같은 강들이 아니다. 오늘날의 그 강들은 대홍수로 수십억의 죽은 생물들을 포함한 채 퇴적된 두터운 지층 꼭대기를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 강들은 아마도 홍수 이전에 있던 원래의 강들의 이름을 따라 불려졌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영국으로부터 미국과 호주로 이주한 정착자들이, ‘새로운 세계(new world)’에 많은 장소들의 이름을 그들과 친근했던 이름들로 불렀던 것과 유사하다.
또한 성경은 하나의 강이 4개로 나뉘어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중동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에덴동산은 노아의 홍수로 인하여 파괴되었다. 오늘날의 지구상에서 에덴동산의 실제적 위치는 확립될 수 없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christiananswers.net/q-aig/garden-of-eden-loc.html
출처 - ChristianAnswers.net
고고학적 발견들은 성경의 신뢰성을 입증하고 있다.
(In what ways have the discoveries of archaeology verified the reliability of the Bible?)
ChristianAnswers.net
오랜 기간 동안 성경의 역사적 신뢰성(historical reliability)에 관하여 성경을 반대하는 여러 수준의 많은 비판들이 있어왔다. 이 비판들은 흔히 성경 기록을 확인하는 데에 외부 자료의 증거가 부족하다는 데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성경은 종교적인 책이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만일 성경 이외의 자료들로부터 보강 증거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성경은 편향되어 있고 믿을 수 없는 책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무흠하다는 것이 증명되기 전까지는 유죄이고, 외부(세속 역사) 증거들이 부족하다면 성경의 기록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이 기준은 다른 고대 문서에 적용되는 기준과 매우 다르다. 심지어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많은 종교적인 요소를 가진 기록들에 대한 기준과도 많이 다르다. 그들은 그 문서들이 정확하지 않다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들을 정확한 것으로 여긴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을 입증하기는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1800년대 중반 이래 고고학적 발굴들은 성경 기록의 신뢰성과 타당성을 증명해 왔다.
여기에 몇몇 사례들이 있다.
▶ 1970년대에 북 시리아에 있는 에블라(Ebla, 시리아의 고대 도시) 고문서의 발견은 족장(Patriarchs)들에 대한 성경의 기록이 실제 사실이었음을 보여주었다. BC 2300년경에 점토판(clay tablets)에 쓰여진 문서들은 족장들의 기록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들과 장소들의 이름들이 진짜였음을 입증하였다. 비평가들이 그 당시에는 사용되지 않았고, 성경의 앞 장들에서 부정확하게 사용되었다는 이름인 ‘가나안(Canaan)’이라는 이름이 에블라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창세기 1:2절에 있는 ‘테홈(tehom, 깊음)’이라는 단어는, 나중 시대에 사용되었던 단어로서, 창조 기사가 나중에 씌어졌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말해져 왔었다. 그러나 '테홈'이라는 단어는 에블라에서 사용되고 있던 단어로서, 모세보다 약 800년 전에 사용되고 있었다. 또한 족장들의 이야기에 반영되어 있는 고대 풍속들이 누지(Nuzi)와 마리(Mari)에서 출토된 점토판에서 발견되었다.
▶ 헷(Hittites, 히타이트) 족속은, 그들의 수도와 기록들이 터키의 보아즈쾨이(Bogazkoy)에서 발견되기 전까지, 하나의 성경적 전설일 것으로 생각된 적이 있었다.
▶ 많은 사람들은 솔로몬의 부에 대한 성경의 언급들이 지극히 과장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과거로부터 발굴된 기록들은 고대의 재산들이 왕에게 집중되었고, 솔로몬의 영화는 완전히 타당성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 이사야 20장 1절에 기록된 사르곤(Sargon)이라는 이름을 가진 앗수르(아시리아)의 왕은 실존하지 않았다고 주장되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이름이 다른 어떤 기록에서도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라크의 코르사바드(Khorsabad)에서 사르곤의 왕궁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사야 20장에 언급되어있었던 사건, 즉 그의 아스돗(Ashdod) 포로 기사가 바로 그 궁궐의 벽에 기록되어 있었다. 승리를 기념하는 석비 조각들이 아스돗 그곳에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 의문시 되고 있던 또 하나의 왕은 다니엘 5장에 이름이 나와 있는 바벨론(바빌로니아, Babylon)의 왕 벨사살(Belshazzar)이다. 기록된 역사에 따르면, 바벨론의 마지막 왕은 나보니두스(Nabonidus)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벨사살이 바벨론에서 공동 섭정을 하던 나보니두스의 아들이었음을 보여주는 점토판들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벽 위에 손가락이 나타나서 쓰여진 글을 보면서, 벨사살 왕이 다니엘에게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너로 나라의 세째 치리자를 삼으리라”고 제안할 수 있었다.(단 5:16).
고고학적 발굴들에 의해 자주 확인되는 것처럼, 우리는 성경의 기록이 ‘목격되어진‘ 기록임을 보게 되는 것이다.
*참조 : A reliable historical record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0_2/j20_2_20-23.pdfThe times of the 'Great Kings' of Persia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03_1/j03_1_128-134.pdf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christiananswers.net/q-abr/abr-a008.html
출처 - ChristianAnswers.net
스바 여왕 : 솔로몬은 이집트 파라오의 방문을 받았는가?
(The Queen of Sheba: was Solomon visited by an Egyptian pharaoh?)
Ryan Jaroncyk
스바 여왕(Queen of Sheba, 시바의 여왕)의 정체는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미스터리로 여겨져 오고 있었다. 2006년에 데이비드 다운(David Down)과 존 애쉬톤(John Ashton)은 ”파라오들을 벗기며: 이집트의 고고학은 성경적 시간틀을 어떻게 확증하는가? (Unwrapping the Pharaohs: How Egyptian Archaeology Confirms the Biblical Timeline)” 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에서 저자들은 이집트 역사와 구약 성경의 역사를 조화시키는 수정된 연대기(chronology)를 제안하고 있었다. 수정된 연대기에 의하면, 성경에 나오는 스바 여왕은 이집트에서 가장 유명했던 여왕인 하트셉수트 여왕(Queen Hatshepsut)과 동일인물이라는 상당한 량의 정황적 증거들이 있다. (하트셉수트 여왕의 미라는 얼마 전 발견되었다. (아래의 부록과 참조 글을 보라.)
.카이로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하트셉수트(Hatshepsut) 여왕의 얼굴이 조각된 스핑크스.
다운과 애쉬톤 이들만이 이집트 역사를 대폭적으로 수정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시간의 시험(Test of Time)’이라는 책의 저자이며, 세속적 고고학자인 데이비드 롤(David Rohl)도 ”람세스 2세(Ramses II)는 정통적인 연대표에서 그가 위치하는 시기보다 약 350년이 늦은 BC 10세기의 인물”이라고 제안하였다.[1]. 피터 제임스(Peter James)와 다른 4명의 학자들은 ‘암흑의 세기들(Centuries of Darkness)’라는 책을 발간하였다.[2] 그들은 이집트 왕조, 특히 21-24대 왕조의 연대들이 몇 백년씩 단축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래 관련자료 링크 2번 참조). 캠브리지 대학의 고고학 교수인 렌프류(Renfrew) 박사는 이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이 두근거리게 하는 책은... 세계사의 한 중요한 시기에 대해서, 그리고 매우 흔들리는 연대와, 전체 연대기적 틀, 그리고 우리의 현대적 해석 기반에 대해서 이목을 끌고 있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에 대한 존재하는 연대표가 수 세기 씩이나 틀리고 있다. 결국 역사는 다시 쓰여져야만 할 것이다”[8]
창세기로 시작하는 성경의 역사적 신뢰성은 오늘날 기독교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안들 중 하나이다. 만일 우리가 과거의 실제적 사건들에 대한 역사적 고증에서 성경의 정확성이 신뢰받을 수 없다면, 성경이 어떻게 영적인 문제에서 신뢰를 받을 수 있겠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 3:12절에서 니고데모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스바 여왕은 고대 이집트의 역사 기록, 구약성경, 1세기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 신약성경 등을 상호 대조함으로써 정확하게 확인되어질 수 있다. 모든 증거들이 대조 평가된다면, 스바 여왕은 이집트를 통치했던 가장 강력한 여자였던 하트셉수트 여왕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트셉수트의 가계 배경
투트모세 1세(Thutmosis I)의 딸인 하트셉수트 여왕은 약 22년 동안 전성기 이집트(애굽)를 통치했다. 전통적인 이집트 표준 연대기에서는 하트셉수트 여왕은 BC 15세기에 살았으나, 수정된 연대기로는 BC 10세기(솔로몬 시대)에 살았고 통치했다는 것이다.[4] 하트셉수트는 그녀의 이복 오빠인 투트모세 2세(Thutmosis II)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 사이에서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투트모세 2세는 재혼을 했고, 그 사이에서 투트모세 3세(Thutmosis III)가 태어났다. 투트모세 3세가 약 12살이었을 때, 그의 아버지인 투트모세 2세는 죽었고, 의붓어머니인 하트셉수트가 이집트를 섭정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이집트 역사에서 가장 당황스러운 사건들 중 하나로서, 투트모세 3세가 법적으로 왕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하트셉수트가 결과적으로 자신을 이집트의 왕으로 선포했다는 사실이다. 에모리(Emory) 대학의 미술사 교수인 게이 로빈스(Gay Robins)는 ”우리는 왜 하트셉수트가 전통을 무시하고 왕이 되었는지, 또한 남성 위주의 관료정치 체계가 이런 탈선을 용인했는지 결코 확신할 수가 없다”라고 썼다.[5] 하트셉수트는 오랜 기간 풍요로운 통치를 한 후 죽었고, 투트모세 3세가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투트모세 3세(성경의 시삭)는 마침내 이집트를 세계에서 가장 강한 제국 중의 하나로 만들었다.
하트셉수트의 영화
하트셉수트는 ”매력적인 달걀형 얼굴의 가냘픈 몸매, 높은 이마, 아몬드 모양의 두 눈, 섬세하고 뾰족한 아래 턱···· 확실히 여성다운 상냥함 등을 갖춘” 것으로 조각상들에서 묘사되어 있었다.[8] 전형적인 왕다운 자만심 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기에 너무 좋고, 신의 형상과 영혼을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독신녀, 신선하고, 침착한 본성, 총체적으로 신성하다.” 라고 기록하고 있었다.[7]
.이집트 웨스트 테베(West Thebes) 다이르 알바리(Deir el Bahari)에 있는 파라오 하트셉수트(Pharaoh Hatshepsut)의 기념 사원.
그녀는 카르낙 신전(temple of Karnak)에 두 쌍의 오벨리스크(obelisks)를 세웠다. 이 중 하나는 기록적인 29m 높이로 오늘날까지도 이집트에 서있다. 그녀는 또한 나일강 서쪽 제방의 다이르 알바리(Deir el Bahri)에 훌륭한 사원을 세웠다. 이 장엄한 사원의 벽 위에, 미술가들은 하트셉수트가 ‘푼트의 땅(Land of Punt)’으로 갔던 역사적인 원정(expedition)을 그려 놓았다. 이 원정 여행은 스바 여왕이 솔로몬 왕을 방문했다는 성경의 기록으로 우리를 데려간다.(열왕기상 10:1–13, 역대하 9:1–12).
”스바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예를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저를 시험코자 하여/ 예루살렘에 이르니 수원이 심히 많고 향품과 심히 많은 금과 보석을 약대에 실었더라 저가 솔로몬에게 나아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하매/ 솔로몬이 그 묻는 말을 다 대답하였으니 왕이 은미하여 대답지 못한 것이 없었더라/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모든 지혜와 그 건축한 궁과/ 그 상의 식물과 그 신복들의 좌석과 그 신하들의 시립한 것과 그들의 공복과 술 관원들과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는 층계를 보고 정신이 현황하여/ 왕께 고하되 내가 내 나라에서 당신의 행위와 당신의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이 진실하도다/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목도한즉 내게 말한 것은 절반도 못되니 당신의 지혜와 복이 나의 들은 소문에 지나도다/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복들이여 항상 당신의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기뻐하사 이스라엘 위에 올리셨고 여호와께서 영영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을 세워 왕을 삼아 공과 의를 행하게 하셨도다 하고/ 이에 저가 금 일백 이십 달란트와 심히 많은 향품과 보석을 왕께 드렸으니 스바 여왕이 솔로몬 왕께 드린 것처럼 많은 향품이 다시 오지 아니하였더라/ .... 솔로몬 왕이 왕의 규례대로 스바 여왕에게 물건을 준 외에 또 저의 소원대로 무릇 구하는 것을 주니 이에 저가 그 신복들로 더불어 본국으로 돌아갔더라” (열왕기상 10:1–10,13)
푼트와 스바라는 지명에 대한 미스터리들
역사가들은 푼트(Punt)라는 곳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 오랫동안 논쟁을 벌려왔다. 다이르 알바리에 있는 사원의 양각조각에 묘사된 동식물들을 근거로 하여, 많은 학자들은 푼트가 동아프리카에 있는 한 지역(지금의 소말리아와 지브티 지역)이거나 국가라고 믿고 있다. 마찬가지로 학자들은 스바(Sheba)의 실체와 위치에 대해서도 논쟁을 벌려왔다. 어떤 학자들은 에티오피아나 예멘에 위치하고 있는 한 왕국이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몇 개의 이집트 비문들, 구약성경, 요세푸스의 역사책, 그리고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푼트와 스바의 위치에 대해 더 큰 명쾌함을 준다.
풀려진 미스터리들
하트셉수트의 비문(inscriptions)들에서 그녀는 ‘푼트의 땅’을 ‘하나님의 땅(God’s Land)’이라고 언급하고 있었다.[8] 최소한 하나의 이집트 비문에서, 푼트 지역은 이집트의 북쪽인 팔레스타인(Palestine)에 있는 지역임을 언급하고 있었다.[9] 이것은 그녀가 예루살렘에 있는 솔로몬을 방문했다는 성경의 기록과 일치한다. 1세기 유명한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었다 :
”그때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의 여왕인 한 여자가 있었다… 이 여왕이 솔로몬의 덕행과 사려 깊음에 대해 들었을 때, 그녀는 그를 만나보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래서 그녀는 매우 화려하고 고급스런 예물들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왔다”[10]
마태복음 12:4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또한 누가복음 11:31절도 참조하라)
그러므로 스바 여왕이 이집트 땅(land of Egypt)으로부터 왔다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아프리카산 식물과 동물들
하트셉수트 사원의 양각조각에 새겨져 있는 토종 동물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푼트가 동아프리카 국가여야 한다고 항변한다. 양각 조각들은 장대로 운반되는 (여왕이 선물로 받아 온) 나무들, 유향, 몰약, 황금, 향료, 상아, 흑단, 그리고 원숭이들을 보여주고 있다.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살았는데, 어떻게 이런 값비싼 아프리카 물품들과 동물들을 스바 여왕에게 줄 수 있었을까? 성경 본문을 더 자세히 읽어보면 이런 외견상의 모순점이 해결된다. 분명히 솔로몬 왕은 황금, 백단목, 보석, 금과 은, 상아, 공작새, 원숭이(잔나비)들을 이스라엘 밖에서 수입했던 해군 함대를 소유하고 있었다.(왕상 10:11,22 참조). 어떤 학자들은 솔로몬 왕이 이런 동식물들과 물품들을 아프리카의 북쪽 지방에서 수입해왔다고 믿고 있다. 하트셉수트의 양각 조각에는, "세상이 존재한 이래 어떤 왕에게서도 결코 그와 같은 것들을 가져올 수 없었다.”라고 쓰여져 있다.[8] 이것은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확증하는 것이다 :
”솔로몬 왕이 왕의 규례대로 스바 여왕에게 물건을 준 외에 또 저의 소원대로 무릇 구하는 것을 주니 이에 저가 그 신복들로 더불어 본국으로 돌아갔더라” (열왕기상 10:13)
결론
성경의 기록을 검증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성경은 놀랍도록 정확한 역사서임이 증명된다. 호주 고고학회의 전 책임자인 클리포드 윌슨(Clifford Wilson)은 언젠가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성경은 세상이 지금까지 보아 온 것 중에서 가장 정확한 역사 교과서이다.”[11] 성경의 역사적 신뢰성은 종종 역사가들과 고고학자들을 놀라게 한다. 그리고 성경의 권위는 창세기로부터 시작한다. 최근 창조에 대한 역사적 기술, 인간의 타락, 죽음과 고통의 기원, 전 지구적 홍수, 그리고 바벨탑 사건에 대한 역사적 기술들은 세계의 참 역사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부록 : 스바 여왕의 미라는 발견되었는가?
이집트 유물의 책임자인 자히 하와스(Zahi Hawass)는 잃어버린 이빨과 CAT(computer-aided test) 스캔으로부터, ‘아마도 암으로 죽은 50대의 뚱뚱한 여자' 미라(mummy)가 하트셉수트의 것으로 확인됐다고 주장하였다. 하와스 박사가 설명하고 있는 ’The Search for Hatshepsut and the Discovery of her Mummy‘와 Bad tooth solves mystery of Egypt’s pharaoh queen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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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wrapping the Pharaohs: How Egyptian Archaeology Confirms The Biblical Timeline. by John Ashton &David Down
Who Is the Queen of Sheba in the Bible? (2022. 9. 6. Bible History Daily)
Was Hatshepsut the QUEEN OF SHEBA -- or Merely the Queen of Theba?
https://www.hope-of-israel.org/queenofsheba.html
References
1. Rohl, D., A Test of Time: The Bible: from Myth to History, Century Limited, London, UK, p. 128, 1995; see also review by Osgood, J., Journal of Creation 11(1):33–35, 1997.
2. James, P., Centuries of Darkness, Pimlico, London, UK, pp. XV–XVI, 1992.
3. James, ref. 2, p. 39.
4. Ashton, J. and Down, D. Unwrapping the Pharaohs: How Egyptian Archaeology Confirms The Biblical Timeline, Master Books, Green Forest, AR, p. 116, 2006.
5. Robins, G., Women in Ancient Egypt, Harvard University Press, Cambridge, MA, p. 47, 1993.
6. Tyldesley, Hatchepsut the Female Pharaoh, p. 130.
7. Steindorff and Steele, When Egypt Ruled the East, p. 41.
8. Ashton and Down, ref. 4, p. 122.
9. Schott, P, Les chants d’amour dans l’Egypte ancien, p. 97.
10. Whiston, Josephus’ Complete Works, Antiquities of the Jews, VIII, VI, p. 5.
11. Wilson, C, Archaeologist Speaks Out, Creation 21(1):15, 1998. It needs to be stated however that Dr Wilson strongly disagrees with the identification of Hatshepsut as Sheba. He cites 'scriptural facts as well as archaeological dating to show that Hatshepsut was the foster mother of Moses, and the stepmother of Pharaoh Thuthmosis III, who I and many other conservative scholars accept as being the Pharaoh of the Exodus.'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927
출처 - Creation on the web, 2007. 3. 23.
점토판은 소돔과 고모라가 소행성 충돌로 멸망됐음을 확인했다?
(Clay Tablet Identified as Asteroid that Destroyed Sodom and Gomorrah)
AiG News
한 고대의 점토판(clay tablet)이 소행성 충돌(asteroid impact)에 대한 목격담을 기술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충돌은 소돔과 고모라(Sodom and Gomorrah)의 멸망에 대한 성경적 설명을 가리키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The Times 지(2008. 3. 31)는 보도하였다.
150 여년 전에 니느웨(Nineveh)의 왕궁 도서관 유물들 중에서 발견된 그 점토판은 쐐기문자(cuneiform symbols)들로 되어있었는데, 브리스톨 대학교의 연구원들에 의해 최종적으로 판독되었다. 그러나 그 점토판에 새겨진 문자들의 반 가량은 훼손되어 남아있지 않았다.
그 문자들은 수천 년 전에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한 수메르 천문학자(Sumerian astronomer)의 기록에 대한 사본으로서, BC 700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천문학자는 ”흰 돌 덩어리의 접근(white stone bowl approaching)”과 ”격렬하게 휩쓸고 지나간(vigorously swept along)” 하늘의 어떤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이 자세하지 않은 기술에 근거해서, 연구팀은 그 소행성이 TNT 1000톤 이상에 해당하는 ”격렬한 충격”으로 아마도 오스트리아 알프스 산에 충돌했을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브리스톨 대학(Bristol University)의 연구팀은 컴퓨터를 사용하여 점토판에 기술된 그 소행성을 재창조하였고, 그 별이 BC 3123년 6월 29일 새벽에 모습을 나타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타임지 기사에 게재되지 않았다.)
연구원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관한 창세기의 설명을 포함해서, 소행성 충돌에 의한 파괴의 '형태와 규모”를 기록한 '최소 20 건의 고대 신화들(타임지의 표현)”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창세기 19장 23–29절을 한번 읽어보자 (개역개정판) :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우리는 이 기사를 더 깊이 분석하기 전에, 이 점토판에 쓰인 글자들의 반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점토판으로부터 소행성에 관한 그렇게 정확한 정보를 연구원들이 어떻게 이끌어낼 수 있었는지 의문스럽다. 그리고 그들은 오스트리아의 Köfels 인근에서 탐사되어서 산사태(landslide)로 알려진 지질학적 결과들과(그 산사태는 다른 이들에 의해서 BC 7,800년으로 연대가 평가되었다. 어떻든 그 연대는 확실히 과장된 것처럼 보인다) 소행성의 충돌을 연관시키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어셔 주교의 연대표(Ussher’s chronology)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BC 1996년부터 BC 1800년 대의 어느 시기까지, 창조 시점에서 2000년을 조금 지난 시기에 살았다. 성경에 기록된 아브라함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소돔과 고모라 사건은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난 후 이삭이 출생하기 전에 일어났다 그러니까 그 도시들의 멸망은 BC 20세기 후반(BC 1900년대 후반)에 발생했다. 더욱이 연구원들이 주장한 BC 3123년은 노아의 홍수보다도 이전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복사된 점토판의 원본이 방주에 실리지 않았다면, 그것이 존재하여 BC 700년에 복사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토판은 연구팀이 말한 것처럼 오래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BC 3123년에 충돌한 소행성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는 과정에서(유황이 대화재 시에 포함되어져 있어) 소행성이나 운석 같은 자연계의 물체들을 사용하셨을 가능성도 있다. 성경이 그것을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노아의 대홍수는 실재의 물, 실재의 비, 실재의 지질학적 작용, 실재의 화산활동들을 포함하여,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시발되어진 하나의 '자연적” 격변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 사건을 한 우연적 자연재해 이상의 것으로 명백히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어떻게 자연적 힘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발견하는 것이, 그 기록에서의 초자연적 요소를 대체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연을 사용하셨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기적들이 자연적 설명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되었을 수 있다. 특별히 성경의 기록을 왜곡하도록 요구한다면 더욱 그렇다. 사실 성경을 실제의 역사로서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시는 초자연적인 수준에서 머물러만 계신 것이 아니라, 실제 이 세상의 일들에 직접 관여하시고 개입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s://answersingenesis.org/archaeology/tablet-holds-eye-witness-account-of-asteroid-impact/
출처 - AiG News, 2008. 4. 5.
언어의 혼잡에 관한 전 세계의 전설들
(Tongue-Twisting Tales: One Language, Many Legends)
Pam Sheppard
전 지구적 홍수와 여기에서 살아남은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들은 세계 어느 곳에나 있다. 흔하진 않지만, 오직 하나의 언어만 존재했었던 때에 관한 이야기도 존재한다.
북아메리카
캘리포니아의 마이두 인디언(Maidu Indians)의 한 전설에 의하면, ”모든 사람들은 특별한 번제 의식을 준비하는 동안까지 같은 언어(same language)만 사용하였지만, 각 남편과 아내만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제외하고, 한 밤에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때 신이 모든 언어들을 다 말할 수 있는 쿡수(Kuksu)라는 이름의 지도자에게 모든 사람들을 다 집합시킬 것과, ”그들에게 동물들의 각각 다른 이름들과 여러 가지 다른 방언들을 가르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그 지도자는 각 종족들의 이름을 불러 그들이 앞으로 살게 될 곳을 일러주면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그들을 보냈다.”
중앙아메리카
한 아즈텍의 전설(Aztec legend)은 다음과 같다 :
”모든 인류는 한 홍수로 인해 멸망하였다. 그러나 콕스콕스틀리(Coxcoxtli)라는 한 남자와 호치케찰(Xochiquetzal)이라는 한 여자만 배를 타고 도망을 쳐서, 콜후아칸(Colhuacan)이라는 산에 이르렀다. 그들은 많은 자녀를 두었는데, 나무 꼭대기에 있던 한 비둘기가 그들에게 언어라는 선물을 가져다 줄 때까지 모두 벙어리였다. 그러나 이 언어들이 매우 달라서 자녀들은 서로 간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과테말라
과테말라의 키쉬(Quiche) 족은 크게 번성해서 옛 고향을 떠나 투란(Tulan)이라 부르는 곳으로 이주했다. 여기에서 그들의 언어가 바뀌었고, 사람들은 각자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게 되어, 세계 여러 부분으로 나아가 새로운 집들을 구했다.
아프리카
동부 아프리카의 와사니아(Wa-Sania) 족은 다음과 같은 전설을 가지고 있다 :
”땅 위의 모든 고대 종족들은 한 가지 언어만 알았다. 그러나 극심한 한발이 있어 사람들이 미쳐버렸고,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며 여러 방향으로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다른 언어가 생겨나게 되었다.”
인도
인도 동북부의 미키르(Mikir) 족은 강건한 사람들이었던 램(Ram)의 후손들이었는데, 땅에 불만을 품게 되어, 하늘을 정복하려는 열망을 가졌다. 그들은 한 탑(tower)을 쌓기 시작했다.
”그 탑은 점점 높이 올라갔다. 마침내 신들과 악마들은 이 거인들이 이미 땅의 지배자가 되었던 것처럼, 하늘의 지배자가 될까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했고, 세계의 네 구석으로 흩어버렸다. 이때부터 인류의 여러 가지 언어들이 생겨났다.”
유럽
그리스(Greeks)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
”오랫동안 사람들은 제우스 신의 통치만 받으며, 도시나 법률 없이, 한 언어를 말하며, 평화롭게 살았다... 마침내 헤르메스(Hermes)가 다양한 언어들을 도입했고, 인류를 각기 다른 나라들로 나누었다.”
폴리네시아
하오(Hao) 섬에 사는 폴리네시아인들은 라타(Rata)와 그의 세 아들이 대홍수에서 살아남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 후에 ”그들은 하늘에 미칠 수 있고, 창조의 신인 바테아(Vatea, Atea)를 볼 수 있는 건축물(building)을 세울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화가 난 신이 건축자들을 쫓아내고, 건축물을 헐어버리고, 언어를 바꿔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가지 언어로 말을 하게 되었다.”
중동
수메르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한 언어로 말했다고 믿고 있었다. ”엔메르카르(Enmerkar)와 아라타(Aratta)의 신”이라는 시에서 : ”그 시절에는... 전 우주는... 사람들은 동음으로... 풍요의 신인 엔키(Enki)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바꿨고, 그것으로 언쟁을 일으켰다. 그때까지 사람들의 말은 하나였다....”
동남아시아
버마(미얀마)의 가이크호(Gaikho) 족의 전설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 ”판댄맨(Pan-dan-man) 시대에 사람들은 하늘까지 닿는 한 탑을 쌓기로 결정했다.... 그 탑이 하늘의 중간까지 이르렀을 때, 신이 내려와서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사람들은 흩어졌고 가이크호 족의 조상인 탄마우라이(Than-mau-rai)가 여덟 족장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와서 시탕(Sitang) 계곡에 정착하였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창세기 11:1-9)
*Pam Sheppard earned her BSc degree in journalism from Ball State University and has written for numerous Christian publications. She has worked at Answers in Genesis–USA as a researcher and writer before becoming the national editor for Answers magazine.
REFERENCE LIST
[1] James George Frazer, Folklore in the Old Testament: Studies in Comparative Religion, Legend, and Law (New York City: Hart Publishing, 1975), pp. 150–151.
[2] Samuel N. Kramer, 'The Babel of Tongues: A Sumerian Version,”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88, no.1 (January–March 1968), pp. 108–111.
[3] Larousse Encyclopedia of Mythology (Prometheus Press, 1959), p. 445.
[4] Rev. J. H. Titcomb, 'Personal Recollections of British Burma and Its Church Mission Work in 1878– 79,” Project Canterbury (London, 1880).
[5] Robert W. Williamson, Religious and Cosmic Beliefs of Central Polynesia (Cambridge 1933), 1:94.
*참조 : A possible post-Flood human migration route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9_1/j19_1_65-72.pdf
The origins of language: an investigation of various theories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8_3/j18_3_24-27.pdf
The origin of language and communication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7_3/j17_3_93-101.pdf
The development of languages is nothing like biological evolutio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638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3/n2/tongue-twisting-tales
출처 - Answers Magazine, 2008. 2. 18.
진화론은 언어를 설명할 수 없다.
(Evolutionary Theory Can’t Handle Language)
David F. Coppedge
한 유전자가 언어(speech)의 스위치를 켰는가? 5년 전, 진화 유전학자들은 Foxp2 라 불려진 유전자에서의 돌연변이가 인간의 언어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라고 주장했었다 (05/26/2004를 보라). 이것은 2 가지의 관측 사실에 기초하고 있었다 : 1)침팬지들은 이 유전자의 돌연변이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2)Foxp2의 변이가 일어나 있는 사람은 언어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MIT의 컴퓨터 언어학 교수인 로버트 버위크(Robert Berwick)는 이 생각은 옳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고 주장하였다. Science Daily 지(2008. 2. 21)에 실린 한 기사는 그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었다 :
”이러한 종류의 직접적인(언어가 한 유전자와 연관되어 있다는) 연관은 유기체들이 함께 움직이는 방식이 전혀 아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언어만큼 복잡한 어떤 것이 (진화로) 생겨나게 될 때 ”진화론 연구에 대해 비난을 적게 받을 수 있는 예를 제안해야 한다.” 그리고 특별한 Foxp2 유전자와의 연관성은 여러 사건들의 전체적인 연속선상에서 기초되어야 한다. 각각의 사건들은 추정적인 것이다. 따라서 전체 이야기가 맞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것은 매우 혼란스럽고, 마치 일기예보와 같다. 잡음들이 신호를 압도하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오히려 언어는 훨씬 더 복잡하고 난해한 여러 요소들의 상호작용에 의한 결과가 거의 확실하다고 버위크는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특정한 유전학적 변화와 연관되어 생겨났을 가능성은 결코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과학에는 매우 흥미로운 어떤 것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들을 결코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흥미로운 무언가가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낭만적인 견해이다.”
심지어 언어를 정의하는 것마저도 어렵다고 그는 말했다. 새의 노래는 일종의 언어인가? 고래의 노래는? ”만일 당신이 언어가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다면, 왜 진화론적 관점으로 그것을 연구하는가?” 만일 그렇다 해도, 마치 프린터가 컴퓨터 시스템에서 주변 장치인 것처럼, Foxp2 유전자는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에 있어서 주변적인 것일 수 있다고, 버위크는 말했다.
그러면 이것은 언어의 진화에 대한 연구를 어디에 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버위크는 더 깊고 더 내적인 메커니즘을 찾고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시(詩)에서의 리듬과 새들의 노래 패턴에서 어떤 유사성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인과적(因果的)인 메커니즘 없이 어떤 유사성만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그 기사는 언어를 본질상 마음의 비언어적 기능이라고 묘사하면서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언어란 어떤 특별한 소리나 모양이나 동작과는 무관한, 인간 마음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어떤 것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동일한 내면의 정신적 구조는 그것의 기본적인 본질을 변경하지 않고, 말과 쓰기와 신호 언어(손짓, 몸짓, 표정 등)를 통해 표현될 수 있다”고 버위크는 말한다. ”그것은 당신이 듣고 있는 외부적인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머리 안쪽에서의 표현에 관한 것이다”.
실험실에 있는 버위크의 사진은 MIT 에서 보도한 최초의 보도 자료에 게재된 것이다.
지적설계 이론가들과 인식 신경과학자들은 이것과 함께 야외활동의 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언어의 핵심이 육체적 표현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개념이라면, 그것은 진화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적설계 과학자들은 지식의 산물인 정보(information)는 그것을 전달하는 기질(substrate)과는 독립적인 여러 방법으로 표현되어질 수 있다는 상식적인 개념을 여러 해 동안 설명하여 왔다. ”존은 메리를 사랑한다” 라는 문장은 모래에 써서, 공중에 써서, 전자(e-mail, TV)로, 음파로, 종이와 잉크로, 손짓(몸짓) 언어로, 로프에 매듭으로, 다른 방법들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언어의 진화”는 의미 있는 정보의 진화에 관한 이론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당신은 무의미함에서 의미를, 무목적에서 목적을 얻을 수 없다. 당신은 버위크가 비합리적인 도약을 하는 것을 보았는가? 진화론적인 접근은 결코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그리고 나서 그는 통찰력을 위해 새의 노래와 시에 대한 연구로 돌아갔다. 그는 모든 유물론적 세계관이 빠트리고 있는 기본적인 단어인 ‘정보(information)’를 추가할 때까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진화론자들이 어떻게 대중들을 속이고 있는지 다시 한번 주목하라. 그들은 사람들이 보도록 Foxp2 유전자 깃발을 흔들어대면서, ”또 다시 다윈이 승리했다”(example)라는 노래를 부르며 칭송했었다. 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들의 설명은 아마도 틀렸다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존은 메리를 사랑할지 모른다. 그러나 찰리는 진리(tRuth)를 경멸하고 있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v.info/2008/02/evolutionary_theory_can146t_handle_language/
출처 - CEH, 2008. 2. 21.